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106화 (106/112)

106화.

세아는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랐다. 하나, 둘, 셋, 무의미한 수를 헤아리다가 포기했다. 검은 여전히 오른손에 있었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세아는 생각했다. 한 발 나아갈 때마다 웃고 우는 정이준의 모습이 마음을 스쳤다.

‘다 잊고 나랑 살아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그는 언젠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때 세아는 아마 그렇게 살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애원하는 이준의 연약함은 몹시 서글펐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던가, 용서를 비는 그를 달래 주었던가.

‘나도 누나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잘못된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살자고 해 놓고, 정작 그는 제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카일리와 리웨이는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미각성자인 혜진을 보고도 놀라거나 억지로 쫓아내려 하지 않았던 걸까.

나를 믿지 못했나, 아니면…….

‘누나를 사랑해요.’

시스템 앞에 다다라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을 때, 세아는 울고 있었다.

공포나 아픔 때문이 아니었다. 세아는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몸이 떨렸고 검을 쥔 손은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지독한 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끔찍한 한기가 치밀었다.

시스템은 너그럽게 웃으며 이세아의 축축한 뺨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 이세아. 나도 네 마음 알아. 원치 않게 버그가 되어 힘들었겠지.”

하나도 모르면서, 아는 척 눈물을 닦아 주는 게 우스웠다. 진정 이 세상의 신인 양 행세하는 게 기막혔다. 세아는 차갑고 단호하게 시스템의 손을 떨쳐 버렸다.

위로 따위는 필요 없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맑은 시선을 시스템에게 고정했다.

“아니, 별로 힘들지 않았어.”

정이준을 만났다. 카일리와 리웨이, 올리버와 함께했다. 죽는 순간에도 알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고 더 많은 마음을 누렸다. 사랑도 신뢰도 필요 없던 삶, 완벽하고 흠 없는 세계에 금이 가자 거인의 정원에 봄이 오듯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파티원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여기에 다다르지 못했으리라. 이준이 아니었다면 카일리와 만날 일 없었을 테고, 카일리가 아니었다면 리웨이와 연이 없었을 터다. 남의 일이라 여겼으니 올리버를 구하지도 않았을 테니 결국 정화 스킬이 깃든 무기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준 없는 지금 속절없이 시스템에게 굴복했으리라.

섬세하게 이어진 인과를 느낀다. 모두 충동적인 선택이거나 우연이었는데, 모아 놓으니 운명이다.

왼손을 뻗어 시스템의 어깨를 붙잡는다. 달아나거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혜진의 단단한 어깨뼈가 느껴졌다. 세아는 제 손마저 아프도록 힘을 주었다. 시스템은 세아가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걸 아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표정을 본 순간, 세아의 머릿속에 최후의 의문이 떠올랐다. 엄습한 패배의 예감 때문에 무디어졌던 이성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시스템과 정이준, 어느 쪽이 먼저 죽을까?’

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명확한 답을 얻고 싶다면 이준의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한다. 결과가 어떠하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되리라.

세아는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분명 그렇다 여겼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이미 아는 듯.

‘누나. 바다 안 가도 아쉽지 않겠어요?’

만일 내 생각이 틀렸다면, 그래서 정말 이준이 죽는다면 그와 바다에 가지 않은 걸, 함께 앉아 시시한 일몰을 보지 못한 걸 가장 후회하겠지.

세아는 알고도 멈추지 않았다.

“이세아, 너…….”

시스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하는 의구심이 운무처럼 그 얼굴을 뒤덮었다. 떨리는 눈을 직시하며 세아가 되물었다.

“나더러 버그라고?”

최초의 버그. 최초의 각성자. 시스템으로부터 부여받은 힘으로 시스템을 살해해야 할 모순에 직면한 헌터. 이 이야기, 이 세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결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장에 다다른 이세아의 눈이 차갑게 타올랐다.

종말의 순간, 승자는 없으리라. 다만 선택이 있을 뿐.

“버그는 너야.”

시간이 되돌아가고, 사람이 으깨지고, 미각성자는 몸을 빼앗기고, 하늘과 땅에서 몬스터가 창궐한다. 질서가 사라지고 생사의 무게추가 깨지고 모든 낮과 밤이 시스템에 귀속된다.

삶은 시스템이 아니야.

이세아가 선언했다.

“내 세상에서 꺼져 버려.”

검은 아주 부드럽게 시스템의 몸을 꿰뚫었다.

사람의 가죽과 근육을 뚫고 뼈를 부수는 듯한 이물감은 전혀 없었다. 점토 인간의 배에 칼을 쑤신 듯 날은 자연스럽게 밀렸다.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손쉬웠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환부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세아는 검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시스템의 검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살해하고 있는지 똑똑히 목격하면서.

시스템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나 어떤 속내도 음성이 되지는 못했다. 사람이 아니니 유언은 필요 없으리라, 세아는 냉혹하게 생각했다.

마지막 시스템 창이 나타나 시야를 가렸다.

[히든 퀘스트, ‘시스템 살해’ 클리어를 축하합]

지직― 픽셀이 깨지듯 시스템 창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문장이 완성되기도 전에 시스템 창이 사라졌다. 마치 텔레비전이 꺼지듯 툭, 허무하고 간단하게.

