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놓치면 후회하실 거예요
4. 놓치면 후회하실 거예요
상속세 4만 골드.
루산은 먼저 은행 예금을 확인했다.
제 돈 내고는 술 안 마시고, 여자 안 만나고, 집안일 해 줄 사람으로 소년 하나만 고용하고, 취미도 갖지 않고··· 지난 4년 동안 목숨 걸고 번 돈을 그렇게 악착같이 모았다.
기본급과 기본급보다 많은 성과 보상금을 모두 합쳐 9,500골드가 조금 넘었다.
그래도 30,500골드가 부족했다.
“상속세 분할 납부 제도라는 게 있어요. 5년 동안 나눠서 낼 수 있는 거죠.”
자신의 전문 분야라는 듯 바덴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행 대출도 가능해요. 담보가 깔끔하니까요.”
“일단은 빚을 지지 않는 쪽으로 봐 주세요.”
빚은 귀신보다 무서운 것.
루산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럼 일단 9,000골드 납부하시고 나머지는 4년 분할로 하시면 매년 7,750골드씩 납부하셔야 해요. 장원에서 얻는 수입 1,200골드를 모두 상속세로 낸다고 하면 6,550골드를 추가로 내시면 됩니다.”
“6,550골드, 흐음······.”
루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1년에 한 푼도 안 쓰고 버는 것이 2,800골드 정도.
이것저것 나가는 걸 빼고 나면 2,400골드.
캡틴으로 진급한다고 갑자기 급료가 몇 배로 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괴수를 무지막지하게 때려잡아야 한다.
결국, 이 상태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필요하면 대출을 받으면 되니까요. 빚을 지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은행의 돈을 이용해 내 자산을 늘려 나가는 것이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빚을 지면 문제가 되지만, 훌륭한 담보가 있잖아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팔면 돼요.”
“으음······.”
‘팔면 된다. 겁낼 필요 없다. 당장 빚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번에는 가진 돈으로 세금을 내고 1년 뒤에 납부할 때 부족하면 그때 대출을 받으면 된다.’
루산은 빚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할게요.”
루산은 바덴의 도움을 받아 상속세 8천 골드를 납부하고 등기를 마쳐 자작나무숲 장원 – 그의 당숙이 생전에 자작나무 숲을 공들여 가꿔 가장 인상 깊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 의 정식 주인이 되었다.
8천 골드만 납부한 것은 살면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여유 자금을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 자신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루산은 바덴에게 기꺼이 보수를 지급했다.
“20골드라고요?”
굳이 따지자면 말 몇 마디 하고 같이 움직이면서 상속 절차에 필요한 자잘한 일들을 도와준 것으로 이틀 만에 20골드를 벌었으니 폭리를 취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 10만 골드의 재산을 적법하게 넘겨주면서 20골드만 받는 것은 지나치게 정직한 것 같았다.
일을 끝마친 바덴은 전혀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누가 의뢰했죠? 당숙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의뢰하지는 않으셨을 테고, 장원의 고용인들 가운데 누군가가 한 건가요?”
그 질문에 바덴이 처음으로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내 루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여자 변호사한테 일을 맡기려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아니, 일부러 맡기는 사람은 아예 없죠.”
“그럼······?”
“그래도 일을 찾아야죠. 내 의지로 이걸 직업으로 골랐으니까요. 교통사고, 화재 사고, 범죄, 신문에 난 부고, 공무소에 들어오는 사망 신고··· 이런 걸 꼼꼼하게 찾아봅니다. 그중에 당사자, 유가족을 열심히 설득해서 일을 따내면 다행이고 아니면 다시 이 일을 반복하는 거죠. 그러다 만난 사건이에요. 운이 좋았죠.”
바덴이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루산은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잘 생각해 보면 공통점은 없었다.
험난한 인생길을 뚫어 보려고 참 열심히 산다는 것. 딱 그 정도였다.
그럼에도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 여자 변호사로서 겪는 어려움을 이해한다고 말할 정도의 동질감.
