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103화 (103/112)

103화.

14.21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허리 언저리의 엄청난 통증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줄 알지만 척추가 으스러진 줄 알았다. 밧줄에 묶인 채 거세게 내팽개쳐진 듯한 아찔함과 어지럼증이 함께 치밀었다. 세아는 균형을 잡기 위해 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어두웠다. 다행히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내린 손은 보이지 않았다. 카일리가 위에서 처리했거나, 아니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걸까. 이 정도 충격에 의식을 잃어버리다니, 정신적으로 약해지니 고통의 역치도 낮아진 느낌이었다.

일단 시야를 밝히고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세아는 두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휘둘러 스킬로 불을 밝혔다. 갑작스러운 빛이 눈을 찔러 세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이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주위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 돼.’

오싹한 두려움이 단숨에 세아의 이성을 덮어 버렸다.

정면은 막힌 벽이었다. 양옆으로 바삐 고개를 돌리니 거기도 벽. 세아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좁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세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좁아…….’

분명 위에서 떨어졌는데, 천장도 막혀 있다. 좁고 답답한 지하 통로에 갇힌 느낌이었다. 여긴 어디일까. 던전에서 추락했으니 분명 같은 던전의 아래일 것이다. 그런데 왜 떨어진 구멍조차 보이지 않는가.

낮은 천장에 손을 댔다. 차갑고 단단했다. 힘을 주어 밀어 보았으나 시멘트벽을 미는 듯한 막막함만 전해졌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미쳐 버릴 것 같다. 통로가 점점 좁아지는 환상, 온몸이 으스러지고 형체도 없이 거죽만 남는 상상, 마치 터진 물주머니처럼 납작하게 으깨져 평평해지는 느낌…….

세아는 본능처럼 벽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내부 폭발.”

주위는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벽이 깨지거나 안에서부터 갈라지지도 않았다. 힘이 모자란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닐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발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세아는 그 예감을 떨쳐 버리듯, 조금 먼 바닥에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쾅! 엄청난 위력의 불덩이가 바닥에 꽂혔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세아는 숨을 헐떡이며 손등으로 이마를 닦았다. 어느새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미 등까지 축축했다.

넓은 곳으로 가야 해. 아니, 여기를 넓혀야 해. 여기 오래 있을 수가 없어…….

세아는 절박하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작정 앞으로 한 발 내딛은 순간, 무언가 단단한 게 발끝에 걸렸다.

고개를 숙이니 올리버가 만든 검이 시야에 들어왔다. 추락할 때 놓쳐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쥐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세아는 일단 허리를 굽혀 검을 주웠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시스템 속성 몬스터가 출몰하면 이 검이 필요할 것이다.

“정이준?”

세아는 목을 긁어 억지로 소리를 냈다. 카일리도, 리웨이도 불렀다. 혜진의 이름도 불러 보았다. 그들이 자신을 따라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들이 바로 뛰어내렸다 해도, 자신처럼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추락했다면…….

각각 찢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세아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나아갔다. 마음이 약해지려 할 때마다, 기절할 듯 시야가 흐려질 때마다 검을 고쳐 쥐었다. 차갑고 단단한 검이 세아를 붙잡아 주었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라는 예감이 세아를 두렵게 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외길이었다. 몇십 분이나 걸은 느낌인데 갈림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던전 어디에나 있는 트랩도 없었다. 세아는 자기가 만든 조명에 의지해 빛 한 줄기 없는 어둠 속을 뚫고 가야 했다.

“이준아! 정이준!”

통로 안에 세아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누구라도 대답해 주면 좋겠는데, 들리지 않는 걸까. 다들 어디 있는 걸까.

그 순간, 갑자기 오른쪽 벽이 스르르 움직였다.

세아는 공포에 질려 몸을 반대편에 딱 붙였다. 분명 움직였어. 방금, 방금 한 뼘 정도, 소리도 없이 살짝 움직였잖아. 통로도 좁아졌어. 원래부터 이렇게 좁았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 서서히 좁아지고 있었나?

스윽, 마치 누가 반대편에서 벽을 민 것처럼 벽이 다가왔다. 세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환상 속의 고통이 온몸을 덮치자 세아가 비명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반원 결계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아아악!”

차라리 죽을까? 죽자. 자살하자. 그래서 여기서 벗어나자. 빨리 여기서 나가야 돼. 그 고통을 다시 당하느니, 지금 당장 무기로 목을 꿰뚫어서…….

쩌적, 금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세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거나 스스로 목을 그었을 것이다.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결계 너머를 바라보았다. 스킬을 사용해도 멀쩡하던 벽에, 희미하게 금이 간 게 보였다.

세아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벽에 새겨진 균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벽은 조금 멀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다는 느낌은 그저 착각이었나.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부술 수 있어.’

세아는 오른손에 든 무기를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스킬로는 던전 벽이나 천장에 충격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올리버가 만든 검은 달랐다. 여기 이준의 정화 스킬이 깃들어 있다. 시스템 속성 몬스터를 살해하는 스킬이. 어쩌면 그것 때문에 벽이 부서지는 건지도 모른다.

