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아, 세아다.”
방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던 카일리가 빙긋 웃으며 감탄하듯 뱉었다. 그녀가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나온 세아는 걱정을 감추며 카일리 옆에 앉았다. 카일리는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다리를 흔들었다.
“여기 좋다. 이게 대청마루야?”
“그럴걸.”
“시원해.”
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하지만 세아의 관심은 하늘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카일리 옆에 술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직원을 불러 여기서 혼자 마신 모양이었다. 그냥 즐길 수 있을 정도로만 마시지, 왜 이렇게…….
그때, 세아의 눈동자에 또 하나의 별이 박혔다.
세아는 너무 당황해서 카일리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얼굴은 텅 빈 밤하늘처럼 쓸쓸하고 고요했다.
“카일리……. 왜 그래?”
리웨이에게 가지 말라고 매달리며 울었을 때와는 느낌이 너무 다르다. 그때는 진심 반 과장 반이었다면 지금은…….
“몰라, 바보야.”
카일리는 조금 훌쩍거리며 대꾸했다. 그러더니 혼자 소주를 따라 마셨다. 단순한 술주정이라고 보기엔 느낌이 이상했다. 세아는 독채 밖으로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 낮은 목소리로 간단한 안주를 부탁했다. 직원이 새 잔도 가져다주기에, 세아는 제 잔도 채웠다.
“천천히 마셔.”
“리웨이는 빨리도 돌아가네.”
“그거 때문에 많이 서운해?”
조심스러운 물음에 카일리는 픽 웃었다. 다시 제 잔을 채우고 세아와 건배한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난 가도 스테파니도 없고, 부모님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리웨이는 쉽게 간다 싶어서. 너 리웨이가 왜 신선거에 혼자 사는지 알아?”
“모르지.”
“나도 몰라.”
뭐지, 이 대화는. 세아는 눈물로 얼룩진 카일리의 뺨을 살짝 쓸어 주었다. 카일리는 지친 별이 의탁할 하늘을 찾듯 고개를 기댔다. 울음을 삼킨 그녀가 이마를 세아의 어깨에 비비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으니까 산으로 들어갔을 거 아니야…….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괜찮아 보여서…….”
“우리도 괜찮아질 거야.”
세아는 제법 자연스럽게 카일리의 머리를 감싸듯 쓰다듬어 주었다. 얼굴을 감춘 카일리가 울음을 억누르느라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평소 리웨이보다 훨씬 더 활발하고 밝은 카일리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스테파니를 잃은 일도 생각보다 일찍 극복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상실에 진정한 극복이 있을 수 있을까.
그저 익숙해지며 사는 게 아닐까.
“나…… 만약에…… 가기 싫으면, 너랑 살아도 돼?”
“응.”
“진짜?”
“그래, 같이 살자. 어차피 집도 넓은데, 뭐.”
카일리는 눈물을 갈무리하듯 작게 훌쩍이더니 고개를 들어 세아를 보았다. 다시 잔을 채운 그녀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고개를 흔들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냐, 정이준이 싫어할 거야. 옆집에 살게.”
“…….”
얘 진짜 보통 취한 게 아니군. 세아는 말없이 잔을 부딪치며 탄식했다.
* * *
세아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리웨이는 술 마시는 걸 멈추고 벽에 기대 늘어져 있었다. 세아는 이준을 향해 나가서 카일리 좀 챙겨서 데려오라고 말한 다음 리웨이 맞은편에 앉았다. 리웨이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세아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여기 맛있다. 막걸리도 다 마셔 봤어.”
“네, 그래 보이네요…….”
리웨이 앞에 막걸리 플래터의 흔적이 보였다. 긴 나무 받침에 작은 잔이 스무 개나 올라가 있는 걸 보니 한 번씩 다 맛본 모양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상은 정말 깨끗했다. 술버릇 깔끔하다는 리웨이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카일리는 잘 달래 주고 왔어?”
리웨이는 느른한 투로 던지듯 물었다. 세아는 약간 놀라서 되물었다.
“알고 있었어요?”
“딱 보면 알지. 너도 눈 풀린 거 보니까 얘기하면서 같이 술 좀 마셨구만.”
“그러는 리웨이는 안 취했네요.”
리웨이가 픽 웃으며 한쪽 무릎을 세워 팔꿈치를 올렸다. 느긋하게 턱을 괸 채 바깥 풍경을 감상하다가 리웨이가 말했다.
“정이준은 또 붙들려서 위로해 주고 있겠네. 이 기회에 둘이 좀 더 친해질 수도 있고.”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생각해 보면 올리버에게 말을 좀 부드럽게 하라고 충고한 사람도, 파티를 꾸려 놓고 남처럼 굴지 말라며 조언한 사람도 리웨이였다. 그녀는 쉽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았고 먼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 관계를 조망했다. 산에 혼자 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세아는 궁금했다.
그러나 돌아온 리웨이의 대답은 생각보다 시시했다.
“너도 나이 먹어 봐. 그리고 너도 많이 나아졌어. 처음엔 진짜 이상한 애인 줄 알았다니까.”
“그래요?”
세아가 픽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때는 회귀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어서 다른 곳에 마음을 기울일 틈이 없었다. 모든 일이 정리되고 평범한 삶을 누리는 지금은 한결 여유롭지만.
