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깔때기
***
정찰병이 목덜미에 올라타자 커다란 도마뱀처럼 생긴 동물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뒷다리와 긴 꼬리로 중심을 잡고 섰다.
짧은 앞다리로 가슴을 두드리니 탐- 탐- 북소리가 났다.
원시의 땅에 사는 동물 탐탐이었다.
탐탐은 일종의 괴수로 볼 수 있지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인을 구별할 줄 알아 변경에서는 옛날부터 길들여 타고 다녔다.
무엇보다 이 괴상한 생명체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인간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죽여서 얻을 수 있는 부속물의 가치보다 살려서 얻을 수 있는 이용 가치가 더 크기 때문이었다.
탐탐의 생명 구슬에서 추출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소형 괴수 란드라트보다도 적었던 것이다.
탐탐-
탐탐-
탐탐-
정찰병을 태우고 일어서서 제자리에 대기하는 탐탐들이 가슴을 두드리며 북소리를 냈다.
마치 크고 정교한 장난감 같았다.
“출동 준비 끝났습니다, 캡틴!”
정찰대 지휘관이 고개를 쳐들고 보고하자 낡은 멕 나이트의 외부 확성기를 통해 루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멕 나이트가 선두와 후미를 맡을 겁니다. 멕 워커는 중간에 서세요. 정찰대 역시 대열 중간에서 측면만 경계하세요.
우렁우렁 울리는 멕 나이트 확성기 소리에 탐탐들이 조금 놀라는 것 같다가 금방 진정했다.
델타 기지에서 생활하며 나름 익숙해졌던 것이다.
멕 나이트가 선두와 후미를 맡는 이유는 정찰병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였다.
선두로 나섰다가 운 나쁘게 중대형 괴수를 만나면 탐탐에 탄 정찰병은 그야말로 한 입 거리였던 것이다.
정찰병들의 활약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많지 않은 병력을 아껴야 했다.
“알겠습니다, 캡틴!”
루산의 낡은 멕 나이트가 걸음을 옮기는 것을 신호로 멕 나이트 4대, 멕 워커 3대, 탐탐 15마리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멕 워커들은 커다란 그물망 주머니에 각종 연장과 보급품을 담아 들고 갔다.
쿵! 쿵!
탐탐- 탐탐-
거대한 멕들과 사람보다 큰 탐탐들의 이동은 결코 조용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기습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자주 다니던 정찰로로 이동하는 것이라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멕과 탐탐으로 이루어진 기동 부대는 원시림과 초원을 지나 세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반달 호수.
북쪽과 서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거기서 내려온 물줄기들이 호수로 들어왔다가 동쪽으로 흘러 나갔다.
호수 남쪽에는 평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서쪽과 남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서 내려온 물이 이 땅을 적시며 호수로 흘러들어 갔다.
“이제 보니 정말 좋은 땅이네.”
정찰과 작전 수립을 위해 동쪽 봉우리에 오른 루산이 반달 호수 지역 전경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땅의 가치를 따져 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머릿속에 그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장원을 물려받게 되었고 은행 대출을 끼고 별장 사업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입지와 사업 타당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땅의 가치에 대해 이제 겨우 관심을 갖게 된 초심자의 눈에도 이 반달 호수 지역은 무척 좋은 땅이었다.
지금은 호수 남쪽 평원에 울창한 숲과 무성한 초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숲과 초지를 걷어 내면 대도시와 광활한 농지가 들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른 영감이 욕심이 많아.”
루산은 켐니츠가 했던 말을 저도 모르게 내뱉으며 입맛을 다시고는 봉우리를 내려갔다.
***
“북쪽, 서쪽, 남쪽 골짜기를 통해 내려온 괴수들이 호수 남쪽 평야로 모였다가 동쪽 입구로 빠져나올 겁니다. 우리는 동쪽 길목을 막아야겠죠.”
루산이 지도를 짚으며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쪽 길목이라 해도 보통 넓은 게 아닌데?”
“막아야죠.”
“어떻게?”
호수의 물이 흘러 나가는 동쪽 강변은 상당히 넓었다.
강 북쪽은 경사가 급한 산줄기가 절벽처럼 이어지니 상관없었지만 강 남쪽으로 원시의 숲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멕 나이트 4대, 멕 워커 3대, 정찰병 15명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 전력으로 우리가 높고 튼튼한 성채를 지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루산이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1. 나무를 베어 기둥이 될 두 나무에 붙게 가로눕힌다. 간간이 두 겹, 세 겹으로 높이 쌓고 말뚝을 박아 고정시킨다. 이렇게 두 나무 사이에 통나무 장벽을 만든다.
