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악수
***
“얍!”
“흔들리지 말고 똑바로!”
“얍!”
“팔을 좀 더 높이 들어!”
델타 기지 요원 거주 구역에 기지 대장 내외가 정성껏 키우는 닭들의 울음소리 외에도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새로이 등장했다.
클라크가 기합을 지르며 루산을 따라 검을 휘두르다가 지적받는 소리였다.
클라크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루산의 이마에도 몇 방울 송골송골 맺혔을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고개를 쑥 내밀며 입으로 노크했다.
“똑똑.”
델타 기지 멕 나이트 캡틴 트리어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넌 계속 하고 있어.”
“네! 얍! 얍!”
손님이 등장한 김에 잠시 쉬려던 클라크가 화들짝 놀라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루산은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고는 트리어에게 걸어갔다.
“난 또 무슨 소린가 하고······. 종자로 키우려고?”
“요즘 세상에 무슨 종자를 키워요?”
“왜? 그 뭐냐, 명문가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한다면서?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어릴 때부터 데려와 잘 길러서 가문의 힘으로 키우고 인맥도 넓히고 말이야.”
트리어는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서 이런 부분에서 살짝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러나 루산에게만큼은 콤플렉스를 숨기지 않고 시원하게 트고 지냈다.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친화력을 발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루산도 트리어에게는 소위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을 굳이 숨기려 애쓰지 않았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집안이 망했기 때문에 딱히 우월감에 젖어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서로에게 보여 주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문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요새는 어릴 때 가정교사, 소년이 되면 김나지움, 더 자라면 기사 아카데미 코스로 가죠. 누가 자기 자식을 어려서부터 남 뒤치다꺼리하는 데로 보내려 하겠어요?”
“그렇군. 그러면 뭐 하는 거야? 기사로 키우기에는 늦은 나이 아니야? 신분도 그렇고.”
트리어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무신경한 사람들은 남이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소년이 상처를 받든 말든 신경 쓰지 않지만, 트리어는 보기와 달리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루산은 한때 자신을 괴롭혔던 트리어를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 변경 땅에서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죠. 언제까지 옆에서 보살펴 줄 수는 없잖아요. 혼자 고향 집에도 가고 라돔 심부름도 가고 해야죠.”
“그런 거야?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것 같은데?”
트리어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루산이 어깨를 으쓱하자 더는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오늘 출근하자마자 기지 대장님이 발표를 하실 거야.”
“뭘요?”
“전에 말한 거 있잖아. 캡틴······.”
“아!”
트리어가 변경 8군단 전대장으로 가고 그 후임으로 자신을 델타 기지의 캡틴으로 추천하겠다는 이야기.
잊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도 않았다.
최근에는 오히려 바덴이 하기로 한 사업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별장 사업.
결국 하기로 했다.
바덴의 사업 계획서대로만 된다면 자작나무숲 장원 경작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나 이곳에서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일하며 받는 급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이 핑핑 돌아갔다.
아버지가 사업 투자에 실패해 집안이 가루가 되는 사태를 겪지만 않았어도 루산 역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금을 끌어와 투자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루산은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절제가 가능했다.
바덴은 사업을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려면 5만 골드는 필요하다고 했지만, 루산은 장원을 담보로 대출할 수 있는 금액 한도를 꽉꽉 채우지 않고 1만 골드만 대출해서 맡겼다.
“일단 성과를 보여 주세요. 그럼 추가 투자를 생각해 볼 테니까.”
“그래도 시작할 때 제대로 관심을 끌려면 초기 투자는 확실히 하는 게······.”
“당장 별장을 으리으리하게 새로 지을 생각 말고, 기존 저택을 최대한 활용해 보란 말이에요. 새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낡고 오래된 것, 고아한 것을 귀족적이라며 동경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있기야 있겠죠.”
“대출 빚을 더 지려니 간이 떨려서 그러는 게 결코 아니에요. 정말이라니까요!”
“······.”
루산은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어쨌든 더 대출 빚을 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스스로 투자할 여력은 없고 아이디어와 의욕만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려는 바덴으로서는 장원과 사업 자금을 모두 대는 루산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루산은 자신의 인생에 절대로 없을 것 같았던 사업이라는 것에 손을 대고 빚까지 졌다. 까짓, 실패하더라도 장원을 팔면 된다고 대범하게 마음먹으려 애를 써 봤지만, 온 신경이 그쪽으로 가 있었다.
변경 군단에서는 상속세와 대출 이자를 충당하기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내 말 듣고 있지?”
트리어의 말에 루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럼요!”
“아니,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은데?”
“다 들었다고요. 기지 대장님이 캡틴 발표를 할 거라는 이야기.”
“그래. 당연히 내가 추천한 대로 후임은 너야. 문제는 켐니츠지.”
“아!”
루산은 아침부터 트리어가 왜 찾아왔는지 이제야 알았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와 봤다는 것은 핑계일 것이다.
“잘할 수 있겠지?”
“뭘요?”
루산이 의뭉스럽게 되묻자 트리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켐니츠, 그거 헤헤거려도 독종이야.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자신이 걱정이 되어서 찾아온 것이다.
루산은 픽 웃었다.
“델타 기지의 미친개 밑에서 4년을 구르고도 살아남았어요. 누가 더 독종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죠.”
트리어가 깜짝 놀라는 척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설마 델타 기지의 그 미친개가 자신을 가리키는 거냐는 듯이.
