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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의 히든 퀘스트-104화 (104/112)

104화.

공간이 주저앉으며 정신도 함께 으깨진다. 시야가 녹아내리는 듯 흐려진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바닥과 천장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간단히 뭉개 버릴 것만 같다. 결계로 막을 수 있을까, 돌무더기 사이에 갇혀 죽는 건 아닐까?

세아는 또 다시 나타난 벽을 앞에 두고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녀는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마치 거대한 집을 지탱하는 마지막 기둥을 부수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때, 소리가 들렸다.

“누나!”

옆에서 덮쳐온 사람의 무게 때문에 몸이 휘청 넘어간다. 거의 이성을 잃은 채였던 세아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상대를 죽일 뻔했다. 그러나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지느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몸이 뒤엉켜 바닥에 나뒹굴었다.

“누나, 정신 차려요. 누나!”

나타난 이준이 넘어진 세아의 어깨를 쥐고 애타게 외쳤다. 세아는 익숙한 그의 얼굴과 회색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자기가 발작하는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이준?”

믿을 수가 없어서 소리 내어 불렀다.

“너 어떻게 왔어? 계속 근처에 있었어?”

“구멍으로 뛰어내렸는데 이상한 곳에 떨어졌어요. 가도 가도 길이 끝나질 않아서 멈춰 있는데 주변이 흔들리고 벽이 무너져서…….”

말을 잇던 이준이 갑자기 세아를 부축해 일으켰다. 세아는 자기 몸이 폭풍 속의 나뭇가지처럼 볼품없이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도대체 왜 이래, 당혹이 덮쳐 왔으나 이준은 침착했다.

“여기서 나가야 돼요. 여긴 아마 던전의 기반일 거예요. 아래서부터 무너뜨렸으니 이제 던전 전체가 붕괴될지도 몰라요.”

세아는 아무 생각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준의 부축을 받아 한 걸음씩 나아갔다. 벽을 부수던 때의 힘과 기운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검은 생명줄처럼 쥐고 있었다. 어떤 본능이 검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이준과 함께 있는데도 이 공간은 세아를 미치게 했다. 천장이 너무 낮고 길도 너무 좁다. 세아는 떨림을 참으려고 애쓰며 의연한 척 물었다.

“출구가 어딘데?”

“…….”

“이준아, 출구가 어딘지 알고 가는 거야?”

이준은 고개를 돌려 세아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입술까지 파랗게 질린 모습이 애처로웠다. 늘 강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는데,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대신해서 이렇게…….

이준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린 세아를 벽에 기대 세운 다음 자기도 맞은편에 섰다. 세아를 응시하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누나, 잘 들어요. 다른 파티원도 전부 아래로 뛰어내렸어요. 다들 기반 어딘가에 있을 텐데, 어디쯤 떨어졌을지 알 수도 없고 찾으러 갈 시간도 없어요. 여긴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세아는 이준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출구도 모르고, 빠져나갈 방법도 없다. 차라리 처음 생각대로 여기서 죽는 게 맞나, 그런 절망적인 가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이준이 제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비상 탈출 스크롤을 한 장 꺼냈다.

“누나. 이거…… 비상용으로 챙긴 거라 한 장뿐이에요. 나머지는 짐 가방에 있는데 가져오질 못했어요.”

“무슨 소리야?”

“일단 이걸로 누나 먼저 나가요.”

“개소리 마.”

정신없는 중에도 이준의 제안을 예상한 세아가 짓씹듯 거절의 말을 뱉었다.

“어차피 네가 죽으면 정화 스킬 적용한 무기도 다 소용 없어. 그럼 난 나가서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금 그렇게 하자는 거야?”

“여기서 깔려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이준은 전에 없이 강경한 어조로 내뱉곤 세아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세아를 직시하는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나, 목소리에는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누나, 누난 여기서 견딜 수 없어요……. 누나도 알잖아요. 여기 무섭잖아요. 무서워하면서 죽게 할 순 없어요.”

“우습게 보지 마, 난…….”

이깟 거 하나도 안 무서워.

그 짧은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사실은 지금도 미칠 것 같다. 어쩌면 이미 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까짓 압사가 뭐라고, 어차피 환각일 뿐이었는데, 그런 일은 다신 벌어지지 않을 텐데,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나약하게 구는가.

자기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지독한 모멸감을 떨치고자 세아는 모질게 물었다.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

“뭐라고요?”

“네가 혜진 씨 여기로 불렀지.”

이준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침묵했다. 세아는 놀라서 벌어진 그의 입을 보았다. 그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서늘하게 추궁했다.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미각성자를 굳이 여기까지 불렀겠지. 대체 뭔데?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뭐야. 네 계획이 틀어져서 이번 생을 이렇게 끝내려는 거 아니야?”

이준의 침묵 속에서 공간의 진동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지진이 일어나는 듯 사방이 흔들렸다. 세아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다그쳤다.

