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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의 히든 퀘스트-105화 (105/112)

105화.

“그만해.”

세아가 탁, 혜진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멀어진 세아와 빈 제 손을 번갈아 바라본 혜진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아 씨? 왜…….”

“혜진 씨 흉내 내지 마. 하나도 안 비슷하니까.”

혜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같은 자세로 선 채 세아를 바라보던 혜진의 입술 사이로 픽,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느긋하게 자세를 바로 하며 놀리는 어조로 물었다.

“왜, 똑같잖아? 정이준은 속던데.”

세아는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린 채 혜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달려들거나 수를 쓸지도 모른다 경계했는데, 시스템은 우뚝 선 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래서 무언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벽과 기둥이 부러지고 무너져 잔해로 변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은 기묘한 힘으로 보호받는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변덕이야? 넌 이게 장난 같아?”

“장난?”

시스템은 여전히 느물거리는 얼굴로 되물었다.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한데 눈은 더없이 서늘했다.

“네가 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데 장난 같을까?”

세아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시스템이 휙 몸을 돌렸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는 가녀린 뒷모습을 보던 세아는 지금 달려들어 저 등에 칼을 꽂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왕좌에 다다른 시스템이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이세아를 향해, 그녀는 눈부신 웃음을 던졌다.

“내가 널 만만하게 본 건 인정해. 솔직히 정이준을 디버그로 만들면서, 네가 몇 번 죽고 살기를 반복하면 미쳐 버릴 줄 알았어.”

세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단 위의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그쪽도 답을 기대한 건 아닌 듯 명랑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넌 미치지도, 길을 잘못 들지도 않았지. 회귀하고 또 회귀하면서 기어코 방향을 찾아내더라고. 게다가 정이준까지 내 계획을 망치기 시작했어. 그 디버그는 꽤 공들여서 만들었는데 말이야.”

확실히 시스템의 프로그래밍은 정교하고 섬세했다. 최후의 순간에 세아를 배신하고 살해하는 설계를 깨고 나오기 위해, 이준은 몇 번이고 생을 반복했다.

“네가 정이준의 과거를 전부 찾아 줬을 때 깨달았지. 아, 이런 방법으로는 안 되겠구나. 나는 이 버그를 없앨 수도 이길 수도 없겠구나.”

“그래서, 항복하려고?”

세아가 잇새로 빈정거렸다.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여기는 시스템의 요새나 다름없다. 이미 시스템은 자기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충분히 보여 주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던전 지형이 나타나고, 갑자기 땅이 꺼지며 던전 기반으로 추락하고……. 무슨 짓을 당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당장 벽이라도 무너질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시스템의 답이 들렸다.

“아니, 난 그냥 여기서 널 기다렸어. 보스 룸 문을 활짝 열고 혼자 앉아서 말이야. 네 잘난 파티원들을 떼어 놓느라 좀 애를 먹었지만.”

“자살 시도치곤 복잡하네.”

“허세 부리지 마, 이세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당장 뛰어 올라와서 날 죽이지 않지?”

세아가 일순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애꿎은 검만 세게 움켜쥐었다. 아직 검의 힘은 살아 있다. 이준이 기반의 잔해에 깔려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카일리와 리웨이도 분명 무사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시스템의 말대로 곧장 뛰어 올라가 검을 쑤시는 게 옳음을 안다. 모든 던전은 사라지고 파티원도 무사할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찾을 수 있다. 던전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그래서 아래 있는 모두가 죽기 전에…….

그러나 세아는 발이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마음을 사로잡은 의구심이 세아를 붙들었다.

“정이준이 왜 혜진 씨에게 연락했지?”

시스템이 혜진의 몸을 빼앗았음을 알고 연락했을 리는 없다. 분명 혜진의 정보가 필요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준은 세아에게 먼저 상의하지 않고 혜진과 만났을까. 왜 미각성자를 던전에 들여놓는 무리수까지 두었을까.

“이준이한테 무슨 짓을 했어?”

시스템이 빙긋 웃었다. 미로를 간신히 빠져나온 아이를 칭찬하듯 오만한 미소였다.

“말했잖아, 무작정 죽여서는 널 이기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래서 무슨 짓을 했냐고.”

“히든 퀘스트를 줬지.”

대답이 너무 단조로운 어조로 튀어나와 세아는 잠시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했다.

정이준의 히든 퀘스트?

“직접 구경해.”

시스템이 건성으로 손을 저으니, 세아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히든 퀘스트: 시스템 수호

히든 퀘스트 획득 조건: 정화 스킬 강화

클리어 조건: 이세아 정화

클리어 실패 페널티: 죽음]

세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이 히든 퀘스트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이세아가 시스템을 살해하면, 정이준도 함께 죽는다.

눈을 깜빡이니 시스템 창이 사라졌다. 세아는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참았던 숨을 토했다. 그제야 자기가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은땀이 눅진하게 등을 적셨다. 쏟아지는 목소리가 마비된 정신을 깨웠다.

