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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의 히든 퀘스트-112화 (완결) (112/112)

112화.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영화관과 조금 떨어진 카페로 이동했다. 서울 한복판인 만큼 근사한 풍경은 없었지만, 바쁘게 오가는 자동차와 행인을 관찰하는 것도 괜찮았다. 높은 층에 있는 카페여서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직원은 두 사람의 테이블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차가운 허브티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세아와 아직 음료에 손을 대지 않은 이준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런 분위기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닌데.’

세아는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준이 놀리기에 그냥 조금 심술을 부렸을 뿐이다. 이준이 자신을 여러 차례 배반하고 죽인 건 시스템 때문임이 드러났으니, 그도 그냥 웃으며 받아치리라 예상했는데.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그의 마음에 여전히 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세아는 차가운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부러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난 네가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다 이해했죠.”

“근데 왜 그래?”

이준은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목마른 사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는 모습을 보다 세아는 답을 재촉했다.

“응? 왜 그러냐고. 그냥 농담한 거야. 너도 잊어버려.”

“그냥…… 그게 쉽지 않아요.”

자기 의지로 세아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는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그 반가움은 몬스터에게 무자비하게 잡아먹히던 세아의 모습을 지워 주지 못했다.

솔직히 이준은 헷갈렸다. 그건 정말 불가항력의 프로그램이었을까. 저항할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세아를 몇 번이라도 덜 죽일 수는 없었을까. 그녀는 머리가 으깨져 죽었는데. 심지어 이후에는 이준을 위해 압사의 고통을 당하기도 했고…….

“누나는 나를 용서해 줬지만, 그건 누나가 강한 사람이라 그런 것뿐이잖아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세아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준이 강한 사람 운운하는 게 이젠 좀 재미있었다. 강해서 용서했다니, 무슨 소린가. 세아는 김현호를 용서하지 않았다. 복수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진 않았지만, 전처럼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날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정말 강하다면 김현호도 용서해 주었으리라. 시스템 속에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자신을 포함한 모든 헌터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적어도 이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정이준을 받아들인 건, 강해서가 아니라…….

세아는 괜히 차를 몇 모금 더 마셨다. 아직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낯설고 어색했다. 그래서 부러 말을 돌렸다.

“그래서 내내 나한테 미안했어?”

이준이 인형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빽빽한 속눈썹에 햇빛이 비쳤다. 아래서는 여전히 차가 어지럽게 지나다녔다.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세아는 그의 마음 역시 소란하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넌 날 위해서 죽으려고도 했잖아. 그럼 됐지.”

심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부러 칭찬하듯 부드럽게 말했는데 이준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떠올랐다.

“결국 안 죽었잖아요.”

“뭐야, 죽고 싶기라도 했단 거야?”

의아한 듯 묻는 세아 앞에서 이준은 선뜻 대답을 낼 수가 없었다.

세아와 살고 싶었다. 새로운 생에서는 인연도 없던 혜진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간절하게. 나중에 세아로부터 시스템이 혜진의 몸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하긴 했지만, 이준은 그만큼 절박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준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자신의 히든 퀘스트를 알리지 않고 죽으면, 의도치 않게 자신을 죽여 버린 세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많이 슬퍼할까. 살다가 문득문득 자신을 떠올릴까. 잘 차려진 한 상을 보고, 어떤 펍의 유행 지난 인테리어를 보고, 거리를 걷는 이준 또래의 남자를 보고…….

아마 그렇다면 죽어서도 황홀하겠지. 세아는 자신을 애도하며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막연히 슬플지도, 어쩌면 후련할지도. 그러나 아마 자신을 잊지는 못하리라. 절대로.

잠시 그런 영원한 꿈을 꾸기도 했다.

이런 마음을 세아 앞에 고백할 수는 없었다. 세아는 이해하지 못할 테고, 징그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준도 자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가난한 청년으로, 또 화려한 헌터로, 수수께끼를 푸는 고행자로, 너무 다른 삶을 여러 번 살다 보니 머리가 이상해진 것일까.

그래도 세아에게는 멀쩡하게 보이고 싶었다. 세아가 애틋하게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에 흔들렸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그저 애련한 것과 정말 고장난 건 완전히 다르니까.

세아는 이준의 마음 어느 구석을 읽었다. 어쩌면 이준은 세아 인생의 유일무이한 비극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희미한 느낌에 불과했지만 세아는 어쩐지 이게 착각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준아.”

그리고 이준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는 이준의 온전함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잔잔하게, 그러나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그에게 흠뻑 젖을 뿐.

사랑은 가끔 축축한 옷가지 같았는데, 걸치고 있으면 묵직하고 찜찜했지만 그만한 자유를 주었다. 이미 옷을 다 적신 사람은 물에 뛰어들기를 두려워하지 않듯, 이제 세아도 이 마음이 무섭지 않아 첨벙거리며 종일 놀기도 했다.