곧 떠난다고 생각하니 말이 많아지는지, 리웨이가 가볍게 덧붙였다.
“정이준이랑도 잘 지내.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거지만 너희는 왠지 오랠 사귈 것 같아.”
“카일리는 벌써 우리가 결혼한 것처럼 얘기하던데요.”
“걔가 원래 좀 앞서가잖아. 그래도 좋은 애야. 그렇게 가지 말라고 하면서도, 나한테 왜 그렇게 산으로 돌아가려 하냐고 물어보진 않잖아.”
세아도 굳이 이유나 사연을 묻지 않았다. 리웨이의 성격상, 말하고 싶었다면 진작 이야기해줬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선뜻 꺼내놓을 수 없는 개인사가 있는 법이다.
리웨이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앞에 앉은 세아를, 멀지 않은 곳에서 카일리를 달래고 있을 이준을 생각했다.
그녀도 한때 결혼을 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상하고 한결같은 남자와.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졸린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면서도 리웨이의 발과 종아리를 꾹꾹 눌러 마사지해 주었다. 하지의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아침마다 피로해 하는 그녀를 위한 습관이었다.
더없이 소박하고 소소하게, 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결혼 10년을 기념하여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외국으로 떠났는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남편은 거기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 후 다시 3년, 남편은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리웨이 곁을 떠났다. 흔해 빠진 이야기다.
리웨이는 한동안 재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며 위로를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질없이 애쓰던 그녀는 어느 날 돌연 모든 짐을 정리하고 산에 파묻혔다. 이제 여기가 내 무덤이야, 나는 여기서 죽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만난 세아와 카일리, 정이준, 그리고 새로운 세상. 그곳은 무덤이 아니었다.
“세아야.”
리웨이는 부러 다정스레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종종 보러 올게.”
사실, 친구든 연인이든 언제 헤어지게 될지 모르니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구구절절 제 사연을 떠든 후 거창한 교훈처럼 그런 말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그건 너무 나이 든 사람 같잖아, 리웨이는 가볍게 생각하며 덧붙였다.
“죽기 전까지 행복하게 살자.”
결국 인생은 그것뿐이야, 그렇게 덧붙인 후 리웨이는 머쓱해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방금 너무 노인네 같았어. 세아가 비웃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얌전한 대답을 돌려 줄 뿐이었다.
“네, 리웨이.”
“어휴, 내가 말이 많다. 취했나 봐.”
“이제 그만 마셔요.”
리웨이는 세아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나중에 놀러 오면 내가 담근 술도 맛보게 해 줄게.”
혼자 산에 살면서 술도 담가 마시다니, 음주를 그리 즐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참 여러모로 정성스러운 사람이다. 세아는 꼭 가서 마시겠다고 약속했다.
* * *
카일리와 이야기하며 몇 잔, 리웨이와도 몇 잔, 그렇게 술을 마시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세아는 조수석에 몸을 푹 묻으며 긴 숨을 토했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서 쌀쌀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반가웠다.
카일리와 리웨이는 따로 이야기를 더 하다 간다며 사라지고, 이준만 곁에 남아 시동을 걸었다. 세아는 덤덤하게 기어를 조정하고 핸들을 돌리고 엑셀을 밟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 불쑥 물었다.
“카일리랑 얘기 좀 했어? 가서 오래 안 오더니.”
“할 말이 많은 것 같아서 그냥 듣기만 했어요. 어차피 얘기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을 테니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깊은 숲의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온했다. 차창 밖으로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고, 몽롱한 머리는 지나간 곳과 새로 나타난 곳을 분간하지 못했다.
“술 취한 거 오랜만이야.”
“각성하면 술에도 잘 취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각성자가 약에 손을 댔다. 어지간히 독한 술을 마셔야 취기를 느낄 수 있으니, 차라리 약이 깔끔하고 편하다는 이유였다. 약에 호기심조차 느낀 적 없는 세아가 보기엔 다 이상한 놈들이었다.
“넌 약 한 적 있어?”
“약이요? 설마.”
이준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하하 웃으며 부드럽게 핸들을 꺾었다. 창문에 가로등 불빛이 맺혀 반짝거렸다. 그 불빛이 이준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빛과 어둠이 섞여 얼룩덜룩한 옆얼굴을 보고 있으니 세아는 괜히 웃음이 났다.
아, 나 정말 취했나 봐.
“그래? 착하다.”
“뭐예요.”
그리 재밌는 말도 아닌데 이준의 목소리에 또 웃음기가 스몄다. 술 한 잔도 안 마셨으면서 그저 세아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다 재밌는 모양이었다. 왠지 오기가 난 세아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이준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뭐야, 왜 웃어?”
“좋아서요.”
“그렇지? 착해.”
이준은 잠시 고개를 돌려 세아를 보았는데, 어딘지 웃음을 꾹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그 묘한 기색을 알아차렸겠지만 세아의 생각은 그만큼 활발히 움직이진 않았다. 자신이 앞뒤 안 맞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회귀한 세월까지 생각하면 몇십 년 만의 취기다. 기분 좋은 몽롱함과 가벼운 탈력감이 몸을 감싸니 말도 술술 나왔다.
“내가 너 예쁘다고 얘기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