2. 이 일을 반복한다.
“꼼꼼하게 할 필요도 없고 높고 튼튼하게 만들 필요도 없어요. 사람도 아니고 괴수가 장애물을 만나 일부러 뛰어넘거나 부수고 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저 장애물을 괴수 이동 경로를 가로막는 방향이 아니라 사선으로 설치해 깔때기처럼 가운데로 모이게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죠. 물론, 최종 저지선은 굵은 나무로 높고 튼튼하게 만들면 좋겠죠.”
루산의 설명을 들은 대원들은 금방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별것 아닌 원리였다.
다가오는 괴수들이 가운데로 모이도록 양쪽에서 사선 모양의 장애물을 여러 겹 설치한다는 것이다.
멕 워커 세 대와 멕 나이트 네 대를 동원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듣고 보면 별것 아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고 지형지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간단히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충 만들면 소형 괴수들은 빠져 나가지 않겠어? 양 옆으로 벗어나는 것들도 많은 텐데?”
하겐의 질문에 루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강물로 들어가거나 산을 타넘는 녀석들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요? 통나무 바리케이드 밑으로 빠져나가는 소형 괴수도 신경 쓰지 말아요. 뒤에 있는 사람들도 좀 나눠 먹어야죠.”
“크크크!”
“하하하!”
대원들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게 공사가 시작되었다.
원시림의 굵은 나무를 베고 다듬는 작업은 멕 워커의 몫이었다.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멕 나이트 전용 대검으로 멕 워커 전용 톱과 도끼, 가지치기 칼의 효율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출력이 훨씬 더 높은 멕 나이트들은 멕 워커가 베어 놓은 통나무를 옮기고 쌓는 일을 맡았다.
- 넘어가요!
- 피해요!
강철 갑옷을 입은 거대한 나무꾼들이 원시의 숲에서 소음을 일으키며 방어선 구축 공사를 하는 사이, 정찰병들은 최종 저지선 부근의 아름드리나무 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지지대를 만들었다.
지상에 있다가 멕과 괴수의 싸움에 휩쓸리면 흔적도 남지 않기 때문에 지상에서 몸을 피하는 것이 멕 파일럿들을 돕는 일이었다.
방어선 공사를 하고 남은 통나무로는 탐탐을 보호하기 위한 울짱도 만들었다.
괴수들의 흐름을 한곳으로 모는 다중 깔때기 모양의 방어선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찰병 일부가 반달 호수 지역을 에워싼 산의 능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이 지역에서 평지로 이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산의 능선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간간이 멈춰 망원경으로 골짜기와 평지를 훑었다.
‘아직까지 본격적인 움직임은 없나?’
웨이브의 징조가 나타났다 해서 곧바로 웨이브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 원시의 땅은 바다처럼 광대하고 인간의 영역은 바닷가 해변 모래사장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고작 모래사장에서 뛰노는 아이인 것이다.”
멕 나이트를 최초로 만든 대마법사 하이네켄이 한 말이었다.
변경 군단의 정찰병들은 이런 말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이 땅을 겪으면 겪을수록 이 땅에 대해 모르겠다는 말을 종종 하고는 했다.
똑같은 징조가 나타나도 그 진원지가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지, 1,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지, 10,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이 멕 나이트를 보유하고 나서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지만,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원시의 땅 저 깊은 곳까지 단숨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간은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이 땅의 가장자리를 갉아 들어가 뿌리를 내리면서 안으로 서서히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망원경으로 서쪽을 살피던 정찰병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동료를 불렀다.
“저기 좀 봐!”
“왜?”
정찰병은 동료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손으로 서쪽 방향을 가리켰다.
다른 정찰병은 자신의 망원경을 들어 반달 호수 지역 서쪽 골짜기를 집중해서 살폈다.
“아!”
골짜기 입구에 있는 숲의 나무들이 거세게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자연스럽지 않은, 나무 밑동에서 무언가가 일부러 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격렬한 나무의 흔들림이 물결처럼 점점 다가왔다.
“왔다!”
정찰병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탐탐의 등에 실어 놓은 커다란 마나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탐탐-
탐탐이 장난치려고 무전기 사용을 못하도록 몸을 흔들며 앞다리로 가슴을 쳤다.
정찰병은 그런 탐탐을 진정시키고 통신을 시작했다.
