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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3화 (3/450)

3. 축하합니다

3. 축하합니다

2등석 장거리 열차 여행은 무척 고단했다.

젊고 강인한 육체를 지닌 멕 나이트 파일럿조차 퍼지게 만들 정도였다.

루산은 언제 어디서나 품위를 잃지 않으려 해 왔지만, 사흘을 열차에서 보내자 옷은 구겨지고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수염은 삐죽삐죽 볼품없었다.

그래도 언제나 자기애와 자신감이 충만한 그는 차창에 비친 얼굴이 마치 세상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고독한 음유시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루산이 이렇게 힘들 정도니 어린 클라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변하든 말든 입을 헤 벌리고 곤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침대칸 가격이 얼마였지?”

괜히 미안한 마음에 루산은 타지도 않을 침대칸을 입에 올렸다.

어느 순간 창밖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산과 들 대신 집들이 대지를 가득 메웠고 간간이 높은 건물들이 솟아 있었다.

변방 제8구역의 중심 도시 라돔에서 출발한 마나 열차가 사흘 만에 필센 제국의 수도 노바에 도착한 것이다.

라돔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고층 건물들과 엄청난 인파에 넋이 나간 클라크는 한참 후에야 제국 수도를 본 첫 소감을 말했다.

“땅이··· 안 보여요!”

맨땅, 흙이 보이지 않는 것이 개척촌 출신 클라크에게는 가장 큰 충격이었다.

라돔만 해도 포장이 덜 된 길이 많고 개발이 안 된 땅이 많아 어디를 가도 먼지가 풀풀 날렸던 것이다.

“여기라고 다 그런 건 아니야. 가자.”

루산은 인파에 밀려 클라크를 놓칠까 봐 그의 손을 잡고 이동해 마차를 잡아탔다.

“법원 쪽으로 갑시다.”

“법원 쪽 어디로 갈깝쇼?”

“여기······.”

루산은 편지 봉투를 내밀어 주소를 보여 주었다.

“아! 알겠습니다. 출발할깝쇼?”

“음!”

마차가 움직였다.

도로는 마차들로 가득했다.

끄는 말이 없는데도 굴러가는 이상한 차들도 간간이 보였다.

클라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흘 만에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구경하는 동안 마차는 법원 맞은편, 변호사 사무실이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루산과 클라크는 변호사 바덴 고슬라의 사무실을 찾아3층으로 올라갔다.

노바의 임대료가 비싼 탓인지 사무실은 크지 않았다.

딸랑딸랑~

서류가 잔뜩 쌓여 있는 방에 단정한 차림의 젊은 여성이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작은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게··· 변호사 바덴 고슬라 씨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바덴 고슬라입니다.”

“······!”

놀라는 표정을 보고도 바덴은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다들 처음에는 그런 표정을 지으시죠. 이 세상에 여자 변호사가 흔하지는 않으니까요. 앉으세요.”

“아! 네.”

초면에 실례를 범했다고 느낀 루산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바덴이 권하는 의자에 곧바로 앉았다. 멀뚱히 서 있던 클라크도 바덴의 눈짓에 루산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민사, 가사, 상사, 형사, 행정, 특허, 기타 법률 상담까지, 못하는 게 없답니다. 노바 대학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서도 2등을 했거든요. 불행하게도 여자라고 불신하는 분들이 많아 초면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아, 네. 이해합니다.”

루산은 뭘 이해한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해를 했다.

그리고 자기 입으로 용건을 털어놓는 대신 현명하게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바덴은 자신이 보낸 편지를 바로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축하합니다. 상속자께서 오셨군요.”

***

노바 시내에서 외곽으로 마차를 타고 나가니 야트막한 산과 들이 펼쳐졌다.

이곳은 길도 포석으로 잘 깔려 있었고 중간중간 보이는 마을도 잘 관리된 농지와 목장 사이로 예쁘게 자리 잡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오랜 세월 인간의 손길로 다듬어진, 말하자면 인공적인 자연인 것이다.

