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기꺼이 도와야지
***
“다들 조심해! 어이, 거기 비켜! 위험해!”
인부들이 크레인을 이용해 화물 열차에 실려 온 무거운 짐을 특수 제작된 대형 수레에 실었다.
쿵!
얼마나 무거운지 수레가 그대로 주저앉을 듯이 아래로 푹 꺼졌다.
그러나 평소 엄청난 양의 괴수 부산물과 개척 건설 자재를 실어 나르는 대형 8륜 수레는 다행히 커다란 금속 덩어리의 무게를 버텨 냈다.
“이랴!”
붐부움-
몰이꾼의 재촉에 코뿔소를 닮은 거대한 짐승이 낮은 관악기 소리를 내며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원시의 땅에서 살던 대형 초식 괴수로 성질이 비교적 온순하여 변경에서 무거운 짐을 끌도록 길들여진 세로스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붐붐 소리를 낸다고 하여 붐붐이라고 불렀다.
붐붐이 걸음을 내딛자 집채만 한 짐을 실은 수레가 움직였다.
이번에 도착한 짐은 붐붐 수레 네 대 분량이었다.
델타 기지의 정비부장 바르통이 변경 제5구역과 제7구역의 멕 나이트 시장을 샅샅이 뒤져 구한 물건들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운반의 편의를 위해 멕 나이트 몸체는 부위별로 나뉘어 들어왔고, 이것을 델타 기지까지 운반하는 데는 델타 기지의 붐붐 수레가 사용되었다.
“이 정도도 못 하게 하면 빡빡해서 어떻게 살아? 그 대신 한가할 때 이용한다잖아. 밥 살게.”
곤란한 표정을 짓는 관리부장을 밥으로 매수한 바르통은 공짜로 벌써 수십 번을 이용했다.
사실 기지 대장 호른 영감이 못 본 척 넘어가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루산이 자신의 멕을 소유하려 한다는 것, 그 멕을 바르통과 델타 기지 정비부 요원들이 조립하려 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바르통은 호른 영감에게 근무에 지장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멕 조립 작업을 시작했다.
“영감님이 이런 일을 순순히 허락해줄 줄은 몰랐네.”
포장으로 가려진 거대한 물건이 붐붐 수레에 실려 정비소로 들어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루산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지켜보던 켐니츠가 말했다.
“정비부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 말릴 이유가 없지. 델타 기지 정비부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잖아.”
“실력 보여서 뭐 하게요?”
“새로운 수입의 원천이지. 민간 사냥꾼들 멕이 여기까지 들어왔다가 퍼지면 조립 능력까지 갖춘 델타 기지 정비소에 믿고 맡기라고 하는 거지.”
민간 사냥꾼들이 변경 군단의 개척지를 마음대로 활보하지는 못한다. 다만 허가를 받거나 요청을 받아 사냥할 수 있었다.
괴수 퇴치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허가가 어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개척지가 원시의 땅 안으로 들어갈수록 민간 사냥꾼들도 따라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르통이 3만 골드 안쪽으로 멕 나이트 조립에 성공하면 많은 파일럿들이 관심을 갖지 않겠어?”
모든 파일럿은 자기 멕을 가지고 싶어 한다. 멕 가격이 워낙 비싸 엄두를 내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3만 골드면, 보통 사람에게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지만, 멕 파일럿으로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한 액수였다.
“문제는 성능과 유지비야. 조립을 했는데 파워가 약하거나 계속 고장이 나면 다들 코웃음을 치겠지. 그럼 그렇지, 하고 비웃을 거야. 하지만, 성능이 최소한 군단이 보유한 중고 멕 정도만 된다면 누구나 고민해 보지 않겠어?”
“음!”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되면 델타 기지 정비부의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되는 거지. 호른 영감도, 정비부장 바르통도 손해 보는 게 없어. 실패하면 비웃음 한 번 사고 하던 일 하면 되는 거고, 성공하면 대박이지.”
