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111화 (111/112)

111화.

“네.”

대답 참 담백하다. 세아는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동작이 커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세아는 다시 말했다.

“너 진짜 예뻐.”

“네, 누나.”

“예쁘고 착해.”

“좋아한다는 뜻이죠?”

이준의 촘촘한 속눈썹에 아롱아롱 맺힌 불빛을 보며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밖을 살폈는데 풍경이 익숙했다. 집 근처에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냐고 그에게 묻기 위해 세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 예쁘다고 얘기했어?”

이준은 진짜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술버릇이 뭔지 궁금하긴 했지만 왠지 세아는 술에 취해도 우아하게 앉아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은 얘기를 몇 번 듣는지 모르겠다. 그마저도 성가시거나 난처하지 않았다.

차가 부드럽게 마당으로 진입하는 걸 보며 세아가 다시 물었다.

“착하다고도 얘기했어?”

했어요, 고마워요. 그렇게 답하며 이준이 느긋하게 후진했다. 혼자 쓰는 공간인 데다 무척 넓기도 해서 주차 라인 같은 건 따로 없었지만, 차는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움직였다. 기어를 바꾸는 그를 보며 세아는 다시 물었다.

“진짜 얘기했어?”

“네.”

“근데 넌 왜 얘기 안 했어?”

시동을 끄기 위해 몸을 살짝 기울이던 이준이 문득 손을 멈추었다. 그는 침착하게 시동을 끈 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누나도 예쁘고 착해요.”

세아가 슬쩍 인상을 썼다. 부러 세아가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왜 저러지. 세아가 직접 표현한 적은 없지만 이준은 그녀의 호오를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눈매까지 함께 휘며 애교스럽게 웃으면 세아는 여지없이 흔들리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거 말고.”

“말고요?”

“네 히든 퀘스트 얘기 왜 안 했냐고.”

차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훅 들어왔다. 이제껏 세아는 그의 비밀을 한 번도 추궁한 적 없었다. 모든 일이 다 끝난 지금 이런 물음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이준은 미모로 승부했다.

“착해서요.”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가볍게 촉, 하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입술을 거의 붙인 채로 속삭였다. 세아가 제 움직임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그래서 마음까지 조금 간지럽도록.

“착해서 그랬어요, 세아 누나.”

순한 강아지인 척 올려다보니 뜻밖에도 세아는 웃고 있었다. 딱히 이해하거나 용서해서 웃는 것 같진 않았다. 이준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시켜 주듯 세아가 그에게 키스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거짓말쟁이.”

그래도 오늘 당장 혼낼 생각은 아닌가 봐, 이준은 아이처럼 안도하며 키스를 받아들였다.

어쩌면 세아는 오늘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를 향해 착하고 예쁘다고 거듭 고백하던 세아를 이준만은 기억할 것이다. 남몰래 받은 선물처럼, 빛바래도록 소중히.

외전 3. 평범한 데이트

[SS 커플, 이세아♥정이준 열애 인정]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뜬 기사를 보고 리웨이가 픽 웃었다.

“시스템 없어진 게 언젠데 아직도 SS 커플 타령이야?”

리웨이와 옆에 앉은 카일리가 고개를 빼 핸드폰을 넘겨다보았다. 두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고층 카페의 레이지 소파에 앉아 쉬는 중이었다.

“기사 났어요?”

“응. 이거 봐. ‘SS 커플 이세아와 정이준이 열애를 인정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호화 데이트를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이 포착되면서…….’ 호화 데이트?”

“확실히 호화 데이트긴 하겠죠.”

카일리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돈이라면 그녀도 둘 못지않게 많으니, 특별히 얼마나 대단한 일을 즐길까 궁금하진 않았다. 그래도 세아와 이준의 일이니 관심이 가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웨이는 핸드폰 화면을 쭉쭉 내리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 얘네 그냥 영화관 간 것 같은데.”

“영화관을 빌린 게 아니고요?”

리웨이가 보라는 듯 핸드폰을 카일리 쪽으로 기울여 주었다. 카일리는 액정 속에서 사람이 바글거리는 영화관으로 들어서는 세아와 이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세아의 뒷모습은 어쩐지 편안해 보였다.

“둘이 손잡고 갔네.”

리웨이가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사진 속 두 사람은 다정스럽게 손을 맞잡고 있었다. 둘이 사귀는 건 알았지만, ‘그’ 세아가 이준과 손을 잡다니. 솔직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화면을 더 아래로 내리니 댓글창이 보였다. 과연 세아의 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솔직히 S급 아니었으면 인정 못 했을 듯ㅋㅋㅋㅋ]

[시스템 없는데 이제 S급 뭔 상관임?]

[세아 언니 취향인가봄ㅋㅋㅋ 예전에 인터뷰에서 잠깐 말하지 않았나 아마 요리도 잘할듯]

[언니 행쇼하세요...]

[세세 왜 여기서 정모중이냐]

함께 댓글을 보던 리웨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아주 주접이야, 주접.”

“아직도 관심 많네요. 팬클럽도 여전하고.”

