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마침 직원이 차를 가져왔다. 안은 전혀 춥지 않았지만, 세아는 손이 시린 사람처럼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잘 익은 감색 차였다.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시니 몸속까지 따뜻해졌다. 그 온기가 조금 용기를 주었다.
“이준아, 우리 집에 자주 와.”
계속 헌터로 살았다면 이런 말을 할 일도 없었을 터다.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 일도, 다른 이의 온기에 의지해 나아가는 일도 없었겠지. 가볍고 자유로우며 상쾌한 삶이지만 세아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이제는.
“너 자주 보면 좀 더 빨리 좋아질 것 같아.”
이준이 뜨는 해처럼 웃었다. 세아의 마음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밝히면서. 밤이 물러나듯 마음 밑바닥의 불안이 뒷걸음질을 쳤다. 이준이 세아의 손등을 장난스럽게 간지럽히며 물었다.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뭐라는 거야. 혼날래?”
세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혼나기 싫었던 이준은 그녀의 손에 자기 손을 겹치며 대답했다.
“자주 갈게요. 누나 귀찮게 매일 갈 거예요.”
귀찮지 않을 것 같다. 매일 봐도, 매 순간 닿아 있어도.
하지만 그런 말은 너무 낯간지러워서, 세아는 공연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은 아득하게 높았고, 한때 헌터로서 그 하늘을 날기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그뿐이었다.
이제는 이 땅이 더 좋았다. 조금씩 조금씩, 더 단단하게 뿌리내릴 이 땅이.
외전 2. 취중진담
시스템이 사라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세아는 한결 안정되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가는 중, 리웨이 역시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함께 저녁을 먹자며 서울 외곽의 한적한 식당에 모인 날이었다. 세아와 카일리, 이준과 있는 자리에서 리웨이는 지나가는 어조로 그 말을 꺼냈다.
“난 슬슬 집에 가야지. 집 너무 오래 비워서 무너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간다고요?”
깜짝 놀라 되물은 건 카일리 하나였다. 세아와 이준은 돌아가고 싶은 리웨이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카일리는 달랐다. 그녀는 아직 물과 수저밖에 없는 테이블 너머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이렇게 일찍 간다고요?”
“일찍이라니, 거의 한 달 넘게 여기 있었잖아.”
카일리와 리웨이는 시스템이 사라지고 한 달이 지나도록 한국에 머물렀다. 이대로 모두와 헤어지는 게 아쉽기도 했고, 달라진 몸과 생활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던 탓이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바라보는 카일리를 향해, 리웨이가 넌지시 물었다.
“관광도 할 만큼 했고 도시 구경도 이만하면 됐고. 너야말로 미국 안 가?”
“난 좀 더 있다가 갈 생각이었는데…….”
“그럼 좀 더 있다가 가면 되지, 뭐.”
카일리는 대답하지 않고 괜히 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세아가 리웨이를 말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돌렸으나, 세아는 둘의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풍경을 눈에 담으며 침묵했다.
그들이 자리 잡은 식당은 저무는 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독채였다. 한옥을 본 따 지은 건물이라, 예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풍겼다. 한쪽 벽은 그 자체로 문이나 다름없어서, 문을 열면 바깥의 웅장한 산세와 고즈넉한 정경이 성큼 가까워졌다.
보랏빛 하늘 아래 컴컴하게 엎드린 산을 보며 세아는 리웨이가 머물던 신선거를 떠올렸다. 리웨이가 왜 ‘자연인’이 되었는지, 한 번도 물은 적 없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아마 속세에서 행복한 일을 겪어 자연으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거기 생각이 미치니 더 물을 수 없게 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리웨이를 붙들 수도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리라 생각했고…….
“아, 음식 왔다.”
리웨이가 하는 소리에 세아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직원 두 사람이 식기와 차, 밑반찬, 요리를 정갈하게 내려놓는 동안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 규칙적으로 우는 벌레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화려하게 차려진 한상이었다. 정갈한 밑반찬과 윤기가 도는 밥, 작은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는 전골, 막 구운 살치살과 장어구이, 보리굴비까지 한 번에 올랐다.
“자꾸 사람 들어오면 얘기하기 불편하니까 코스로 주지 말라고 했어요. 먹을까요?”
세아의 말을 시작으로 모두 식사를 시작했다.
세아는 카일리가 리웨이의 귀환에 대해 분명 한마디 할 거라고 예상했다. 사실 이준도 리웨이도 마찬가지의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일리가 식사를 하다 말고 불쑥 말을 꺼냈다.
“사실 난 리웨이가 돌아가지 않고 계속 밖에서 지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왜?”
“이젠 밖에 우리도 있고…….”
“뭐야, 전엔 외톨이라 산에 살았다는 거야?”
뜨거운 전골을 제 그릇에 덜던 리웨이가 웃으며 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그냥 이제 우리랑 친해졌으니 같이 지내지 않을까 했다는 거죠.”
“너 그럼 미국 안 가? 여기 계속 있으려고?”
“아, 아예 산에 들어가는 거랑 미국 가는 거랑 같아요?”
“뭐가 달라? 너희가 산에 찾아와도 되고, 나도 종종 만나러 갈게. 그럼 됐어?”
