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 멕을 가져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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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길이 3미터가 넘는 트리케의 뿔을 잡고 몸통을 뒤집은 뒤 드러난 목을 대검이 아닌 멕 전용 단검으로 따 버리는 에센 - 그가 탑승한 멕 나이트 - 의 움직임은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였다.
중형 괴수 도살자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단검에 깊이 베인 트리케의 목에서 피가 뭉클뭉클 솟아나 멕 나이트의 몸체를 흥건하게 뒤덮었다.
그러나 에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왓하하하! 이게 다 돈이로구나!]
다른 멕 나이트들의 모습도 에센의 멕 나이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타액과 체액으로 뒤덮여 움직일 때마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기사들이 변경 군단 파일럿을 똑같은 기사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꺼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돈벌이를 위해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변경의 파일럿.
기사들의 눈에 이들은 기사가 아니었다. 그저 돈을 위해 명예를 포기한 용병일 뿐인 것이다.
변경 군단으로 흘러 들어온 멕 나이트 파일럿들 대부분은 기사 출신이라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다 체념하고 점점 익숙해져 어느새 피와 오물을 묻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다.
오히려 성과 보상금이 들어온다는 생각에 반가워하기도 한다.
에센처럼.
텅!
달려오던 트리케 한 마리가 다른 트리케의 몸통을 뒤집고 목을 따느라 자세를 낮추고 있는 에센의 멕 나이트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다.
뿔이 부러졌지만, 트리케의 돌진은 개척촌의 어지간한 건물은 죄다 부수고 지나갈 정도로 위력적이라 멕 나이트가 옆으로 기우뚱하다 완전히 넘어갈 뻔했다.
잔걸음을 재게 놀려 겨우 쓰러지지 않은 에센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놈이!]
[크크크! 뭐 하는 거야, 에센? 옆구리에 구멍 난 거 아니야?]
[시끄러!]
에센은 자신에게 모욕감을 안긴 트리케의 숨통을 단숨에 끊는 것으로 복수를 마쳤다.
잠시 웨이브가 약해지자 루산이 말했다.
“이제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쉬어요. 에센 먼저!”
[난 아직 할 수 있어!]
“먼저 쉬어요! 웨이브는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오늘만 하고 말 거에요?”
[쩝. 알았어.]
에센은 계속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괜히 켐니츠 꼴이 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파일럿들은 돌아가면서 쉬었다. 밖으로 나가 봐야 벌레만 물리니 멕 나이트 안에서 축 늘어져 있는 것이 편했다.
동료들이 괴수와 싸우고 있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쉴 수 있어야 변경의 파일럿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세 시간씩 쉬다가 교대했다.
웨이브가 끝날 때까지는 이렇게 지내야 했다.
편히 잠잘 수도 없는 괴로운 기간이지만, 이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잠잘 시간이 적을수록 돈을 더 버는 것이었다.
어느새 저지선의 깔때기 통로 바깥쪽에는 트리케 수백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사실 쓰러져 있는 것들보다 지나가게 보내 준 것들이 더 많았다. 멕 나이트 네 대로 모두 잡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막으려 했다면 방벽이 부서졌을 것이다.
“멕 워커는 쓰러진 녀석들을 옆으로 치워요.”
웨이브가 강하게 밀려 올 때 멕들이 자칫 걸려 넘어질 수도 있었다.
아직은 괜찮지만, 피로가 누적되고 정신을 못 차릴 때 넘어지면 괴수들에 의해 밟히고 받히고 채이고 뜯겨 죽을 수도 있었다.
- 알겠습니다, 캡틴!
멕 워커들이 트리케의 뿔을 잡고 질질 끌고 저지선 통로 좌우로 옮겼다.
멕 워커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절단용 칼로 트리케의 가슴을 갈라 생명 구슬을 채취했다.