“당장은 안 없어질 모양이던데. 시간이 좀 더 지나야겠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한국의 동해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멀리서 방파제를 가득 실은 바지선이 수면을 가르며 미끄러져 갔다. 카일리와 리웨이는 다시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 * *

대중은 이세아와 정이준이 대단한 갑부인 만큼 초호화 데이트를 즐기리라 예상했지만, 둘은 ‘평범한 데이트’를 더 자주 했다.

당연한 일이다. 매일같이 지중해에 요트를 띄우거나 ‘세계 12대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세아가 사람 많은 관광지를 싫어했다.

그리하여 오늘, 두 사람의 선택은 영화관이었다. 공기가 조금 텁텁하고, 들어가자마자 달콤한 팝콘과 버터 오징어 냄새가 나는 평범한 곳이었다.

프리미엄석, 골드 좌석, 다이아 고객석, VVIP석 등 오만가지 특별석이 있었지만 세아와 이준은 일반관의 일반 좌석에서 영화를 볼 예정이었다. 세아가 포스터를 하나씩 살펴보는 동안, 이준이 팝콘과 콜라를 샀다. 다가오는 그를 발견한 세아가 포스터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엄청 슬픈 영화래.”

이준은 포스터 하단에 큼지막하게 박힌 제목을 보았다. ‘유채꽃 엄마.’ 영화 전반 30분은 웃게 해 주고 후반 1시간은 펑펑 울리는 영화인가 보네. 이준은 조금 심드렁했지만, 표를 내는 대신 홍보 문구를 읽었다.

“엄마의 항암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날, 우리는 함께 떠났다. 거기서 마주한, 어린 날의 내 엄마. 세 사람의 동화 같은 동행……. 재밌겠네요.”

“뻔해 보이지 않아?”

세아는 포스터를 내려놓으며 팝콘을 집어 먹었다. 다른 걸 예매하려나 했는데 세아는 뜻밖에도 방금 고른 제주도 여행 영화를 보겠다고 했다. 모녀 사이의 이야기가 보고 싶은 건지, ‘동화 같은 동행’에 마음이 끌린 건지, 아니면 그저 변덕인지, 이준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둘은 어둑한 상영관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지러운 광고가 수없이 지나가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투병 중인 엄마와 오랜 병간호에 지친 딸 이야기는 몹시 진부했지만 장르의 역할에 충실했다. 관객의 반 이상이 결국에는 눈물을 흘렸다. 이준 옆에 앉아 신파 냄새가 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한숨을 쉬며 팔짱을 바꿔 끼던 남자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을 긁는 척 뺨을 닦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상영관이 밝아졌다. 세아도 이준도 조금도 울지 않았다. 이준은 덤덤하다 못해 건조한 세아의 얼굴을 넘겨다보다 함께 일어섰다. 그러면서 낮은 소리로 물었다.

“누나 취향이었어요?”

“아니. 이런 영화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왜 보자고 했어요?”

“너 우는 거 보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대답한 세아가 이준의 얼굴을 샅샅이 훑듯 살폈다. 그러더니 조금 실망한 투로 중얼거렸다.

“전혀 안 울었네.”

“원래 잘 우는 편 아니에요. 누나한테만 그런 거지.”

그렇게 자주 울었나 싶어 조금 부끄러워진 이준이 성급하게 말을 돌렸다.

“누나도 진짜 이런 거 감흥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한 이준이 남은 팝콘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밝은 데로 나오니 둘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달라붙는 시선을 떨치듯 걸음을 빨리하며 이준이 놀리듯 입을 열었다.

“왠지 누난 이런 영화 보고 한 번도 울어 본 적 없을 것 같았거든요.”

세아는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면서 자신만 냉혈한으로 몰아가는 장난이 우스웠다. 그래서 그녀도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나도 원래 이렇진 않았어. 자꾸 회귀하다 보니 점점 더 이렇게 된 거지. 누구 때문일까, 이준아?”

순간 이준의 안색이 변했다. 세아의 말에 어찌나 동요했는지, 따라 걷던 움직임이 뚝 멎을 정도였다. 세아의 시선을 받아 내는 얼굴에서 아까의 장난기가 깨끗하게 지워졌다. 따라오지 않는 그가 의아해 몸을 트니, 이준이 급히 세아 옆으로 발을 옮기며 나직하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준의 속삭임은 영화 내용에 대해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세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걸어 나가며 조금 크게 되물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죄송해요, 누나.”

이번에는 제대로 들었다. 좁은 상영관 통로를 빠져나와 매표소가 있는 장소로 돌아오니 공간이 확 넓어졌다.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선 이준은 길 잃은 어린애처럼 처량했다. 또 저런 표정이다. 연약하고 아름다운 슬픔이 깃든 눈을 들여다보다 세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왜 사과해. 네 잘못 아닌 거 알잖아?”

“그래도요.”

이준은 어리광을 부리듯 세아의 손가락을 살짝 잡더니 다른 말 없이 반복했다.

“그래도.”

세아는 잠시 서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정리된 눈썹과 꾹 다문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 봐도 이준의 서글픔은 별처럼 빛난다. 이준은 알까, 세아가 그 일렁이는 애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 말 한마디에 기가 죽어 있으니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세아는 일부러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됐어, 커피나 마시자.”

그저 평범하게 영화를 보고 대화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야기가 길어질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준은 재빨리 세아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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