“내가 실험 쥐가 되는 셈이네?”
“하하, 그렇지.”
루산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멕 보유 시도가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 지켜본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절대 그렇게 돼서는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비웃음은 정비부장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후유, 무한 책임을 못 박아 둬서 다행이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약속했던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조립에 문제가 있다면 바르통이 무한 책임을 지기로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루산은 불안감에 제대로 자지 못했다.
무려 3만 골드나 대출을 받아서 진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한 책임이니 뭐니 말을 해도 실패하면 그 돈을 날리는 것이라 자다가도 벌떡벌떡 깼다.
그러던 어느 날 노바에서 바덴이 보낸 편지가 왔다.
이제는 긍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를 기대하며 편지를 개봉했는데 웬걸······.
루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2만··· 골드!”
2만 골드를 벌었다는 소식도 아니고 2만 골드를 추가로 빚져야 한다는 말에 루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빚을 지고 사업하는 게 아니었어! 아니, 사업이란 것 자체를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자책 다음에는 원망의 마음이 솟구쳤다..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 땅땅 칠 때는 언제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루산은 자신이 변경 땅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노바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이 범죄자가 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책과 원망으로 밤을 꼴딱 새운 뒤 멀리서 동이 터 오자 낙관적 전망과 합리화가 시작되었다.
‘하아! 처음부터 잘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나중에 크게 맞을 거, 처음에 미리 맞은 셈 치자. 그동안 노력해 온 본인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 다시는 이런 일을 격지 않으려고 백배는 더 노력할 테지.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하면 1만 골드는 그냥 날리는 것이 되잖아.’
그러면서 대출 가능 한도를 산출해 보았다.
“어디 보자. 2만 골드 더 빌리면 은행 빚만 6만 골드. 납부해야 할 상속세가 3만 2천 골드. 남은 상속세를 순전히 은행 빚으로 낸다면 이제 자작나무숲 장원은 은행 것이나 마찬가지구나!”
허탈함과 허무함이 가슴을 쓰리게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인생의 밑바닥을 찍어 본 사람 특유의 배짱이 솟아났다.
‘아니, 자작나무숲 장원이 원래 내 것도 아닌데 그거 잃는다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잃으면 잃는 거지. 내가 남 덕 보고 살았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리고 다 날아가더라도 자신의 멕 나이트 한 대는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 역시 완성돼 봐야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깟 상속세, 벌어서 내면 될 거 아니야? 그러면 빚이 6만 골드밖에 안 돼! 벌써부터 빚진다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
현실에서 만져 본 적도 없는 6만 골드라는 거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루산은 지금 이 배짱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편지를 썼다.
<···아버지가 참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가장 힘든 사람이 아버지였을 텐데 가족과 친지들의 원망 속에서 돌아가실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싶은 생각에 어젯밤은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미스 고슬라를 알게 된 이후 의도하지 않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혼자만의 화해를 하게 되는군요.
2만 골드!
해 봅시다!
당신의 열정을 응원합니다!
단, 이점은 알아 두세요.
자기 꿈이 소중하다면 남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 인간을 잡지 못했지만, 나는 끝까지 잡을 겁니다.>
루산은 마지막 문장이 품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 말도 하지 못한다면 등신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클라크.”
“네, 기사님!”
“아침 일찍 이거 부치렴.”
“네! 그런데 기사님,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출근하는 거지.”
“옷차림이······.”
그제야 루산은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
속옷만 입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크가 루산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기사님, 괜찮으신··· 거죠?”
“그럼! 요새 너무 더워서 멕 안에서도 속옷만 입고 일하기도 하거든. 그래서 깜박했네. 하하하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루산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클라크는 루산이 이렇게나 정신없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사업이란 건 정말 무서운 거구나!”
