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리끼리 먹는 게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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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 시즌은 변경에서 가장 위험한 시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간이었다.
변경 군단 요원들은 기본급 외에 성과 보상금을 받기 때문에 웨이브 시즌만 기다린다는 사람도 상당했다.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기간이지만,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변경 군단에 들어온 사람들이라 그런 말을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델타 기지 요원들은 긴장감 속에서도 신바람을 내며 바쁘게 움직였다.
“개척촌 사람들을 고용해서 멕 워커와 함께 기지 방벽 보강 공사를 진행하세요.”
평소 닭이나 키우고 웃는 얼굴로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다는 호른 영감이 오랜만에 전진 기지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고용할까요?”
“글쎄, 한 300명 정도?”
경리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출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군단 본부에서 승인한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델타 기지 자체 예산으로 지급해야 하는데, 지출이 많아지면 델타 기지 요원들의 성과 보상금이 줄어들게 된다.
호른 영감이 자신의 굵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 기지는 다른 전진 기지들보다도 더 깊이 들어와 있어요. 가장 먼저 웨이브를 맞는단 말이에요.”
“으음······!”
“죽으면 다 헛것이에요. 오래 살려면 내 말 들으세요.”
호른 영감이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변경 군단 요원들 중에서도 특히나 수명이 짧은 정찰병 출신으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인물.
그의 존재 자체가 훈장이고 권위였다.
“알겠습니다.”
경리부장이 수용하자 멕 워커를 운용하는 지원대와 기지를 지키는 경비대의 장들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방벽 공사는 그렇게 하고, 경비대는 방어 무기 점검하고 다른 부서 요원들에게 무기 사용 훈련을 실시하세요.”
“알겠습니다.”
경리부나 지통부 같이 평소 무기를 쓸 일이 없는 부서의 요원들도 필요하면 방벽에 올라 싸워야 한다.
변경 군단 요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웨이브 시즌이 길어질 수 있으니 경리부는 기지 내 식량 상황을 확인하고 오늘 당장 라돔으로 가서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세요. 경비대는 델타 기지 배후에 있는 개척촌들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세요.”
“네, 대장님.”
호른 영감은 부서를 정확히 콕 집어 할 일을 말해 주었다.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루산은 그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다.
“개척촌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올 때는 단호하게 겁을 주세요. 전진 기지가 무너지면 개척촌들은 순식간이라고. 사정하고 부탁하고··· 그런 거 할 시간이 없어요. 오늘 당장 방벽 공사에 필요한 인원들 데려오고, 방어 무기 점검하고, 식량 확보하고, 개척촌 방벽 점검하고, 다 해야 합니다.”
“네, 대장님.”
회의는 길지 않았다.
각 부서장과 부대장들은 맡은 일을 하기 위해 곧바로 흩어졌다.
루산 역시 일어서서 나가려 할 때 호른이 그를 불렀다.
“캡틴.”
“네?”
“월권을 하려는 건 아니고, 부탁 정도로 이해해 주세요.”
전진 기지 대장이 기동 부대 캡틴보다 상급자라지만,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호른은 용병 출신으로 변경 군단에 들어와 정찰대에서 일했고, 루산은 귀족 출신으로 기사 아카데미를 나온 정통 멕 나이트 파일럿이었다.
아무리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변경 군단에 들어온 처지라지만, 이곳에서도 신분의 벽은 무섭게 작동하여 귀족 출신이 수틀리면 평민 출신의 목을 날려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 명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더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평소 서로 존중하고 무시할 것은 무시하며 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말씀하세요.”
“이곳을 선점하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호른이 지도 위에 짚은 지점은 델타 기지 서쪽에 있는 반달 모양의 호수였다.
델타 기지 근무 5년차, 루산은 그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능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새로 임명된 캡틴이 다행히 자신의 말을 금방 이해하고 수용하자 델타 기지의 대장은 금세 마음씨 좋은 호른 영감으로 변해 미소를 지었다.