리웨이가 너무 태연하게 답하니 카일리도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뭔가 자신이 미국 도시로 돌아가는 것과 리웨이가 산으로 들어가는 건 느낌이 달랐다. 명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쉬운 것만은 확실했다.
“아, 좀 더 있다가 가요!”
“알았어, 알았어. 누가 당장 간대? 나도 준비 좀 하고 가야지.”
“아직 한국에서 안 한 것도 많잖아요! 한국 술도 안 마셔 봤고!”
카일리가 떼를 쓰듯 뱉은 말에 리웨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간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 기묘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오, 그러네?”
그리하여 테이블에 갑자기 술이 올랐다.
카일리와 리웨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세아를 바라보았다. 세아는 인당 최소 수십만 원을 내고 들어와야 하는 고급 한정식 식당에서 소맥을 말아야 하는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어설프게 잔을 들었다.
“나 잘 못 말아요.”
“오오오, 만대, 만대! 전문 용어야!”
“아, 오버하지 말라고요, 리웨이!”
고급스러운 소곡주도 있고 각 지역에서 직접 공수한 막걸리도 있는데, 왜 하필 소맥인가. 술을 섞어 마시는 편이 아닌 세아는 어설프게 맥주를 따르고 그 위에 소주 한 잔을 부었다. 꿀처럼 금빛을 띠는 술을 보며 카일리와 리웨이가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쳤다.
“벌써 술 마셨어요?”
농담조로 타박한 세아가 잔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준에게도 잔을 주었지만 그는 웃음기 어린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운전해야죠.”
“사람 부르면 되잖아.”
“전 차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거 싫어해서요.”
“저거 네 차 아니고 내 찬데.”
“…그래도 운전해서 누나 데려다줄게요.”
별로 안 마시고 싶은가 보다, 가볍게 넘긴 세아는 잔을 들어 건배했다. 챙,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잔에 가득 든 술이 위태롭게 출렁였다. 카일리와 리웨이는 기분 좋은 얼굴로 원샷했고 세아는 중간에 잔을 내려놓았다.
S급 헌터로 화려하게 살았던 첫 번째 생, 세아는 황금으로 빚었다는 술도 마셔 봤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호화로운 파티에도 여러 번 가 봤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자꾸 반복되니 지겹고 시시했다. 그에 비해 카일리와 리웨이가 던지는 농담은 지루하지가 않았다.
“제가 할게요.”
나직하게 말하며 제 손에서 술병을 부드럽게 앗는 정이준도 웃기긴 마찬가지였다. 소맥이나 칵테일이나 원리는 같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병을 돌리고 잔을 핑그르르 가지고 놀며 묘기를 부리듯 소맥을 마는 게 귀엽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다.
그다지 화려한 기술도 아니었는데, 이준의 손에서 무거운 병이 빙글빙글 돌자 카일리와 리웨이가 환호했다.
“오오오! 뭐야, 바텐더였어?”
“펍에서 일했어요.”
“그럼 우리 칵테일 마시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흥이 오른 목소리로 말하더니 카일리와 리웨이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보다 못한 세아가 안주로 먹을 소고기를 좀 더 주문하며 만류했다.
“천천히 좀 마셔요, 리웨이.”
“야, 내가 세상에 살 땐 이것보다 독한 술도 항아리째 마시던 사람이야! 내가 소싯적에 말이야, 어?”
백 프로 취했군. 안주도 없이 술만 들이부을 때부터 알아봤다. 카일리의 정신이라도 수습하자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갑자기 그녀가 리웨이의 몸을 답삭 끌어안으며 통곡했다.
“가지 마요, 리웨이! 허어어엉, 가지 마! 우리랑 여기서 영원히 살아!”
“으하하하, 얘 취했다, 취했어!”
세아는 조용히 시선을 틀어 이준과 눈을 맞추었다. 이준은 소리 없이 테이블 위의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물론 그런다고 술에 취한 이들이 제정신을 찾는 건 아니었다.
“야, 오늘 먹고 죽어! 술 더 시켜!”
“그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예요? 그만 마셔요!”
세아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웃는 낯을 유지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리웨이는 이준의 손에서 억지로 술병을 빼앗으며 손을 저었다.
“걱정하지 마, 걱정! 나 술버릇 깨끗해.”
그 말대로 리웨이는 지금까지 물컵 한번 엎지 않았다. 심지어 안주 부스러기조차 식탁에 흘리지 않았다. 리웨이의 팔에 치덕치덕 달라붙어 훌쩍이는 카일리에 비하면 정말 깨끗한 술버릇이었다.
“자, 우리 세아, 한잔 받아!”
“…….”
“이준이도! 세아랑 연애하려면 술도 잘 마셔야지! 야, 러브 샷 안 하냐, 러브 샷?”
“아, 무슨 부장님이에요?”
어이가 없어진 세아가 리웨이를 향해 물었으나, 그녀는 옆에 있는 카일리와 함께 낄낄거릴 뿐이었다.
“회사도 얼마 안 다녀 봤을 것처럼 생겨서 무슨 부장님이야. 안 그래, 카일리?”
“맞아요, 그럼 난 사장님이다!”
“하하하하!”
정말 하나도 우습지 않은 농담이었는데 리웨이는 카일리와 함께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취한 사람 둘이 있으니 난장판이었다.
다시는 이 사람들이랑 술 안 마셔. 세아는 리웨이가 따라 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며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