크고 거칠고 어둡고 깊어 공포감을 주는 자연적인 자연 - 변경의 산과 들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면적은 16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습니다. 그런데 숲과 야산이 많아 농경지와 목초지 면적이 그리 넓지 않더라고요. 4분의 1 정도, 그러니까 4제곱킬로미터 정도에서 수입이 발생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조금씩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바덴이 열심히 설명했지만, 루산은 사실 그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며 자신이 상속받게 된 땅을 보러 가는 이 길에 오만 상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집안이 망하고 장원과 저택이 넘어가게 되자 아버지는 친척과 친구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평소 베푼 게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안타까워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빚은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씩 모으거나 그동안의 정의로 약간의 도움을 주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왜 그 당신 사촌이 있잖아요! 가서 사정을 좀 해 봐요!”

저택이 넘어가게 되었을 때 온순하던 어머니가 악다구니를 썼다.

아버지는 죽을상을 하고 사촌을 찾아갔다.

“우리가 왕래가 있었나?”

“···왕래는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지 않겠나.”

“흥! 내 아버지는 본가로부터 받은 것 하나 없이 분가했고, 나도 아버지나 본가로부터 받은 것 없이 오직 내 힘으로 평생 노력해서 겨우 이 작은 장원을 일구었지. 본가의 재산을 다 털어먹은 사람이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왔는지 모르겠군.”

“···어려움이 있었으면 말하지 그랬나?”

“됐고! 듣자 하니 내 장원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던데, 주위에 폐 그만 끼치고 알아서 해!”

돈 나가는 게 아까워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사촌은 냉기를 풀풀 풍기며 야멸차게 거절했다.

빚을 모두 털어 내지는 못하더라도 저택이 넘어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어머니는 지금도 아버지의 사촌을 원망했지만, 루산은 그가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빚은 사돈지간도 돌아서게 만들지 않았는가? 평생 교류도 없이 살아온 사촌 형제가 무슨 죄가 있어 그 빚 구덩이에 엮여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루산은 변경 군단에 들어가 직접 돈을 벌어 보면서 깨달았다.

‘어머니, 돈 벌기 쉽지 않아요.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요.’

그래서 한때 아버지의 사촌 – 얼굴도 본 적 없는 당숙 – 을 원망하던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참으로 공교로웠다.

도와달라는 요청을 차갑게 거절하여 사촌이 죽음의 세계로 조금은 일찍 가게 만든 데 약간은 기여한 그 짠돌이 당숙의 재산이, 본인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생사의 법칙과 법률의 힘에 의해 그 사촌의 아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자식도 없고 부모 형제도 없어 가장 가까운 방계 혈족인 자신의 몫이 되다니, 먼저 가신 아버지가 당숙을 보고 뭐라고 할까?

‘야, 이 씨! 이렇게 될 거, 나 좀 도와주지.’

‘흥이다! 그렇잖아도 내가 일군 재산, 네 자식한테 간 것 때문에 분통 터져 죽겠는데 뭐라고?’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루산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하아! 인생······.’

***

노바 외곽에 있는 장원을 함께 돌아보고 오는 길에 클라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기사님이 이제 영주님이 되시는 건가요?”

그 말을 들은 루산과 바덴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호호호!”

클라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안. 비웃은 건 아니야. 너무 뜬금없어서.”

루산이 얼른 사과하고 설명해 주었다.

“영주보다 지주에 더 가깝지. 화폐 개혁, 군제 개혁으로 많은 게 바뀌었거든. 물론 지방으로 갈수록 여전히 옛날 영주처럼 사는 귀족들이 많기는 한데 수도나 대도시와 가까운 곳에서는 거의 없어.”

클라크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자 루산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학교에 보내야겠구나.’

클라크는 글자는 어찌어찌 깨쳤지만, 개척촌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클라크가 태어난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바덴이 클라크와 눈을 맞추고 친절하게 말했다.