“나는 너와 싸우지 않아, 이세아. 이미 졌으니까. 이제 알 수 있어. 무슨 짓을 해도 너와 나는 여기서 만나게 되리라는 걸.”

시스템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가셨다. 지루한 공판을 끝낼 때처럼 덤덤하고 건조한 음성이었다. 이어진 말은 칼날처럼 세아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니 네 마음과 싸우게 해야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잖아, 안 그래?

마지막 말은 아득한 메아리처럼 되풀이되었다.

이세아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

못 가진 것 없었고 각성한 후에는 무언가를 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모든 게 세아의 것이었으니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마음도 보살피지 않고, 혼자 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다 부수며 살았다.

그러다가 만난 정이준.

언제부터?

처음에는 그저 이용하려고 했을 뿐이다. 꼭 필요한 존재니 무기처럼 사용하고 잊으려 했다. 그런데 그는 세아 앞에서 웃었고, 무방비하게 울었고,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간청하듯 손을 뻗어 세아의 뺨을 감싸며 살며시 닿아 오던 젖은 입술…….

이준이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원 던전의 대가를 대신 치르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이미 그랬다. 그의 모든 과거를 보았을 때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강인함에 놀랐다.

이런 남자와 키스하면 어떤 기분일까, 처음으로 궁금했다.

기분이 좋았다. 지난 생에서는 몸을 겹친 적도 있으면서, 고작 키스 정도에 떠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더 놀려 주고 싶다. 세상이 바뀌면 훨씬 더 많은 일을 함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세아의 생각은 느리게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다.

세뇌에서 벗어난 이준이 제게 용서를 구하며 눈물을 보였을 때부터. 그의 세뇌를 풀기 위해 입을 맞추었을 때부터. 언젠가 그가 병이 난 것 같다며 매달렸을 때부터. 어두운 펍에서 처음으로 이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부터. 호텔에서 어깨를 부딪쳐 그를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의 마음으로 돌이켜 떠올리는 그의 모습은 하나하나 사랑스러워서, 마음의 시작을 어림해 볼 수가 없다.

나는 정이준을 죽일 수 없어.

아득한 깨달음 너머로 시스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정이준은 김혜진에게 연락해 히든 퀘스트를 없앨 방법을 찾아 달라고 했어. 이 던전에서 무언가 단서를 발견할 거라고 기대한 모양이지. 너도 봤지? 걔가 내 핸드폰이 아래로 떨어질까 봐 어쩔 줄 모르던 거. 사실 거기 단서 같은 건 없는데, 그 간절한 꼴은 진짜 코미디였어.”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세아는 분노로 타오르는 눈을 들어 시스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시스템은 전혀 겁먹지 않고 말을 덧댔다.

“히든 퀘스트를 없애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어. 그냥 죽겠대.”

세아가 눈을 깜빡였다.

“이세아, 널 위해서 죽겠대.”

세아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 결심 때문에, 이준은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든 퀘스트에 대해 조금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는 세아를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세아가 고민 없이 보스 몬스터에게 달려들어 정화하고 자유를 찾길 바랐던 것이다.

혜진을 왜 던전으로 불렀느냐고, 꿍꿍이가 뭐냐고 물었을 때 정이준이 뭐라고 답했던가.

‘히든 퀘스트가 끝나면 다 말해 줄게요.’

그의 죽음이 답이다. 세아와의 영원한 작별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그래서 내내 이상하게 굴었던 거야. 세아는 헛웃음도 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나보다 더 예쁜 사람 만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소중한 사람을 잃어도 잊고 잘 살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몸을 겹치면서도 그는 끝내 자기 죽음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개새끼. 넌 진짜 개새끼야, 정이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수백 미터를 멈추지 않고 달려온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심장이 가슴이 아니라 목구멍에서 뛰는 느낌이었다. 세아는 미세하게 떨면서 고개를 들어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단이 아득하게 높아 보였다. 고작 계단 열 개일 뿐인데.

“내가…….”

묻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험하게 갈라졌다. 세아는 마른침을 삼켜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널 죽이지 않겠다면? 내 히든 퀘스트를 없앨 수 있어?”

시스템의 얼굴로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자비로운 신처럼 이세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답했다.

“넌 버그야. 내 마음대로 그걸 없앨 순 없지.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 아니야? 정이준 말처럼, 둘이 영원히 사는 거야.”

이별 없는 세상에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면서. 나이 들었다가도 다시 젊어지면서. 아름다운 동화처럼,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이제껏 누린 모든 힘과 명예와 부를 다 누리면서 어여쁜 사랑까지 가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커튼콜은 영원히 없을 테고 배우는 퇴장하지 않는다. 잘못된 세상에서 잘못된 연극을.

그러나 정이준만은 언제나 옆에 머문다. 회귀자의 외로운 삶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의 동반자. 말 그대로 죽음조차 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하리라.

던전이 흔들리고 넘어지며 무너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아득한 굉음이 명확하게 귓가에 닿았다. 선택의 순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냥 잘못된 세상에서 누나랑 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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