“내가 널 받아들인 건 강해서가 아니고, 그냥 내가…….”

자연스럽게 말하려 했는데, 그렇게 달래 주려 했는데, 갑자기 혀가 엉키고 두 뺨이 화끈거렸다. 세아는 괜히 테이블의 티끌을 쓰는 척하며 말을 미루었다.

그러다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신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약해지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아의 입에서 저절로 말이 튀어 나갔다.

“그냥 내가 널 좋아해서야.”

마치 호수 가운데 떨어진 돌조각처럼 그 말은 이준의 얼굴에 파문을 일으켰다.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호수 가장자리로 번져 가듯, 이준은 아주 느리게 웃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 해바라기가 노란 꽃잎을 펼치는 속도가 이와 같을까.

세아는 그의 얼굴에서 만개하는 기쁨을 보며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떨었다. 이 떨림도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곧 이준이 세아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속삭였다.

“누나는 멋있는 말만 해요. 진짜 시인 같아요.”

“뭐?”

태어나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얘도 정말 정상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생소한 칭찬에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세아는 부러 잡힌 손을 슥 빼며 고개를 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기껏 달래 줬더니.”

“그러니까 시인 같다고요. 누나, 꼭 시 써요.”

이세아가 시라니, 늘 침착한 혜진이라도 그 말을 들으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이준은 세아가 쑥스러워하는 걸 알아차리고 말갛게 미소 지었다. 아까의 심각한 태도는 사라지고, 그의 눈가에 즐거움이 노란 산수유처럼 번져 있었다.

“좋잖아요. 내가 너를 받아들인 것은, 내가 강해서가 아니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제목은 내 이름으로 해 주세요.”

세아는 그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지만 이준은 진심이었다. 가끔 세아는 가녀린 문학소녀 같았다. 다른 파티원이 들으면 미쳤냐고 하겠지만, 이준이 보기에 그런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세아는 이준의 갸륵한 콩깍지에 공감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당혹을 거두고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너 나 놀리는 거 재밌지? 봐주니까 아주 재밌어 죽겠지?”

“놀리는 거 아닌데…….”

“그럼 이제 네가 대답해 봐. 너 왜 카일리랑 리웨이한테만 히든 퀘스트 얘기했어?”

민감한 화제가 다시 떠오르자 이준이 합, 입을 다물었다. 이준은 살벌한 웃음을 거두지 않는 세아를 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반쯤 예상했다.

“내가 못 미더웠던 모양이지, 안 그래?”

“아니…… 아니요…….”

장난기 가신 얼굴로 중얼거린 이준이 다시 합,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아까처럼 기가 죽은 얼굴로 눈치를 봤다. 귀를 늘어뜨린 채 곤란한 듯 눈을 굴리는 강아지 같았다.

솔직히 그가 다른 파티원에게 히든 퀘스트를 말한 이유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대충 짐작이 가기도 했고, 카일리와 리웨이에게 몇 마디 들은 것도 있고.

그러면서도 민감한 곳을 쑤셔 이준의 입을 닫으니 좀 시원했다. 그러니까 왜 자꾸 놀려. 세아는 일부러 코웃음을 치며 남은 차를 마구 들이켰다. 시인이라니, 카일리나 리웨이가 들었다간 평생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옆에서 끙끙대던 이준은 세아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살짝 그녀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히든 퀘스트니 죄책감이니, 무척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다 깨져 마무리 짓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세아는 툭 내뱉었다.

“봐줄 테니까 시 써 와, 이준아.”

“시…… 시요?”

방금까지 시인, 시인 노래를 부르던 이준이 ‘시’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되물었다. 얼떨떨한 표정이 마음에 들어 세아는 친절하게 웃어 주었다.

“응. 시. 제목은 ‘이세아’로 해. 알겠어?”

다시는 놀릴 생각도 못 하게 해 주지. 그렇게 생각하며 세아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날의 데이트는 그걸로 끝이었다.

* * *

며칠 후 이준은 정말 ‘이세아’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 왔는데, 부끄러워 숨어 버릴 듯한 얼굴로 종이를 내밀었다. 성실하게도 손으로 한 줄 한 줄 적어 왔다.

[이세아

이: 이렇게 좋은

세: 세아 누나

아: 아이 예뻐]

“…….”

이게 뭐야?

솔직히 기대하며 받아 들었는데 마지막 문장을 읽으니 김이 팍 샜다. 이준은 쩔쩔매며 못 한다고 했잖아요, 하고 소심하게 항변했다. 세아는 종이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체념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래……. 너도 시인은 아니구나.”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그들은 그렇게 지냈다. 시시한 영화를 보고 맥 빠지는 삼행시를 짓고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적당히 진부하고 적당히 유치하게.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랑처럼.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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