“이 장원의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만 노예는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여전히 이 땅의 주인을 두려워하고 공손히 섬기겠지만, 옛날처럼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답니다.”

클라크는 바덴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덴은 클라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루산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상속세는 4만 골드 정도 나올 겁니다.”

“그렇게나 많이 나옵니까? 농지도 그리 많지 않은데······.”

“노바 근교잖아요. 경치도 좋고 고즈넉하고······. 귀족들의 별장으로 인기가 많을 땅이에요.”

“음.”

루산이 볼을 긁적이다가 물었다.

“이 장원의 일 년 수입이 얼마라고 했죠?”

“지난 3년 평균을 보면 고용인들 급여랑 세금 빼고 일 년에 1,200골드가 조금 넘어요.”

“한 달에 100골드라······.”

아카데미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돈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몰랐지만, 이 정도면 상당한 수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민들 기준이었다.

변경 군단에서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일하면서 루산은 한 달에 90골드 정도를 받았다. 괴수를 사냥해서 얻는 성과 보상금은 그때그때 따로 받는다.

‘변경에서 더 많이 버는구나.’

하지만, 변경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상속세가 4만 골드나 되다니······.’

그렇다는 것은 이 땅의 가치가 적어도 10만 골드 이상이라는 것인데, 이는 80년 이상을 경작지로 이용해야 거둘 수 있는 수입이었다.

다시 말해 경작지로서의 가치보다 노바의 돈 많은 귀족들이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즐기며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서의 가치가 훨씬 높다는 뜻이다.

루산의 처지에서는 파는 것이 이익이었다.

당장 상속세를 낼 여유가 없었고, 80년을 보유해야 얻을 수 있는 수익을 곧바로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누나 때문에라도 돈이 필요했다.

채권자들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남은 가족들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사돈 가문이 보름스 가문과 비슷한 수준으로 부유했기 때문에 당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누나가 표적이 되었다.

채권자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한 사돈 가문은 이혼을 시키려 했지만, 빙충이 같은 매형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사람 없으면 나 죽어요!”

자식을 죽일 수 없었던 사돈네는 결국 아버지가 남긴 빚을 상당 부분 떠안아야 했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그리고 누나는 남은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하아!”

누나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갑자기 빙충이 같은 매형이 보고 싶었다.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변경으로 간 이유는 사돈네에 진 빚을 갚아 누나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아니 누나와 어머니가 말렸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땅을 파는 게 맞는데······.’

그러나 루산은 매각을 결심하지 못했다.

땅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수입으로 돈 걱정 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오로지 제국과 황제를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기사의 삶이 아니겠는가!

비록 이 땅의 수입이, 멕 나이트 파일럿이 돈 걱정을 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명예롭게 사는 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 꿈을 이어나가게 해 줄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고민하는 루산을 보고 바덴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매각을 한번 추진해 볼까요? 내놓기만 하면 원하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아, 아뇨. 아닙니다.”

루산은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레를 쳤다.

그 모습이 품위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상속세를 내기에는 가진 게 조금 부족한데 방법이 없을까요?”

“왜 없겠어요? 당연히 있죠.”

바덴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루산은 사실 당숙의 장원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편지를 읽고 변경을 출발할 때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당숙의 재산이 저택 압류를 풀 정도는 된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장원을 소유하게 되면 누나에게 얼마 해 주고,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변경 군단 위약금을 내고, 황제의 근위대나 전선의 기동 군단에 지원해서 이제부터라도 명예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나 매달 여기서 올릴 수 있는 수입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루산은 실망하지 않았다.

‘변경에서 괴수 더 때려잡으면 되지. 전진 기지 캡틴이 되면 급료도 더 늘 거야. 그리고 이제 영주잖아, 영주.’

다른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휘두를 수 있는 영주!

물론 현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뱃심이 두둑해졌다.

루산은 클라크를 향해 윙크했다.

개척촌 출신의 소년 집사는 영문을 몰라 황소처럼 순박한 눈을 끔벅끔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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