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눈이 마주치자 그가 흰 꽃잎처럼 웃었다. 어여쁘게 접히는 눈매가 익숙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세아 눈에 아름답게 보일지 아는 남자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죽기 전에 누나랑 만나네요.”
나쁜 새끼야, 바로 그렇게 쏘아 주려 했는데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세아는 치받는 무언가를 간신히 삼키고 내뱉었다.
“너 안 죽어, 멍청아.”
아마 이준은 왜냐고 물을 것이다. 시스템이 죽었는데 어떻게 자신이 살아 있을 수 있느냐고.
최후의 순간 세아는 깨달았다. 정이준보다 시스템이 먼저 죽으리라는 걸.
시스템이 자꾸 사람의 몸을 빼앗아 나타나니 사람과 다름없다 착각했지만, 시스템은 던전과 몬스터, 스킬과 퀘스트 그 자체였다. 시스템의 죽음은 게임 서비스 종료나 다름없다. 종료된 게임의 히든 퀘스트가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세아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 상의하지 않고 멍청하게 굴었느냐고 화도 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준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근데 왜 울어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세아는 그냥 울면서 웃었다. 이 생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표정이었다.
에필로그
세상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헌터 협회와 각성자 센터, 길드 등은 빠른 속도로 와해되었다. 힘을 잃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헌터들은 이유를 찾아 동분서주했지만, 낮은 등급의 각성자였거나 미각성자였던 이들은 던전과 몬스터가 사라진 세계에 환호했다.
던전에 휘말려 사라졌던 사람들도 많이 돌아왔다. 시체로 발견된 사람도 있었지만 살아남은 이도 그만큼 많았다. 그들은 기적을 기다리던 가족과 친구의 찬란한 환영을 받으며 생환했다.
[없어진 건 던전과 헌터뿐? 박물관 전시품도 사라져]
[“평화로운 세상 환영해”…곳곳에서 ‘안심 파티’ 열려]
[“억울한 건 사실, 그러나 공공 안전 생각해야”…길드의 쓸쓸한 웃음]
수천 개의 뉴스가 몇 주 내내 쏟아졌지만 뜨거운 관심은 한 달도 이어지지 않았다. 던전과 관련된 박물관이나 보존실의 용도가 빠르게 바뀌고, 협회와 길드 건물에서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정부 행정 부서 역시 개편의 물살에 휘말렸다.
사람들은 왜 갑자기 시스템이 사라졌는지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세아를 비롯해 진실을 아는 극소수는 굳건히 침묵을 지켰다. 오스카를 보내 세아를 방해했던 미국 협회장 엠마도, 언젠가 시스템을 없애지 말라며 세아를 살해했던 김현호도.
김현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시스템이 사라지고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그의 목소리는 꽤 태연했다.
“결국 성공했네. 축하한다, 이세아.”
“언젠 하지 말라더니.”
세아는 자기 집 차고에 주차하며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스피커 모드로 설정된 핸드폰에서 김현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그땐 상황이 그랬잖아.”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언론에 알려서 헌터였던 사람들 자극해 보든지.”
“그만해. 사과할 테니까.”
세아가 뒤를 돌아보며 핸들을 돌렸다. 차고의 주차 라인 안으로 차가 완벽하게 들어갔다. 시동을 끈 세아는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서 사과니 뭐니 운운하는 김현호가 조금 우스웠다.
“왜, 막상 시스템 사라져도 넌 돈 많으니 좋지? 별 피해도 없잖아. 목숨 내놓고 던전 공략할 필요도 없고.”
“이세아.”
“사과도 네 상황 나쁘지 않으니 하는 거겠지. 내가 입 조심해야 너도 조용히 살 테니까.”
핸드폰 너머에서 김현호가 침묵했다. 세아는 거치대에서 핸드폰을 뺀 다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잔디가 깔린 마당을 지나며 집을 바라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환하게 밝은 거실 창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누군가가 보였다.
미소가 비죽비죽 새어나왔다. 세아는 자기가 웃는 줄도 모르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김현호가 침묵을 깼다.
“왜 그렇게 비꼬는데? 일 다 끝났으니 좋게 지내자는 것뿐이야.”
기가 찼다. 일이 다 정리되었으니 좋게 지내자니, 누구 맘대로 좋게 지내자 말자인가. 차라리 미국 협회장처럼 가만히나 있든지. 세아는 가감 없이 내뱉었다.
“난 너랑 좋게 지낼 마음 없는데. 너나 협회장에 대해서 말하고 다니지 않을 테니까 그냥 잘 먹고 잘 살아라. 괜히 연락하지 말고.”
특별히 화가 난 어조도 아니었다. 덤덤한 통보에 당황한 김현호가 급히 그녀를 불렀다.
“야, 이세아…….”
띠릭, 통화를 종료한 세아가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주방으로 향하는데,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익숙한 냄새라 세아는 메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갈비찜 했나, 언젠가 잡지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대답한 게 떠올랐다.