검은 가볍고 날렵했지만 위력은 보기와 달랐다. 사용하기에 따라 둔기가 될 수도 있다. 세아는 왼손으로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가능성이 보이자 마치 동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 이성이 돌아왔다. 몸의 떨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세아, 정신 차려. 그녀는 스스로를 냉혹하게 독려했다.

여긴 소원 던전이 아니고,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아. 히든 퀘스트 클리어가 코앞이야. 시스템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여기서 죽지 않아.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

그녀는 결계를 거두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바보처럼 환각이나 보다 자살하고 싶진 않았다. 아마 시스템이 그 꼴을 본다면 배를 잡고 뒤집어져 웃겠지. 이준을 대신해 대가를 치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서더니, 트라우마에 붙들려 발작해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세아는 검을 두 손으로 쥐고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쾅! 쾅! 단단한 날로 몇 번이고 정면을 내리쳤다.

미세하던 금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 갔다. 공간을 넓혀야 한다는 일념으로 세아는 다시 온 힘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머잖아 우르르 하고 벽이 무너졌다. 마치 대포알에 맞은 듯 일정 부분만 조각조각 나서 쏟아졌다. 세아는 숨을 헐떡이며 무너진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뭐지?’

또 하나의 통로가 있다. 자신이 있던 통로와 평행을 이루며 뻗어 있었던 걸까. 세아는 무너진 잔해를 타고 넘어 그 통로로 건너갔다. 새로운 벽을 앞에 두고 좌우를 살폈으나 여기도 인기척은 없었다.

어쩌면 파티원이 다른 통로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구멍으로 끌려간 자신을 두고 던전에 올라갔을 리 없다. 분명 구하러 왔을 텐데 보이질 않으니, 각자 어떤 힘에 휘말려 다른 공간에 떨어졌을 확률이 높다.

‘계속 가자.’

앞에 나타나는 모든 벽을 부수어 통로와 통로를 관통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 수밖에 없다.

벽이 무너진다.

다음 벽도 부서졌다.

처음엔 힘이 많이 필요했지만 요령이 붙으니 쉬웠다. 두려움에 떨며 끝없는 길을 따라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몸을 움직이니 열이 오르고 땀이 흘렀다. 자기가 살아서 싸우고 있음을 알려 주는 열기였다.

다시 벽을 부쉈을 때, 갑자기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본능처럼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바닥은 멀쩡했다. 전처럼 무너지는 느낌도 없었다. 세아는 잘못 느꼈나 하며 다시 벽을 무너뜨렸다.

그 순간, 앞뒤의 벽이 무너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세아는 검을 너무 꽉 쥐어 붉어진 손을 벽에 갖다 댔다. 떨림이 확실히 느껴졌다. 이번에도 시간이 지나니 진동이 멎었지만, 세아는 불길함에 행동을 멈추었다.

자신은 분명 던전 지하로 떨어졌다. 그렇다면 여기는…….

‘던전의 기반일지도 몰라.’

높은 던전을 떠받치는 지하의 지지대. 시스템 던전 자체가 지하에 있지만, 공략을 진행할수록 위로 올라가게 된다. 만일 여기가 던전의 기반이 확실하다면, 이대로 계속 부쉈다간 던전 전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

고개를 쳐들어 천장을 보았다. 쏟아지는 잔해와 으깨지는 머리통의 환영이 동시에 그녀의 마음을 덮쳤다.

이대로 던전 기반을 파괴할 수도 없고, 좁은 통로에 갇혀 있을 수도 없다. 세아는 스스로에게 이 공간은 좁지 않다고 속삭였지만 소용없었다. 뒤를 돌아보며 자기가 지금껏 지나온 길을 확인했지만, 그녀가 지금 비좁은 통로에 있는 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었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아 세아는 자기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공기는 코만 들락거릴 뿐 가슴을 지나 폐에 이르지 못했다.

쓰러질 것 같아. 여기서 죽을 것 같아. 세아는 잠시 얻었던 희망과 에너지를 잃고 검을 놓쳤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음이 사방에 번졌다.

“우윽…….”

세아는 부서지지 않은 벽에 등을 기대며 구역질을 했다. 이대로 내장까지 다 토해 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이깟 통로에서 죽어 가는 자신이 한심했다. 한 번도 이런 생각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성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던전이 무너지기 전에 빨리 여길 부수고 밖으로 나가는 게 맞을지도 몰라.’

계획의 앞뒤를 따지지도 않고 세아는 떨어뜨린 검을 주웠다. 비명을 지르면 정말로 정신을 놓칠 것 같아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몇 번이고 벽을 내리쳤다. 부수고 나가자. 여기서 탈출하자. 천장도 무너뜨려야겠다.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서 서둘러 떠나자.

벽이 하나 무너질 때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는 듯 사방이 흔들렸다. 자욱하게 날리는 먼지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소음 때문에 이성이 점점 더 빨리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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