루산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는 사람한테 이 정도 말도 못 해요? 캡틴 밑에서 구른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깹니다.”
“나 멀리 가는 거 아니다. 널 다시 내 밑으로 불러올 수도 있어.”
“그건 그때 생각하죠, 뭐.”
“쳇! 안 통하네, 이제.”
“그럼요. 변경 5년차인데.”
“벌써 그렇게 됐나?”
트리어가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금방 빠져나왔다.
“가기 전에 술이나 한잔 하자.”
“누가 사는 건데요?”
“어휴! 내가 산다, 내가 사! 언제 네가 산 적 있냐?”
“그럼 기꺼이.”
트리어는 피식 웃고는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루산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호통을 쳤다.
“팔 높이! 기합은 배에 힘을 팍 주고!”
“네? 네! 얍! 얍!”
점점 기어들어 가던 클라크의 기합 소리가 다시 쩌렁쩌렁 울리며 델타 기지 요원 거주 구역의 아침을 마저 깨웠다.
***
몸도 마음도 넉넉한 시골 할아버지처럼 생긴 델타 기지의 대장을 요원들은 뒤에서 호른 영감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루산 보름스를 캡틴으로 임명한다.”
정식 군대는 아니지만 임명장도 있었다.
루산이 임명장을 받자 델타 기지 요원들이 박수를 쳤다.
“지난번에 산다는 맥주, 아직까지 안 샀지? 오늘은 한턱 제대로 내라고!”
통신 담당 브로디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 주면서도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어! 고마워.”
루산은 박수와 환호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미소를 짓고 손을 들어 보이며 어물쩍 넘어갔다.
정식 군대도 아니고 변경 군단의 전진 기지에서 낡은 멕 나이트 여섯 대를 지휘하는 캡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델타 기지에 주둔해 있는 80여 명의 갈채 속에서 임명장을 받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고 뿌듯함이 밀려왔다.
루산은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느라 애를 써야 했다.
인정받았다, 성공했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임명식이 끝나자 다들 흩어졌지만, 멕 나이트 파일럿들은 자리에 남아 축하해 주었다.
일종의 전통이었다.
“축하해, 루산!”
“8군단 최연소 캡틴인가?”
“최연소는 아니야. 트리어가 아마 최연소일걸?”
“트리어는 군단에 들어온 나이가 훨씬 빨랐잖아. 어쨌든 축하해!”
“축하해, 루산! 야간 근무는 좀 빼 주라고! 이제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이거든.”
하겐, 제프, 에센이 농담을 하면서 시끌벅적하게 축하해 주었다.
“고마워요. 야간 근무는 나도 싫어. 공정하게 뺑뺑이 돌립시다.”
루산도 너스레를 떨며 답례했다.
마지막으로 켐니츠가 다가왔다.
하겐, 제프, 에센이 서로 쳐다보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약간은 우려하면서도 지루한 일상을 깨뜨릴 짜릿한 이벤트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멕 나이트 파일럿이라 해도 다 같은 파일럿이 아니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체념할 것은 체념하고 현상 유지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절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겐, 제프, 에센은 전자, 켐니츠는 누가 봐도 후자였다.
변경 8군단 근무 7년차 - 루산보다 2년이 더 빨랐다 - 인 그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일처리가 꼼꼼했다.
변경에 근무하는 대다수의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좌절감 혹은 만족감에 수련을 그만두는 것과 달리 그는 근무가 끝난 뒤에도 검술을 훈련해 실력도 상당했다.
대인관계 또한 나쁘지 않았다. 자기 몫을 정확히 챙기려는 깍쟁이 – 루산이 처음 변경에 왔을 때 동료들의 눈에 비친 모습 –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지원 요원들에게 잘 베풀었다.
그럼에도 캡틴에 켐니츠가 아닌 루산이 임명된 것이다.
“축하해, 루산.”
아직 자신의 근무지로 돌아가지 않은 다른 부서 요원들도 구석에서 화끈한 사건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켐니츠는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켐니츠.”
루산이 켐니츠의 손을 맞잡았다.
‘윽······!’
그 순간 루산은 깨달았다.
앞날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켐니츠는 사람들 앞에서는 웃고 있었지만, 악수할 때 루산의 손을 으스러뜨리려는 듯이 강하게 꽉 쥐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치졸하게 나오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루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캡틴으로 임명된 첫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품위 없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악수는 선공을 빼앗긴 상태에서 전세를 역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루산은 짧은 시간에 해법을 찾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축하와 답례를 악수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다정하게 포옹하는 것처럼 왼팔로 켐니츠의 등을 두드리다가 가운데손가락으로 그의 경동맥을 꾹 눌렀다.
‘윽!’
이 예상치 못한 공격에 켐니츠는 힘이 빠졌고 꽉 눌렸던 루산의 손은 자유를 찾았다.
루산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악수하던 오른손에 힘을 강하게 주어 역공을 가한 것이다.
‘헙!’
손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켐니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잘 부탁해요, 켐니츠!”
“그럼, 그럼. 나야말로, 흐음······!”
두 사람은 격렬하게 축하와 답례를 주고받은 뒤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루산은 이 일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8군단 전원은 웨이브에 대비하라! 전진 기지는 순찰을 강화하고 기지 방어 태세를 점검하라!]
인간 세상으로 밀어닥치는 괴수들의 물결.
그 죽음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