조심스럽게 분해하고 각 부위별로 부속물을 수거하는 작업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웨이브 시즌에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럴 가치가 있는 괴수도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멕 워커는 시간이 나는 대로 쓰러진 괴수가 통로를 막지 않도록 옆으로 치우고, 가치 있는 부속물을 채취하거나 추출하고, 나무창을 새로 만들어 보충하고, 부서진 방벽을 보수했다.
멕 워커 파일럿 또한 웨이브 기간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들은 잡은 괴수만큼 일정한 비율로 성과 보상금을 받기 때문에 멕 나이트들이 보다 많은 괴수를 잡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돌아가면서 교대로 쪽잠을 자고, 잠깐 멕에서 내려 용변을 보고, 빨리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급하게 배를 채우고는 다시 멕에 올라탔다.
트리케 다음으로는 머리가 돌처럼 단단한 프로토 떼가 몰려왔다. 정통으로 부딪치면 멕 나이트의 장갑이 우그러질 정도로 단단하고 힘이 센 녀석이지만, 루산 일행은 이 정도 괴수에 당하지 않았다.
역시 적당히 흘려보내면서 잡을 수 있을 만큼 잡았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벨로키는 탐탐을 닮았지만, 탐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나운 녀석이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고 매우 빨라 개척촌에 이 녀석 하나만 들어가도 온통 피바다가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괴수인데 멕 나이트가 아니면 사실상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루산은 트리케, 프로토와 달리 이 녀석들을 최대한 흘려보내지 않고 잡으려 애썼다.
녀석들을 저지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던 파일럿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잔 파일럿들에게는 그야말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이럴 때는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웨이브 시즌을 맞이할 때마다 중고 멕을 한 대 살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니까.]
제프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덤비는 3미터짜리 벨로키의 목을 날리며 말했다.
[또 그 소리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니까.]
제프의 말에 하겐이 핀잔을 주었다.
그는 강철 다리를 물려고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무모한 벨로키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자기보다 덩치 큰 괴수도 무리 지어 사냥하던 습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하겐은 주제도 모르고 사납게 달려드는 벨로키 무리를 푸르스름한 빛이 일렁이는 대검으로 일거에 베어 버렸다.
촥!
벨로키의 머리가 후두두 떨어졌다.
“아함~ 그게 왜 쓸데없는 짓이에요? 분배 비율이 확 높아지는데.”
끼야아!
루산이 벨로키의 목을 움켜잡고 가슴에 나무 말뚝을 박으며 대화에 가담했다.
졸음도 몰아내야 했고 또 평소 관심이 많던 주제였던 것이다.
웨이브 시즌이 돌아와 이렇게 많은 괴수를 사냥하면 멕 나이트 파일럿은 엄청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도 않았다.
괴수의 부산물로 얻은 수입이 그것을 잡은 파일럿에게 모두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달라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군단 본부에서 10 중에 8을 가져간다.
평소 괴수를 잡지 않을 때에도 급료를 주고 각종 편의를 제공해 주는 명목으로 떼 가는 것이다.
나머지 2로 멕 나이트 파일럿과 지원 요원들이 나눠 갖게 된다. 물론 멕 나이트 파일럿이 가장 큰 몫을 가져가지만, 이미 8을 떼 가고 남은 것으로 나누기 때문에 상실감이 상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명예 대신 돈을 택한 멕 나이트 파일럿에게는 돈이 곧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척도이기 때문에 군단 본부에서 떼 가는 8은 무척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8을 떼 가는 명목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멕 나이트였다.
이것은 변경 군단이 소유하는 기체이지 파일럿 개인의 물건이 아니었다.
루산과 동료들이 지난 며칠 동안 이토록 많은 괴수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멕 나이트 덕분이었다. 맨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내가 멕 나이트를 보유한다면?’
변경 군단의 파일럿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는 문제였다.
실제로 분배 문제 때문에 민간 사냥 팀으로 가는 파일럿들이 존재하다 보니 변경 군단에서는 그와 관련된 규정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자신의 멕을 소유한 파일럿에게는 군단 본부에서 떼 가는 8에서 6을 돌려준다.’
