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외전 1. 평범한 세상
세아는 열 시가 넘어서야 느지막하게 눈을 떴다. 예전에는 잠도 적었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세상이 정화된 후에는 달랐다.
S급 헌터로 각성한 후, 처음에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빴다. 던전은 끊임없이 생겨나 사람들을 위협했고,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속도가 생명이었다. 핸드폰 벨소리는 항상 최대 음량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던전의 위험도, 기막힌 퀘스트도 없다. 긴장할 일이 거의 없으니 자연스럽게 아침잠도 늘었다.
세아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다가 벨소리를 들었다. 침대 옆에 있는 인터폰에 불이 들어오더니 이준의 얼굴이 나타났다. 세아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으으으 신음했다.
“누나, 자요?”
저쪽은 일어난 지 한참 되었는지 말짱한 목소리다. 심지어 조금 신이 난 듯 들리기까지 했다. 그제야 오늘 브런치 먹으러 같이 가기로 약속한 게 떠올랐다.
이 상태로 바로 나가지는 못할 듯하니 일단 문 열어 주고 씻기부터 해야겠다. 세아는 손을 뻗어 문을 열어 주고, 다시 한번 몸을 위아래로 쭉 뻗으며 잠을 쫓았다.
“아, 일어나기 싫어.”
요즘 이상하게 몸이 늘어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의욕이 없다. 세아는 부드러운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게으르게 늘어져 있자니 머지않아 이준이 침실로 들어왔다. 넓은 침대에 편안히 늘어진 세아를 보더니 그가 웃었다. 다가온 그가 침대 아래 무릎을 대고 앉아 말을 걸었다.
“누나, 더 잘 거예요?”
그가 가까이 오니 바깥 공기가 확 끼쳐 왔다. 차가운 바람 냄새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여기까지 왔을 그를 보지도 않고 세아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오늘 1시에 강남 가야 하잖아요. 아침이라도 먹고 가야죠.”
아, 그거 때문에 이렇게 일어나기 싫은가. 이준이 조곤조곤 상기시킨 약속이 떠오르자 괜히 더 잠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요즘 각 나라는 헌터들을 데려다 ‘재앙에 관한 기록’을 진행하느라 바빴다. 단순한 잡지 인터뷰 같은 게 아니라 정부에서 하는 작업이었다.
던전도 몬스터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으니, 이제 사람의 기억에 의존해 기록을 남길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 기록이 최선의 대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진은 남았다는 사실. 헌터들은 그 사진을 보고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어떤 몬스터가 있었는지, 약점이 무엇이었는지 등등. 던전 근처에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이나 특이점에 대해서도 알려 주어야 했다.
이렇게 번거로운 일인 줄 모르고 승낙한 게 후회스러웠다. 처음에 찾아온 조사원은 메일만 몇 번 주고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점점 녹취나 다른 헌터와의 기억 대조 등 요구사항이 늘어갔다.
“가기 싫어, 이준아.”
눈을 감은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자 이준이 머리맡에서 나직하게 웃었다. 가을 공기 탓인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유난히 서늘했다.
“그럼 그냥 요리해서 집에서 간단히 먹고 갈까요?”
“아니, 나가기로 했으니까…….”
“오후에 가도 되니까요. 좀 더 뒹굴뒹굴하고 있어요.”
뒹굴뒹굴하라는 말이 재밌어서 세아는 조금 웃었다. 그러자 올라간 입꼬리로 이준의 입술이 톡 떨어졌다. 낙엽 하나가 뺨을 간지럽히고 간 듯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희미하게 물소리가 났다. 침실과 주방이 꽤 멀어, 웬만큼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주 작게, 도마를 움직이는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침실 창문으로 쏟아진 아침 햇살이 벽과 천장, 세아가 돌돌 말아 덮은 이불까지 부드럽게 덧칠했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잠이 물러났다. 세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이불을 걷었다.
‘일어나야지.’
또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차 너무 막히네.”
세아는 기가 질릴 정도로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앞에 있는 차도, 옆에 있는 차도 벌써 5분째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느리게라도 앞으로 나아가는데 지금은 상황이 심각했다.
“여유롭게 나오길 잘했네요.”
운전하던 이준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말은 평온하게 하지만 벌써 30분 넘게 같은 도로에 갇혀 있다. 그의 기분이 좋을 것 같진 않아서, 세아가 달래듯 말했다.
“운전 내가 해도 된다니까. 강남 막힐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한다고 한 거예요. 누나 아까 졸려 보이기도 했고.”
“이럴 때 헬기로 가면 좋은데.”
“하하.”
이준은 동의를 표하듯 조금 웃었다.