여전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있었지만, 루산은 변호사 바덴 고슬라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어쨌든······.”
솔직히 다 털어놓아 마음이 후련해진 바덴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빚을 지기 싫어하시는 이유는 알아요. 고객님의 소재를 확인하려다 보니······. 하지만, 1년 안에 대출 없이 상속세를 마련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제안을 하나 할까 해요.”
“무슨 제안을 한다는 겁니까?”
“그 장원 - 자작나무숲 장원 말이에요. 거기가 확실히 입지가 좋거든요. 노바와 가깝지, 풍경 좋지, 한적하지, 별장 위치로 딱이죠.”
“그래서요?”
“그래서 별장 사업을 하면 어떨까요? 대귀족들은 어차피 그런 장원이나 별장을 몇 개씩 가지고 있을 테니까, 여유는 있지만 수도에 그 정도로 넓은 장원을 소유하기는 어려운 귀족이나 돈 좀 만지는 사업가를 대상으로 원하는 시기에 일 년에 며칠씩 머물 수 있게 별장을 빌려주는 거예요. 별장이라는 게 거기 평생 눌러사는 건 아니잖아요. 며칠 쉬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지. 어젯밤에 그 생각이 계속 맴돌더라고요. 어때요? 확실히 대박 아이템 아닌가요?”
“······.”
“어차피 고객님은 변경으로 돌아가실 테고 여기 관리할 사람이 필요할 테니 제가 자작나무숲 장원을 관리하면서 그 사업을 진행하면······.”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던 루산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사업, 안 합니다!”
“네?”
“사업은! 절대! 안 한다고요! 그럼 이만! 가자, 클라크!”
“네? 네!”
당황한 클라크가 미안한 얼굴로 바덴을 쳐다보고는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루산을 지나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간 루산이 거세게 문을 닫았다.
쾅!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서 있던 바덴이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거 대박인데······.”
***
변경으로 곧바로 돌아갈까 하다가 노바까지 와서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어머니를 만나러 간 것이 실수였다.
어머니는 외숙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 난리 통에 단호하게 ‘차라리 연을 끊겠다!’고 했던 것이 미안했는지 외숙은 갈 곳 없는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다.
어차피 당시 외숙의 살림으로 돕겠다고 나섰다가는 홍수에 휩쓸리듯 다 떠내려갔을 것이기에 루산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셔 주는 것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문제는 잔소리였다.
“결혼은 언제 할 셈이냐?”
“우리 일가 중에 유일하게 무재(武才)가 있어 제국 기사 아카데미까지 나왔으면서 변경 군단이 뭐냐, 변경 군단이! 그거 그냥 돈 보고 가는 용병대 아니냐? 당장 근위대에 지원해! 지금도 벌써 늦은 나이다만, 내 아는 사람 통해서 힘 좀 써 볼 테니까.”
외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황궁 경비대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외숙이 아는 사람을 통해 자신을 근위대에 넣어 주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루산은 어머니를 대신 모셔 주는 은혜를 생각해 외숙의 잔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소식을 듣고 눈물 바람으로 달려온 누나 - 셋째를 가져 배가 맥주 통 같았다 - 와 빙충이 같은 웃음을 흘리는 매형을 보니 반가움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루산은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혀를 꽉 깨물었다.
“이야! 우리 처남, 이제 거친 사나이의 냄새가 풍기는데?”
루산은 매형이 내민 손을 마주잡고 씩 웃었다.
그렇게 외숙 집에서 눈물과 웃음과 잔소리와 큰소리로 시끌시끌한 이틀을 지내다 보니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변경이 그리워졌다.
“복귀할 시간이에요.”
이틀을 더 보내도 되지만, 루산은 핑계를 대고 나왔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계속 찍어대는 어머니와 누나를 위로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전쟁터로 가는 것도 아닌데 그만 울어요.”
“부모 잘못 만나······.”
“그런 말씀 마시라니까요!”