이 얼마나 명예로운 대우인가!
자신의 멕 나이트가 없다면 10 중에 8을 떼 주고 남은 2로 지원 팀과 나눠야 한다.
자신의 멕 나이트가 있으면 10 중에 6를 갖고 2로 지원 팀과 나눠 갖는다.
멕 나이트를 보유한 파일럿은 사냥 수입의 60퍼센트를 우선적으로 보장해 준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급료는 똑같이 받고, 사냥 팀과 나누는 비율도 똑같았다.
이 조건을 보고 혹하지 않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거 다 허상이라니까. 생각해 봐. 멕 나이트가 한두 푼이야? 돈 많아? 아니면 빚내서 살 거야?]
하겐의 말에 루산은 움찔했다.
빚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그래, 어찌어찌해서 길 가다가 멕 나이트 한 대 주웠다 치자. 이제 군단의 지원을 못 받게 된다는 거야. 알아서 정비 요원 써야지. 고장 나면 내 돈으로 부품 사서 수리해야 해. 저번에 기억나? 바실리스크 때문에 멕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잖아.]
“그랬죠.”
[그거 수리비 엄청 나왔어. 나는 잔소리 조금 듣고 끝났지. 다 군단이 해결해 주니까. 그런데 만약 그게 내 것이었다 쳐 봐. 감당할 수 있겠어?]
“음!”
[그리고 우리 일이 기체를 좀 험하게 써? 몸체와 장갑 사이에 피가 스며들어 굳으면 이거 닦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이거 관리하는 거? 보통 일 아니야. 정비 요원 서너 명은 고용해야 할 걸?]
“쩝!”
[만약 심각한 손상을 입어서 수리하는 데 오래 걸린다고 해. 그동안은 일 안 할 거야? 그러면 그때만 군단 멕을 빌려 탈 거야? 빚을 내서 멕을 샀는데 그런 일을 당해 봐. 쓰지도 못하는 멕 때문에 이자는 계속 나가고 분배는 전과 똑같이 받고······.]
“으으! 끔찍하네요.”
[그럼! 신경 쓸 일이 많다니까. 잘못하면 개미지옥 같은 빚구덩이에 빠지지. 헤어날 수가 없어. 그러니 딴 생각 말고 멕 아끼지 말고 열심히 사용해서 많이 잡자고! 그게 돈 버는 거니까.]
하겐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군단의 멕을 이용하는 것은 장점이 상당히 많았다.
수리와 정비에 자신의 돈을 쓰지 않아도 되고, 파손이 커도 다른 멕을 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멕의 가격, 파일럿의 실력, 사냥한 괴수의 가치에 따라 멕을 소유하는 것이 이익일 수도 있었다.
멕을 거의 훼손 없이 타면서 많은 괴수를 잡을 수 있는 실력자라면 자신의 멕을 보유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변경으로 오는 멕은 다 중고잖아.’
괴수의 타액과 체액으로 범벅이 되고 진창에 빠지는 게 일상인 변경에서 따끈따끈한 신품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중고 멕으로도 괴수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대출 이자도 갚아야 하고 상속세도 납부해야 하고 사돈네에 진 빚도 갚아야 하는 루산은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함~”
어느 쪽이 더 나은지 판단하려면 정확한 계산이 필요한데 지금은 너무 졸렸다. 그리고 또 괴수와 싸워야 했다.
무엇보다 아직 대형 괴수는 출현하지도 않았다.
일단은 군단이 제공해 준 멕 나이트를 아끼지 말고 – 내 것이 아니니까 - 마구 사용해서 죽지 않고 많은 괴수를 잡는 것이 중요했다.
촥!
잠이 밀려왔지만, 루산은 정신을 차리고 노란 빛이 일렁이는 대검으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벨로키들을 베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