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경 제8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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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이 벗겨진 낡은 멕 나이트(Mech Knight. 탑승형 전투 골렘) 세 대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어두컴컴한 숲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이 땅에 뿌리박고 자란 원시 상태의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높이 7미터가 넘는 멕 나이트들이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쿵! 쿵!
강철 거인들은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무게가 있다 보니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은은하게 울렸다.
[제프, 끝나고 뭐 할 거야?]
[한잔 빨아야지. 어제 황금 마차에 괜찮은 애가 새로 왔다더라고.]
[황금 마차까지 올 정도면 단물 다 빠진 애들 아니야? 차라리 들장미로 가자. 내가 한턱낼게.]
[라돔까지 나가자고? 거기까지 갔다가 언제 와? 이번 달에만 지각 벌금으로 나간 게 얼만데······.]
[에이! 벌금 갖고 또 그런다. 내일 새벽에 일찍 출발하면 되잖아. 내가 깨워 줄게. 어때, 루산? 생각 있으면 같이 가자고. 1차는 내가 사고 2차는 각자. 어때?]
[난 됐어요, 하겐.]
루산 보름스는 픽 웃으며 시답잖은 소리로 고가의 마나 통신기를 낭비적으로 사용하는 멕 나이트 파일럿 동료들의 이야기를 가볍게 받아넘겼다.
[아니, 칼을 칼집에만 넣어 두면 쓰나? 가끔씩 뽑아서 정성스럽게 닦아 줘야 녹이 안 슬지. 내가 한창 때는 하루에 열두 번도······.]
그러나 하겐은 자신의 남성다움을 끝까지 자랑하지 못했다.
숲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바실리스크 한 마리가 그의 멕 나이트를 덮친 것이다.
[헙!]
멕 나이트는 얼른 그쪽으로 몸을 돌리고 방패를 들어 올려 막았으나 바실리스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쿵 넘어갔다.
부엽토의 썩다 만 낙엽들이 풀썩 튀어 올라 흩날렸다.
다행히 멕 나이트는 넘어지면서도 방패로 바실리스크의 입을 막아 머리와 팔을 곧바로 물어뜯기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거대 괴수는 방패를 치우기 위해 그것을 물고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녀석의 이빨에서 흘러내린 끈적끈적한 침이 멕의 방패와 몸통에 닿자 금속이 흰 연기를 뿜으며 녹아내렸다.
[조금만 버텨!]
제프가 소리치며 멕 나이트 전용 대검을 높이 쳐들고 바실리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바실리스크는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두툼한 꼬리로 제프의 멕 나이트를 강하게 후려쳐 날려 버렸다.
그 사이 반대쪽에서 루산의 멕 나이트가 달려와 노란 빛이 일렁이는 멕 전용 대검으로 돌처럼 단단한 바실리스크의 두꺼운 피부를 뚫고 목덜미를 힘차게 찔렀다.
꾸어억!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정확히 급소를 찔린 바실리스크가 몸부림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산의 멕 나이트는 그대로 대검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쑤우욱!
대검이 손잡이만 남기고 목덜미에서 심장까지 들어갔다.
거대한 괴수의 격렬한 몸부림이 멕 안에 타고 있는 루산의 몸에 짜릿하게 전해졌다.
꾸에엑!
바실리스크가 훌떡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원시의 땅과 나무들이 마구 흔들렸다.
루산의 멕 나이트는 대검 손잡이를 놓고 바실리스크의 목을 눌렀다.
튕겨져 날아간 제프의 멕 나이트도 달려와 거대 괴수의 가슴을 눌렀다.
공격을 받고 바닥에 깔렸던 하겐의 멕 나이트가 몸을 일으켜 합세해 괴수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배를 꽉 눌렀다.
그제야 하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유! 뒈질 뻔했네. 조금만 늦었으면 조종실까지 녹았을 거야. 젠장! 수리비 겁나 깨진다고 한 소리 듣겠어.]
바실리스크의 침 때문에 그가 타고 있는 멕 나이트 가슴 부분이 흉하게 녹아 내렸던 것이다.
[안 죽고 살았으면 됐지. 횡재했잖아. 이렇게 온전하게 잡은 게 얼마만이야?]
[크크크, 그건 그래. 그것도 바실리스크를 말이야. 이 힘 좀 봐. 아직도 꿈틀거려.]
하겐과 제프가 죽을 뻔한 위기와 갑작스러운 횡재로 널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노닥거리고 있을 때 루산은 얼른 마나 통신기로 기지를 호출했다.
[루산이야. 델타 기지 나와라.]