“여기는 남쪽 팀, 여기는 남쪽 팀, 캠프 나와라!”
[여기는 캠프, 말하라.]
“서쪽 골짜기 입구 숲이 흔들린다! 방금 전 시작됐다! 서쪽 골짜기 입구 숲이 흔들린다! 계속 흔들린다!”
[알았다. 현 위치에서 대기할 수 있나?]
“가능할 것 같다.”
[그러면 당분간 거기 머물며 상황 보고하도록.]
“알았다!”
보고를 마치고 한숨 돌린 정찰병은 이 근처에서 안전하게 은신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면서도 웨이브의 움직임을 관찰하느라 간간이 망원경을 들었다.
탐탐-
탐탐-
“가만있어 봐. 당분간 조용히 지내자, 우리. 알겠지?”
탐··· 탐···
탐탐이 알아들었다는 듯 북소리를 작게 했다.
***
반달 호수 지역 서쪽에서 처음 목격된 웨이브는 곧바로 동쪽 입구까지 오지 않았다.
일단 호수 남쪽의 넓은 평원을 어느 정도 채운 다음에야 압력에 밀려 동쪽 입구로 빠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동물과 괴수들이 먼저 서쪽에서 온 웨이브에 밀려 새로운 웨이브를 형성하며 동쪽 입구로 오게 된다.
정찰병들은 남쪽 팀을 제외하고 모두 방어선으로 복귀했다.
멕 나이트와 멕 워커는 Y자 하단 부분 - 깔때기 밑으로 빠져 나오는 길목에 중대형 괴수를 안전하게 상대할 수 있도록 방벽을 보강하는 공사를 해 나갔다.
- 나무창도 최대한 많이 만들어 줘요.
- 알겠습니다, 캡틴.
루산의 요구에 멕 워커들이 나무를 베고 끝을 뾰족하게 깎아 나무창을 계속 만들었다.
짧은 것은 3미터 정도 되는 나무 말뚝, 긴 것은 10미터가 넘는 장창이었다.
모든 괴수가 바실리스크처럼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멕 나이트가 사용하는 나무창은 꽤 유용했다.
그렇게 루산의 팀에서 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나가는 사이, 괴수들이 들어오는 골짜기 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며칠 만에 반달 호수 남쪽 평원을 채웠다.
그리고 마침내 평원에 살던 동물들이 그 압력에 밀려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작은 동물들이었다.
“흐흐흐! 얼른 지나가라, 아가들아.”
돈 안 되는 동물들은 관심 없었다.
작은 동물들은 나무 바리케이드 밑을 통과해 지나갔다.
더 큰 동물들과 소형 괴수들은 깔때기 통로로 모여 한참 동안 정체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로부터 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서쪽에서 땅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쿠쿠쿠쿠쿠쿵-
[드디어 오는구나!]
[어디, 돈 좀 벌어 볼까?]
멕 나이트 몸체를 통해 전해질 정도로 강렬한 땅의 울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잔뜩 긴장한 파일럿들이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허세를 부리며 소리쳤다.
“적당히 먹고 버릴 건 버려요. 욕심내다간 배 터지니까!”
루산이 소리쳤다.
[일단 배 터지게 먹어 보고!]
[크크크!]
[온다!]
쿵쿵쿵쿵쿵쿵-
웨이브가 밀려왔다
선두는 뿔이 세 개 달린 중형 괴수 트리케였다.
옆에 나무창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루산은 깔때기 출구로 가장 먼저 빠져나온 트리케의 뿔을 잡아 올려 가슴에 3미터짜리 나무말뚝을 벼락같이 찔러 넣었다.
푹!
심장을 제대로 찔렀다는 느낌이 왔다. 온몸이 짜릿짜릿했다.
꾸억!
달려오던 트리케의 묵직한 무게에 거대한 멕 나이트가 뒤로 밀렸다.
멕 나이트는 옆으로 얼른 한 발짝 옮기며 버둥거리는 트리케를 놓아 버렸다.
가슴에 말뚝이 박힌 트리케는 관성에 의해 그대로 날아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집안이 망한 뒤 더욱 강렬하게 귀족적 품위에 집착해 온 루산은 이때만큼은 다 벗어던지고 원시의 거인 전사가 되어 억눌린 분노와 욕망을 터뜨렸다.
일격에 원시의 괴수를 쓰러뜨린 거인 전사가 트리케의 타액과 체액을 뒤집어 쓴 채 호기롭게 외쳤다.
- 한 마리!
저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