***
루산은 대기하고 있는 파일럿들을 모두 불렀다.
“여기 반달 호수 쪽에 방책을 설치하고 1차 저지선으로 삼아볼까 해요.”
“음!”
하겐은 고개를 갸웃하고 제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센이 루산에게 물었다.
“아직 웨이브의 규모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인데, 가능하겠어?”
“미리 알고 그에 맞게 준비할 수는 없죠. 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한 뒤에 겪게 되는 거지.”
“그건 그렇지.”
그때 잠자코 있던 켐니츠가 물었다.
“누구 아이디어야?”
“뭐가요?”
“반달 호수에 저지선을 펼치는 거 말이야.”
“그거, 영감님이 먼저 조언한 것이긴 한데 내 생각에도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서······.”
그러나 켐니츠는 루산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무지르고 들어와 한마디 툭 던졌다.
“호른 영감이 욕심이 많아.”
루산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불쾌했지만, 켐니츠의 말에는 동의했다.
이것은 확실히 욕심이 많은 계획인 것이다.
변경 군단의 전진 기지는 단순히 원시의 땅에서 출몰하는 괴수로부터 개척촌을 지키기 위해 건설된 방어 시설이 아니었다.
변경 개척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해 온, 개척지 방어와 개척지 확대를 동시에 실행하기 위한 군사 개척 복합 기지였던 것이다.
물가에 있는 평평하고 너른 땅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괴수들도 선호하는 땅이다. 그리고 그런 땅은 많은 동물과 괴수의 서식지일 뿐 아니라 이동로 역할도 한다.
그런 좋은 장소를 골라 전진 기지를 건설한다. 멕 나이트로 대표되는 인간의 무력으로 주변의 괴수와 맹수를 소탕하고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방벽을 높게 쌓는 것이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하고 안전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 개척민들이 전진 기지로 들어오게 되고 그 수가 더욱 늘어나면 주위에 개척촌들이 지어지게 된다.
이미 기지 요원들의 생활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건설되어 있고 요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점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전진 기지는 이들 개척촌의 중심 타운 역할을 한다.
변경 제8구역의 중심 도시 라돔도 이렇게 성장한 도시였다.
이처럼 전진 기지가 개척민들로 가득 차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비옥하고 근처에 자원이 많고 교통이 좋은 땅에 새로운 전진 기지를 건설하고, 그 근처에서 맹수와 괴수를 소탕해 안전을 확보하며 새로운 개척민을 기다리는 것이다.
변경 군단은 괴수를 사냥해 얻은 부산물 수입뿐 아니라 개척지에 정착한 백성들에게서 거둔 세금으로 덩치를 불리고 군세를 강화해 더 많은 개척촌을 건설함으로써 괴수로부터 인간 세상을 안전하게 지키고 인간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해 왔다.
나라에서 지원받는 것 없이도 굴러가는 놀라운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역할을 하는 전진 기지의 대장에게는 전진 기지의 직접적인 보호 범위 안에 있는 개척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
말하자면 평소 집에서 닭이나 키우고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호른 영감이 이 일대의 영주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 호른 영감이 반달 호수를 점찍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확실히 반달 호수 옆이 중요한 길목이기는 하죠. 그 주변 여러 골짜기를 통과한 웨이브가 호숫가를 지날 테니까요. 거기서 저지선을 펼치면 델타 기지에 가해지는 웨이브의 충격이 크게 줄어 개척촌이 더욱 안전해지겠죠.”
“우리는 죽어나겠지. 실제로 죽을지도 모르고.”
켐니츠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번 웨이브가 끝나면 호른 영감은 델타 기지 이전을 발표하겠군. 반달 호수라······, 큰 도시가 들어서기에 충분한 곳이지.”
그제야 다른 파일럿들은 호른 영감이 욕심이 많다는 켐니츠의 말을 이해하고 술렁거렸다.