[여기는 델타 기지. 말하라, 루산.]
[바실리스크를 잡았어. 성체 직전 단계의 힘 좋은 녀석이야. 거의 훼손 없이 잡아서 건질 게 많겠어. 전진 기지에서 다 처리하기 어려울 테니까 본부에 지원을 요청해.]
[알았다. 곧바로 정찰 팀과 수거 팀을 파견하고 군단 본부에 지원 요청 하겠다. 그런데 루산.]
[왜?]
[한턱 쏴!]
[훗! 맥주 한 잔씩 돌리지.]
[뭐라고? 겨우 맥주 한 잔? 그 돈 다 벌어서 뭐 할래?]
[돈이 없지 쓸 데가 없을까?]
[쳇! 알았다. 어쨌든 조심해.]
기지와 교신을 마친 뒤에도 원시의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듯 한참 동안 꿈틀거리던 바실리스크는 델타 기지 지원 팀이 도착할 때쯤에야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멕 나이트와 정찰 요원들이 주변을 정찰하고 경계하는 동안 멕 나이트보다 작은 멕 워커(Meck Worker. 탑승형 일꾼 골렘)와 수거 요원들이 바실리스크 사체에 달라붙어 마나 진동 단검과 각종 장비를 이용해 껍질을 벗기고, 독액과 혈액을 모으고, 이빨과 발톱을 뽑고, 몸통을 절단하고, 뼈와 힘줄을 분리하고, 필요한 내장 부위를 용기에 담고, 생명 구슬을 채취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한참 후에 군단 본부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도착해 바실리스크를 해체하고 부산물을 수거하는 작업에 합세했다.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작업을 마친 변경 군단 요원들은 멕 나이트와 정찰 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엄청난 양의 부산물을 가지고 돌아갔다.
잠시 후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두 털리고 흉물스럽게 남아 있던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잔해로 원시림에 살고 있는 벌레, 동물, 괴수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어 인간이 못다 해낸 분해 작업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
필센 제국 변경 제8구역 전진 기지 델타.
이곳이 바로 루산 보름스가 지난 4년을 보낸 집이자 일터였다.
“다들 같이한 건데 무슨 내 덕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노땅들끼리 놀아요. 아함~ 성장기 청년은 잠이 부족하니까.”
루산은, 자네의 깔끔한 솜씨 덕에 많은 성과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며 오늘 밤을 화끈하게 책임지겠다는 하겐과 제프의 끈질긴 권유를 뿌리치고 델타 기지 안에 있는 멕 나이트 파일럿 숙소로 돌아왔다.
그가 처음부터 이곳의 동료들과 이렇게 수더분하고 털털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비록 변경으로 추락한 삶이지만,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질 낮은 자들을 멀리하고 어릴 때부터 배운 대로 품위를 지키며 살려고 했다. 기여도에 따라 자신의 몫을 공정하게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돌아온 것은 따돌림 그리고 죽음의 위기뿐이었다.
이 땅은 동료가 등을 지켜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다.
루산은 살아남기 위해 변해 왔다.
그러나 가슴 저 밑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는 ‘귀족 근성’은 버리지 못했다.
명예를 소중히 하고 품위를 지키며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
다른 말로, 자존심.
“쳇!”
여전히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을 가끔은 경멸하기도 했지만,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것이 없으면 루산 보름스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셨어요?”
숙소에서 클라크가 예의 바른 태도로 루산을 반겨 주었다.
클라크는 숙소를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며 잔심부름을 하는 소년이었다.
말하자면 사환, 집사, 요리사, 종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멕 나이트 파일럿 정도 되면 여러 사람을 고용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입을 올리지만, 루산은 숙소에 소년 하나만 두었다.
그 대신 꼼꼼하게 골라 가르쳤다.
속이지 않고 뒤에서 흉보지 않고 주눅 들지 않아야 하고, 스스로 할 일을 찾고 고용주의 기분을 헤아리고 고용주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며, 가끔은 친구처럼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귀족가의 집사를 고용할 수 없다면 그런 사람으로 키우려 한 것이다.
루산은 처음 1년 동안 많은 개척촌 소년들을 갈아치웠다.
그러다 만난 것이 바로 개척촌 6남매 집의 장남 클라크였다.
우직하지만 똑똑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아이.
“오늘 커다란 괴수를 잡으셨다면서요?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괜찮아. 별일 없었어?”
“다른 일은 없었고요, 기사님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왔어요.”
클라크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편지를 가져왔다.
“바덴 고슬라?”
루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는 곧바로 종이칼로 봉투를 자르고 편지를 꺼내 읽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던 루산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