주방으로 가니 바쁘게 움직이는 이준이 보였다. 셔츠 소매를 몇 번 걷어 올린 뒷모습이 든든하고 흡족했다. 아일랜드 식탁에는 이미 화려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세아는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재킷을 벗었다.
식탁 앞에 앉아, 자기가 온 줄도 모르고 요리에 열중한 이준을 바라본다.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는 단단한 손, 티 없이 희고 매끈한 피부, 집중했는지 아주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양파를 써는 가볍고도 정확한 손놀림…….
세아는 셔츠 소매를 걷으며 이준 옆으로 다가갔다.
“뭐 도와줘?”
“아, 누나.”
세아를 돌아본 그가 해처럼 웃었다. 조금 놀란 듯 눈이 동그랬지만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거의 다 됐어요. 사람들도 거의 다 도착했대요. 인터뷰는 잘 끝났어요?”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S급 헌터였던 열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두의 관심사였다. 대중은 사라진 던전이나 몬스터보다 화려한 영웅의 일상이 어떨지를 더 궁금해 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서 몇 군데 응해 줬는데, 세간의 관심은 조금도 시들해지지 않았다. 앞으로 절대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 직접 운전해 돌아오며 세아는 그런 결심을 한 참이었다.
칼을 도마에 내려놓는 이준을 보며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맨날 똑같은 얘기지. 이제 안 가려고.”
사람들은 자꾸만 물었다, 재앙 이후 최강의 헌터로 살며 배운 게 있냐고. 어떤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느냐고. 그들은 세아가 역사에 기록될 웅장한 잠언 하나를 건네주리라 기대하면서 눈을 빛냈다.
잘 모르겠다고, 세아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고난에도 빛깔과 향이 있을까? 고통과 연약함에도 의미가 있을까? 퀘스트를 끝내고 보상을 받듯, 인생의 난관을 넘으면 꼭 그만큼의 경험치가 쌓이는 것일까? 얻은 게 있으니 이제까지의 쓰라림에도 의미가 있었다 말해야 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상실은 상실, 역경은 역경.
그래도 세아 앞에는 웃으면서 대답하는 이준이 있었다.
“하긴, 계속 가면 끝도 없겠죠. 다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응.”
세아는 계속 이준 옆에 서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인덕션을 끄고 다 된 갈비찜을 옮겨 담은 후 잣을 얹어 장식까지 마친 이준이 문득 세아를 돌아보며 눈을 맞추었다.
“누나? 앉아서 기다려요. 피곤하잖아요.”
“너 보고 싶어서 옆에 있는 건데.”
이준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요리하던 손을 멈춘 그가 가만히 세아와 시선을 얽었다. 산수유 피듯 은은하게 번지는 미소, 곧 허리를 굽힌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 요리하는 거 좋아요?”
“응. 마음에 들어.”
담백한 대답에 얼굴을 붉힌 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수줍게 구는 이준을 뒤로하고, 세아는 간단히 손을 씻으러 갔다.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는 동안, 그녀는 무척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스템이 사라진 세상에 누구보다 빨리 익숙해질 자신이 있었는데, 가끔 어긋난 환경에 떨어진 사람처럼 위화감이 치밀었다.
익숙해지겠지. 세아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시스템 안에서 5년 정도를 살았을 뿐이지만, 자신은 몇십 년 세월을 반복했다. 적응에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하다.
이준도 비슷한 기분일까? 그 역시 회귀와 지난 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자신의 마음을, 이준은 이해할까?
시스템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으면서도, 문득 자신이 또 다른 잘못된 세상에 와 버린 건 아닌가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는 걸…….
주방으로 돌아가니 이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앞에 서서 음식의 차림을 살피던 그가 세아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누나, 다 됐어요.”
그의 무구한 표정 앞에서 모든 물음이 다 사그라진다.
자신은 운명 없는 세상을 선택했다. 거짓된 세계에서 이준과 영원히 사는 대신, 죽음과 이별이 있는 세상에서 함께하기를 원했다.
아마 그 선택에서부터 너와 내가 시작될 것이다.
세아는 다가가 이준의 손을 잡았다. 이준은 세아의 마음을 모르면서도 그녀의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아 왔다. 세아는 자기 심장이 가볍고 유쾌하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는 내내 후회할 일을 잔뜩 만들겠지만, 여기서 손을 잡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초인종이 울렸다. 세아는 이준과 함께 현관으로 나가 문을 활짝 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유한한 시간을 환영하듯이. 모든 변수와 오차를 온몸으로 끌어안듯이.
카일리와 리웨이, 올리버, 혜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누구도 헌터가 아니었고, 연약한 몸으로 생을 살아 내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심지어 세아 그 자신조차도.
그녀는 이제 세계 최강도, 태연하고 여유롭게 군림하는 절대 강자도 아니었다. 이세아는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기 생 안으로 모두가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어서 와요.”
살아남은 얼굴들 너머로 노을 진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해가 강 풍경 너머로 떨어지니, 오래 쓴 이야기책이 덮이듯 날이 저물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