짝!
루산이 손뼉을 한 번 쳐 파일럿들의 주목을 끌었다.
“뭐, 영감님이 반달 호수 옆에 도시를 건설해 말년에 시장 노릇을 하든 뭘 하든 그거야 영감님 마음이니까 상관할 바 아니고······.”
“······?”
“우리는 죽지 않고 많은 괴수를 잡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야 그렇지.”
하겐이 맞장구를 쳤다.
제프와 에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썩 괜찮은 생각이라고 보거든요. 넓게 트인 곳에서 몰려오는 괴수를 상대하는 것보다 좁은 지역을 막고 상대하는 게 쉽잖아요. 시간도 절약하고.”
“음, 맞는 말이야.”
“게다가 본격적으로 웨이브가 시작되면 군단의 기동 전단이 소탕을 돕는다고 이곳으로 올 텐데, 그러면 나눠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루산은 품위 없는 저속한 말을 쓰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런 말이 보통 효과가 직방이었다.
나눠 먹어야 한다는 말에 파일럿들이 곧바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기 입에 들어가던 것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왕 먹을 거 우리끼리 먹는 게 좋지. 암, 그렇고 말고!”
“루산, 다 먹을 수 있단 말이야?”
루산은 대답 대신 자신 있는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다른 쪽으로 오는 웨이브는 어쩔 수 없지만, 반달 호수를 통과하는 웨이브는 우리가 다 먹어 보죠. 어때요?”
“좋아!”
“그거 좋지!”
“듣기만 해도 벌써 배가 부른걸!”
루산의 말에 다들 좋아라고 호응하자 켐니츠는 분통이 터졌다.
“아니, 누가 보면 이미 손에 들어온 줄 알겠네. 거기는 위험하다니까! 자칫하다가는 멕 나이트고 뭐고 다 쓸려! 죽는다고!”
그 말을 들은 루산은 켐니츠를 쳐다보며 살짝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다 갈 수는 없어요. 델타 기지를 지킬 멕은 남아야죠. 켐니츠는 반달 호수 계획이 별로인 모양이니 여기 남아요. 내일 도착하는 신입 파일럿이랑 함께 델타 기지 방어를 담당하세요.”
“아니······!”
기습적으로 발표한 근무 배정에 켐니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겐, 제프, 에센은 나와 함께 가죠. 멕 워커 세 대, 순찰대 절반을 동원할 겁니다. 준비 되는 대로 출발할 테니 그리 아세요.”
루산은 델타 기지 캡틴으로서 멕 나이트 여섯 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캡틴으로 임명되지 못한 켐니츠가 분노하고 억울해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를 달래고 위로하고 배려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것은 목숨 걸고 싸우는 변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변경이 아니더라도 배려와 존중은 상호적인 것이다.
켐니츠가 먼저 자신을 존중한다면 그를 기꺼이 존중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권한으로 찍어 누를 것이다.
뒤에서 욕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누구나 그러니까.
앞에서 욕하면 싸우자는 것이니 그때는 검을 뽑으면 된다.
그렇지 않아도 별장 사업 문제로 머리가 시끄러운 루산은 이런 별것 아닌 문제로 기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던 루산이 몸을 돌려 말했다.
“아! 그리고 만약 다른 방면 웨이브가 약하고 반달 호수 방면 웨이브가 크면 호출할 테니 그때는 곧바로 출동하세요.”
“······.”
상황을 봐서 참가할 기회를 주겠다는 뜻으로 켐니츠에게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하겐, 제프, 에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켐니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위로하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어느 쪽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켐니츠는 막대한 성과 보상금을 획득할 기회를 잃었다.
물론 반달 호수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지만, 배제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당장의 성과 보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도 이러한 상황을 계속 겪게 된다는 뜻이었다.
우열을 확실히 깨달은 그는 입술을 깨문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