퀘스트 상태가 클리어로 바뀌기도 전에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혜진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세아는 검을 놓고, 무너지는 육신을 가볍게 받아 안았다. 혜진의 심장이 뛰고 있다. 안정적인 호흡을 느끼며 세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혜진의 몸에 깊이 꽂은 검이 서서히 빛의 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수수한 손잡이부터, 눈부시게 흰 가루로 변해 허공으로 느리게 흩어졌다. 수백 마리의 작은 나비가 환한 날개를 팔랑이며 우주로 돌아가듯이.

작고 무수한 빛이 점점이 주위를 밝히며 주위 풍경이 서서히 무너진다. 이제까지의 모든 무질서를 말끔히 지우면서.

세상이 정화되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세아는 손등으로 앞을 가렸다. 억겁의 시간을 지나는 느낌이나 쓸쓸한 주마등은 없었다. 순간은 오직 순간이었다.

찰나가 흐른 후, 손을 치우고 눈꺼풀을 들어 올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14.23

날이 바뀌고 해가 뜰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던가.

하늘 어귀의 어둠까지 말끔히 지우며 해가 뜬다. 시스템 보스 던전이 있던 황량한 공터의 잡풀이 영롱하게 빛나 가만 살피니, 소담히 맺힌 새벽이슬이 보였다. 빛을 받은 둥근 이슬은 하나하나가 웃는 얼굴 같았다.

먼 곳에 펼쳐진 전나무 산 풍경도 햇빛 때문에 얼룩덜룩 물들어 있었다. 양떼구름이 서천으로 일제히 몰려가는 중이었다. 그 사이로 뜨는 해가 곧은 빛을 쏟아 세상을 맑게 밝혔다. 먼 풍경까지 선명했고 비 갠 날의 아침처럼 쾌청했다.

부는 바람이 떨어진 풀잎과 색색 들꽃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순하고 아름다운 구름이 후, 하고 입김을 분 듯했다. 세아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가락을 감고 사라지는 바람의 옷자락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세아!”

고개를 틀면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세아는 일단 혜진의 몸을 바닥에 눕혔다. 그러기가 무섭게 달려온 카일리와 리웨이가 와락 세아를 끌어안았다. 둘의 몸에서는 지나온 늪 지형 냄새, 던전 기반이 무너질 때 뒤집어쓴 먼지 냄새가 났다. 그러나 향긋한 바람이 불자 모든 냄새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세아, 세아…….”

카일리는 울고 있었다. 세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서럽고도 후련하게. 그녀는 폭발하는 감정에 휘말려 더듬더듬 물었다.

“된, 된 거지? 스킬도 힘도 다, 다 사라졌어, 전부 다……. 이제 끝난 거지?”

세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각성자로 지내 잊고 있던 일상의 감각, ‘미각성자’의 감각이 돌아왔다.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몸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이 정도 무게는 갖고 있어야 지상에 제대로 발붙일 수 있다는 듯.

“응. 다 끝났어.”

카일리는 도저히 달래 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오열했다.

어떤 위로의 말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기에, 세아는 그저 카일리의 등을 쓸어 주었다. 죽은 스테파니, 살아 돌아온 스테파니, 그리고 다시 사라진 스테파니.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눈물을 터뜨린 카일리의 몸은 몹시 뜨거웠다.

리웨이는 울지 않았다. 다만 세아에게서 떨어져 나직하게 물었을 뿐.

“너, 괜찮아?”

괜찮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카일리도 무언가 떠오른 듯 퍼뜩 세아에게서 떨어졌다. 핏기가 가신 세아의 얼굴을 본 카일리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세아는 두 사람 다 이준의 히든 퀘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이준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세아였다.

그는 멀찍한 곳에 쓰러져 있었다. 환한 아침 햇빛을 받으며 누운 모습은 무척이나 고요해서, 마치 모든 장례 준비가 끝난 후 깊은 땅에 묻히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세아가 느리게 발을 뗐다. 따라가려는 카일리를 붙든 리웨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지 마.”

두 사람을 혜진 쪽에 남겨 두고, 세아는 이준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굽혀 곁에 앉았다.

죽었는지 잠들었는지 분간할 수 없는 모습이다. 잔해에 깔렸는지 아름다운 얼굴이 상처투성이였다. 돌조각에 긁힌 상처에 말라붙은 피를 보며 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이준?”

대답 없는 몸으로 손을 뻗어 안았다. 머리를 제 가슴팍에 기대게 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아직 몸이 따뜻하다. 이세아는 어리석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듭 불렀다.

“이준아, 일어나.”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이준이 처음으로 너무나 두려웠다. 그가 자신을 반복해 배반할 때도, 세뇌 스킬에 당해 정화하겠다며 쫓아올 때도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겁이 났다.

내 생각이 틀렸나. 정말 죽었나?

맥을 짚어 보면 간단하다는 걸 안다. 아니, 그냥 코 아래에 손만 대 보아도 생사를 알 수 있다. 다 아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만일 그의 심장이 더는 뛰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상의 빛이 시신을 덮는 면포에 불과하다면…….

“이준아, 정이준.”

다음 순간 세아가 숨을 멈추었다.

이준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느리게 눈을 떴다. 마치 긴 겨울을 아린 속에서 보낸 목련이 피어나듯 찬찬히. 그가 늘 그러했듯 처연하고 찬연하게.

이준은 살아 있었다. 세아만큼이나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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