시스템이 존재할 때도 서울의 교통 체증은 심각했다. 그렇다고 당장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는데 그 막히는 도로에 서 있을 수 없으니, 헌터는 주로 헬기를 이용했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하게 부는 바람과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익숙해지니 그만큼 편한 교통수단이 없었다. 이렇게 답답한 도로에 갇혀 있으려니 새삼 헬기가 생각났다. 돈이야 많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헬기를 띄울 수 있는 건 아니라 앞으로도 탈 일은 많지 않으리라.
“그리워요?”
이준이 농담조로 물어 왔을 때, 세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설마. 지금이 훨씬 좋아.”
이준은 말없이 오른손을 뻗어 세아의 손을 덮었다. 세아는 그의 크고 흰 손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준이랑 함께 헬기를 타 본 적은 없네, 괜한 생각이 스쳐갔다.
“나중에 헬기 투어 같은 거라도 할래?”
“누나랑요? 좋아요. 해 본 적 있어요?”
“없지. 너랑 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겨우 나아가나 싶었던 차가 신호 때문에 또 멈춰 섰다. 그 틈을 타 이준이 세아 쪽으로 몸을 기울여 뺨에 살짝 입술을 댔다가 물러났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세아를 보며 그가 웃었다.
“헬기에선 이런 거 못 하잖아요.”
세아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가볍게 받아칠 농담이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아서, 괜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앞이나 봐, 정이준.”
“네, 누나.”
대답은 제일 잘 해. 세아는 괜히 옆을 지나는 차에 시선을 꽂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인터뷰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니 4시 반이었다. 저녁을 먹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고, 다시 차를 끌고 강남을 벗어나자니 멈춘 차들 사이에 서 있을 생각에 성가셨다.
“차라도 마시고, 저녁까지 먹은 다음에 좀 늦게 들어가자.”
그때도 막히겠지만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한 소리였다.
둘은 조용한 곳을 찾아 높은 건물 23층에 있는 라운지 카페로 올라갔다. 까마득한 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전경에 감탄할 틈도 없이,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엄마?”
세아와 이준의 부모님이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서로 어찌나 화기애애한지, 자녀로서 부모님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했나 순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케이크 조각이 붙은 빈 접시 두 개를 보다가 이준이 먼저 인사를 챙겼다.
“안녕하세요?”
“오, 여기 웬일이에요? 진짜 우연이네요.”
공인된 ‘세세’ 1기인 이준의 어머니가 수줍어하며 세아에게 말을 붙였다. 같은 집에 사는 동안 세아의 존재에 익숙해졌을 텐데, 여전히 편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잠깐 인터뷰하러 왔어요.”
“이준이네 부모님이 강남은 거의 안 오신다고 해서 같이 왔지. 너희는 너희끼리 가서 놀아.”
세아의 아버지가 그렇게 말해, 세아와 이준은 함께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서울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차를 한 잔씩 시키니,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먼저 말을 시작한 건 이준이었다.
“누나 부모님은 A급 헌터셨는데, 그래도 금방 적응하셨네요. 신기해요.”
많은 헌터가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세아의 부모님은 늘 똑같은 세상에 살았다는 듯 태연해 보였다. 세아는 슬쩍 부모님 쪽을 돌아보았다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헌터로 산 시간이 전체 인생에 비해 너무 짧잖아. 나나 너는 회귀 때문에 몇십 년을 반복해 살았지만, 부모님은 다르겠지. 적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너무 잘 지내고 계셔.”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딸인 세아도 모르는 어려움이 있을지. 그래도 세아는 너무 하나하나 캐묻진 않았다. 부모님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걱정해야 했으니까.
“부모님보다 내가 더 적응 못 하고 있지.”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차들이 줄지어 도로를 가로질렀고, 그 줄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세아 역시 자신의 마음을 잘 알 수 없었다.
“가끔 자다가도 번쩍번쩍 깨어나.”
“좁은 공간에 있는 건 괜찮아요?”
이준이 세아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며 물었다.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닌지라, 세아는 부러 가볍게 답했다.
“예전만큼 심하진 않아. 이렇게 갑자기 나아질 리 없는데, 어쩌면 그런 공포도 시스템 영향이었을 수도 있고…….”
아직 많은 사실이 밝힐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남아 있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유물처럼, 의문과 기억은 서서히 녹슬어 갈 것이다. 그걸 아주 분명히 아는데, 시스템에 종말을 선언한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적응이 어려운 게 우스웠다.
“사실 저도 가끔 그래요.”
이준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특별히 위로하려 들지 않는 그 태도가 세아는 차라리 반가웠다.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꿈도 꾸고요. 솔직히, 전보다 더 쉽게 지치는 몸이나 정신도 낯설어요.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그래도 우리는 나아질 거예요.
그렇게 덧붙이며 이준이 고개를 틀어 세아를 직시했다. 그리 강렬한 눈빛도 아닌데, 세아는 사로잡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가끔 이준과 눈을 맞추면 이런 기묘한 느낌이 든다. 마냥 좋은 것도 마냥 싫은 것도 아닌, 웃음이 날 듯도 울음이 날 듯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