루산은 당숙의 장원을 상속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죄스러워 일부러 더 화를 냈다.
미리 불러 놓은 마차를 타기 직전에 빙충이 매형이 루산에게 주머니를 하나 찔러 주었다.
“이게 뭐예요?”
“얼마 안 돼. 요새 사업이 잘 안 풀려서······. 다음에는 넉넉하게 줄게.”
“아니, 됐어요! 나 잘 벌어요!”
“에헤! 넣어 두라니까!”
“됐다니까요. 곧 있으면 셋째도 태어나잖아요! 어디 보자. 그때 축하도 못 해주는데 이 외삼촌이 미리······.”
“어허! 넣어 둬. 넣어 둬. 나 화 낸다!”
루산은 힘으로 매형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장의 자존심을 지켜줘야 했다.
루산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외숙의 집에서 멀어졌다.
“좋은 분들이세요.”
졸지에 누나의 아이 둘을 돌봐야 했던 클라크가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6남매의 장남이라 애 보는 게 루산의 어머니나 누나보다 나았지만, 애 보기는 힘든 일이었다.
“고생 많았다.”
“아니에요.”
그렇게 두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고향 - 혹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변경 제8구역으로 돌아가려고 역으로 가는데, 길모퉁이에 왠지 익숙한 사람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변호사 바덴 고슬라가 봉투를 들고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루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는 분인가요?”
마부가 마차를 멈추려 했다.
“아니오. 모르는 여자에요. 그냥 갑시다.”
“아! 네.”
클라크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바덴과 루산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마차는 멈추지 않고 바덴의 앞을 쌩 지나갔다.
바덴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이런! 씨!”
그러나 바덴은 포기하지 않았다.
긴 치마를 야무지게 잡아 두르고 뛰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만요! 고객님, 이대로 묻히기에는 아까운 아이템이라니까요!”
루산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바덴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신발이 벗겨지고 봉투를 놓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신발이 벗겨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든 채 맨발로 다시 달렸다.
그 투지와 열정에 루산은 가슴이 울컥했지만, 사업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루산은 기어이 모른 체했다.
그런데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클라크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럴 수가! 가방을 떨어뜨렸어요! 마부님, 잠시 세워 주세요!”
루산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집 밖에서 어린 집사를 혼내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므로 이 역시 모르는 척했다.
마부가 마차를 멈추고, 클라크가 그동안 품에 꼭 품고 다니던 가방을 줍기 위해 느릿느릿 걸어갈 때, 바덴이 환하게 웃으며 미친 듯이 달려 마차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숨을 헐떡거리며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놓치면 후회하실 거예요.”
“다들 그렇게 말한다던데?”
“읽어 보는 건 할 수 있잖아요.”
“하아!”
루산은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느라 모자가 날아가고 머리가 헝클어지고 신발은 저 뒤로 팽개쳐지고 손바닥은 까져 피가 나는 젊은 여자 변호사가 멋져 보였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버지도 분명 열정적으로 투자를 권유하던 그 사람이 멋져 보였을 것이기에.
“그런데 내가 지금 나오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계속 기다렸죠.”
“이틀 동안 그 자리에서 무작정 기다렸단 말인가요?”
“에이, 밤에는 집에 갔다가 새벽에 다시 나왔죠.”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그 얼굴에 루산은 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아버지와 같은 길을 절대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어쩌면 같은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이왕 가게 된다면, 갈 수밖에 없다면, 실패가 아닌 성공을 하고 싶었다.
“타세요. 가면서 검토해 봅시다. 클라크, 이제 됐으니까 얼른 와. 빨리 안 오면 여기 두고 간다!”
“네, 기사님!”
자상하고 착한 소년 집사는 바덴의 신발과 모자까지 주워 달려왔다.
바덴이 감사 인사를 하자 클라크의 얼굴이 붉어졌다.
망한 가문의 기사, 여자 변호사, 개척촌의 소년 집사를 태운 마차는 서서히 움직여 큰길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