바덴의 편지를 읽고부터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밤새 거실을 서성이다가 아침밥을 안 먹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는 주인을 보고 소년 집사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
시련은 확실히 사람을 단련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루산은 자신에게 놓인 상황을 수없이 돌아보며 목표를 더욱 뚜렷이 세웠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재산, 실패해도 손해 본 것은 아니고 성공하면 좋은 것이다.’
‘나는 변경에서 내 판단과 노력으로 성공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 별장 사업과 변경의 멕 나이트 파일럿, 이 두 가지 일을 상호보완적으로 끌고 가기로 했다.
별장 사업은, 바덴이 구상한 계획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
필센 제국은 사회 개혁에 성공한 이후 점점 부유해지고 있었다. 제국, 특히 수도에 부자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수도 근교의 별장 사업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다만 문제는 귀족이나 부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다 보니 초기 투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든다는 것과 사업 경험이 없다 보니 미숙한 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바덴은 똑똑한 사람이고 자신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 부족은 극복할 것이다.
문제는 자금.
‘변경에서 많이 벌어서 별장 사업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메우며 버텨 본다!’
멕 나이트 조립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괴수 사냥 수입이 전보다 열 배는 늘어날 것이다.
‘나중에 별장 사업이 잘 되면 괴수 사냥에 목을 매지 않고 개척촌 안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위로 올라가 큰 그림을 보며 큰돈을 벌 것이다!’
루산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려 나갔다.
그런데 그가 큰 그림에 관여할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루산은 반달 호수 지역에 나가 있는 10일 동안은 상속세 미납분과 대출 이자를 생각하며 미친 듯이 괴수를 잡았고 델타 기지에서 근무하는 5일 동안은 순찰 범위를 늘리며 소형 괴수까지 꼼꼼하게 때려잡고 있었다.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잊고 밝은 앞날을 기약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호른 영감이 루산을 불렀다.
“캡틴, 혹시 아라드 왕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피란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언뜻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호른 영감은, 그 정도면 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달 호수 지역을 완전히 소탕하려면 한참 남았지요?”
“맞습니다. 워낙 넓고 숲이 많아 1년 안에 소탕하는 것도 벅차 보입니다.”
“음,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 통치자께서는 그때까지 기다리실 수 없나 봅니다. 황제 폐하께서 매일 국경 지방의 혼란을 해소하라고 불호령을 내리신다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번 회의 때 의견을 올렸습니다.”
루산의 눈이 반짝였다.
윗사람들이 모이는 회의석상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호른 영감이 어떤 아이디어를 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지금의 ‘선 소탕 후 이주’ 방식으로는 난민을 수용할 수 없다. 먼저 거점을 확보해 방벽을 건설하고 이주민을 수용한 뒤 보호하는 방식, 즉 ‘선 이주 후 보호’ 방식을 채택한 뒤 개척지를 점점 확장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
아주 위험한 이야기였다.
원시의 땅에 사는 괴수들은 멕 나이트가 아니면 퇴치가 거의 불가능하여 해당 지역을 깔끔하게 소탕하기 전에 개척민을 밀어 넣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반달 호수 지역은 넓기 때문에 거점을 하나만 세울 필요는 없다. 개척민을 보호할 역량이 있고 개척촌을 건설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거점을 세울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지요.”
“음!”
루산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했다.
반달 호수 지역은 일개 전진 기지 대장이 독점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다.
본부에서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른 영감은 어떻게든 그 좋은 땅을 차지하고 싶어 한다.
‘알짜배기 땅을 선점하려는 것이구나!’
난민을 빠르게 수용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선 소탕 후 이주’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위험하지만, ‘선 이주 후 보호’ 방식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호른이 말했다.
“내 의견이 채택되었지요.”
“아!”
“그래서 말인데······, 캡틴께서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호른 영감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루산은 변경 5년 차의 캡틴, 그 웃음에 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색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야죠.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루산은 변경 제8구역의 능구렁이 호른 영감이 그리는 그림에 기꺼이 한 발 담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