“왜 날 속여?”

분노와 배신감이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생각은 함부로 짓쳐 달려갔다.

네가 어떻게 날 속여.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내 회귀와 과거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정이준, 네가 어떻게 나를 속일 수 있어? 내가 배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삭였을 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세아는 이를 갈며 비난했다.

“너만은 날 속이지 말아야지.”

“누나.”

이준은 세아의 손에 억지로 스크롤을 쥐여 주었다. 닿는 그의 손은 유난히 차가웠다.

“히든 퀘스트가 끝나면 다 말해 줄게요.”

하, 저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비웃을 작정은 아니었는데 그저 허탈하고 화가 났다. 왜 속였느냐고, 무슨 거짓말을 했느냐고 따지니 말을 돌린다. 세아는 입씨름할 기운도 없어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다 글렀어. 이번에도 다시 시작해야 돼.”

“다시 하면 되죠. 누나, 우린 해낼 거예요.”

이준은 짙은 검은 눈으로 세아를 응시했다. 세아는 이준이 자기 손을 감싸 쥐는 걸 느꼈다. 스크롤을 쥐여 준 이준은 이제 세아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그걸 찢으려 들고 있었다. 그는 세아가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반복해 말했다.

“나는 한 번도 그걸 의심한 적 없어요. 우리는 해낼 거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같이 살 거예요.”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여기 있다간 아마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무너지는 잔해에 머리가 터지고 살이 으깨지겠지. 세아는 몸서리를 치며 이준을 마주보았다. 그를 여기 버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혼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 이준이 가까이 다가왔다. 툭, 이마가 닿았다. 세아는 그의 체온이 무척 낮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자기 몸이 흥분으로 뜨거워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나요? 앞으로 잘한다고 했잖아요. 누나 대신 죽으라고 하면 그렇게 한다고, 히든 퀘스트를 끝낼 때까지 노력한다고.”

몰라,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딴 걸 어떻게 기억해. 벽에 금이 가고 멀리서부터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지진이 난 듯 세상이 흔들리는데, 그런 약속 같은 거…….

그 순간, 아주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짧은 입맞춤, 이어지는 이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마저 스며 있었다.

“진심이었어요.”

이준이 세아의 손을 움직였다.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엉망으로 구겨진 스크롤이 절반으로 찢어지는 소리가 굉음 속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정이준, 하고 부르며 손을 뻗는 순간 그의 몸과 무너지는 풍경이 동시에 사라졌다.

눈을 깜빡인 순간 세아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러나 던전 밖의 공터가 아니었다. 세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보스 룸 앞에 있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에 삭풍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창을 열어 바람을 느낄 때처럼, 미소 역시 선명하고 서늘했다.

세아는 마치 부름을 받은 듯 그리로 나아갔다. 입술은 운명을 발음할 때처럼 둥글게 열렸다.

“혜진 씨?”

14.22

보스 몬스터는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 열셋 달린 용도, 거대한 하마도, 모두 과거의 악몽일 뿐이라는 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안에 있는 존재는 혜진 하나였다. 그녀는 높이 솟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괸 모습은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쩌면 계단을 열 개쯤 올라야 하는 단 위에 있어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왕좌? 세아가 희미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그렇게 생각한 순간, 턱을 괸 채 앉았던 혜진이 허리를 똑바로 일으켜 세우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아 씨.”

세아는 혜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습격에 대비하는 사람처럼 느린 걸음이었으나 방향만은 정확했다. 세아는 땀이 배어나는 손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세아는 검을 꽉 쥔 채 나아가다가 계단 아래 멈춰 섰다. 왕좌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때 혜진이 벌떡 일어나 반갑게 아래로 뛰어 내려왔기 때문이다.

“오래 기다렸어요.”

그렇게 말한 혜진이 마치 넘어지듯 세아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세아는 빈 손으로 그녀를 마주 안아 주지 않았다. 괴물의 입속에 들어온 듯 오싹했고, 팔뚝을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다가오는 혜진의 배를 쑤셔 버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느라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깨달음은 늘 그랬듯 선명하게 스민다.

이건 김혜진이 아니야.

뜻밖에도 충격은 크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이미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 존재와 만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숙명처럼 느끼고 있었는지도…….

그때, 혜진이 탁 세아의 손을 잡았다. 세아를 올려다보는 혜진의 얼굴에는 가증한 무구밖에 없었다. 세아는 그녀를 뿌리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사실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정이준 씨와 어떤 관계인지 말이에요.”

정말 알고 싶었던 정보인데 지금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로봇이 말하는 걸 듣는 기분이었다. 멀쩡하게 말을 잇는 혜진의 얼굴이 갑자기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으깨진 두부처럼 변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혜진의 입술은 평소처럼 평범하게 움직였다.

“얼마 전에 정이준 씨가 나한테 연락해 왔어요.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만나자고 했죠. 친분은 없지만 S급 헌터가 도와달라기에 만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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