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왕이면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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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타 기지에 있는 주점 황금 마차.
반달 호수 지역으로 파견을 간 요원들이 많아 손님이 많지 않은 이곳에서 루산과 켐니츠가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필요한 루산은 켐니츠에게 호른 영감의 제안을 말해 주었고 이야기를 들은 켐니츠가 한잔하자고 해서 온 것이다.
“말하자면 전진 기지의 전진 기지인 셈인가?”
술잔을 내려놓은 켐니츠가 촌평했다.
델타 기지 자체가 8군단의 전진 기지인데, 전진 기지를 옮기지 않으면서 새로운 전진 기지를 만들려는 호른 영감을 비꼬는 말이었다.
호른 영감은 델타 기지와 인근 개척촌에 대한 세금 징수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델타 기지 일대가 아직까지 확실한 안전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하지 않는다고 문제될 것은 없지만, 새것을 탐내면서도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하는 호른의 욕심에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이다.
“그런 셈이죠.”
루산이 입에서 술잔을 떼며 대답했다.
“전진 기지를 이전한다면 본부에서 지원해 주겠지만, 기지를 그대로 두고 거점을 마련하려 한다면 본부 지원은 없는 거 아닌가?”
개척 지역 하나를 완전히 안정시키고 새로운 위험 지역을 개척하려는 전진 기지에는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새로운 전진 기지 건설을 지원하고 기지 대장에게는 상당한 액수의 포상금과 각종 혜택을 주는 것이다.
“반달 호수 구역은 기존의 개척 방식에서 벗어난 특별 지역이라서 혜택이 아주 없지는 않는 것 같아요. 개척 거점마다 본부에서 멕 워커 두 대를 배정해 준다고 하네요.”
루산의 말에 켐니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안 주는 것보다야 낫지만, 고작 그 정도로 뭘 어쩌라고?”
“대신 영감님이 자기 주머니를 확실하게 열 생각인가 봐요.”
“어떻게? 얼마나?”
“델타 기지의 멕, 정찰대, 지원대 전부, 그리고 관리부의 절반을 데려가랍니다.”
켐니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그럼 델타 기지는? 아직 안전 지역이 아닌데?”
“용병을 고용하겠다네요.”
델타 기지뿐 아니라 본부에서도 필요하면 민간 파일럿이나 정찰병을 고용하고는 했다.
그래서 용병 고용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델타 기지의 인력을 완전히 대체할 규모를 고용한다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물자도 다 대주고 개척촌에서 뽑은 인력도 200명 지원해 준답니다.”
“오! 그 정도면 주머니를 여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말년에 인생의 승부를 거는 거 아니야?”
“영감님 주머니 깊이를 모르니 인생을 건 승부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지원을 해 주는 건 확실하죠.”
멕 나이트 6대
멕 워커 8대(2대는 본부 지원)
정찰병 30명
관리부 요원 10명
개척 인력 200명
여기에 붐붐 수레 2대, 짐마차 4대를 사용할 수 있고 필요한 물자를 모두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 이주민 일인당 20골드씩 나오는 개척 장려금을 재량껏 사용하라는군요.”
필센 제국은 개척 주체에게 개척 장려금을, 이주민에게 정착 지원금을 지급했다.
어차피 정착에 성공하면 세금으로 다시 거둬들일 돈이기는 하지만, 제국의 재정이 그만큼 넉넉하다는 증거였다.
“우와! 열심히 하라고 영감이 인센티브까지 주네. 정말 단단히 마음먹었어.”
켐니츠는 호른 영감에 대한 비웃음을 완전히 거두고 감탄했다.
새로운 개척 거점에 대한 투자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필요한 물자는 호른 영감이 모두 지원하기로 했으니 루산이 마음만 먹으면 개척 장려금은 고스란히 그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
켐니츠가 부러운 눈으로 루산을 쳐다보았다.
“그렇죠. 영감님이 정말 큰 투자를 하고 있는 거예요. 본부에서 직접 개척에 나설지 어떨지 몰라도 위험 지역 개척에 자기 주머니를 이 정도나 털어 투자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영감님이 이 일에 이렇게나 공을 들인다면 나도 조건을 좀 걸어 볼까 싶더라고요.”
“무슨 조건?”
“세금의 한 5퍼센트 정도만 떼어 달라고 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진 기지 징세권이 보통 5년에서 10년은 가니까 1만 명 정도 정착에 성공시키면 그게 얼마에요?”
“하지 그랬어? 영감이 아무리 돈이 많고 이 바닥에 대해 빠삭하게 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캡틴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 5퍼센트 정도는 충분히 떼 줄 것 같은데? 더 열심히 개척할 동기 부여도 되고.”
“근데 안 했어요.”
“아니, 왜?”
“어차피 사냥하고 개척 지원금 받으면 수입이야 보장되는 거고, 이번에는 시스템과 노하우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하려고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돈 대신 믿음을 사 볼 생각이에요.”
“호른 영감의 믿음? 믿으니까 맡긴 거 아니야?”
“경력과 직책을 믿은 거지 날 믿은 건 아니죠.”
“그게 그거 아닌가?”
“다르죠. 내가 아니라 다른 캡틴이었어도 똑같은 부탁을 했겠죠.”
“하긴······.”
루산은 이번 기회에 호른뿐 아니라 8구역 높은 사람들의 믿음을 사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까지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앞으로 할 일이 많아요. 잘 부탁해요.”
“내가 더 잘 부탁해야지.”
루산과 켐니츠가 술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몇 잔 더 마시고 그들은 일어섰다.
그리고 계산은, 당연히 켐니츠가 했다.
“한잔하자고 한 사람이 내는 거 맞죠?”
1만 골드, 2만 골드, 3만 골드··· 거액은 턱턱 쓰면서도 1골드도 안 하는 술값에는 도무지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오랜 습관의 힘은 무서웠다.
***
루산은 호른 영감과 반달 호수 지역을 여러 번 답사하여 새로운 거점이 들어설 자리를 확정했다.
반달 호수 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멀지 않고 남쪽에서 발원하여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강줄기 옆에 있는, 숲과 초지와 높지 않은 야산들이 적당히 뒤섞여 있는 땅.
높은 봉우리 위에서 호른 영감이 그 땅을 지목했을 때 루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은 모르지만, 저쪽 중앙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루산이 가리킨 곳은 수량이 풍부한 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지로 대규모 농토가 들어설 만한 곳이었다.
호른은 호기심 가득한 막내아들을 바라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루산을 쳐다보았다.
“그 땅도 좋지요. 그 땅 말고도 이 지역에는 좋은 땅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땅들로 들어가려면 다 저 땅을 지나야 하니까요.”
“아!”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안쪽으로 단번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아무리 터가 좋아도 괴수에 둘러싸인 채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허허허, 저 자리에 거점을 마련한 뒤에 여건이 되면 캡틴이 찍은 곳도 개척해 보세요.”
“힘써 보겠습니다.”
호른 영감이 웃으며 하는 말이 그냥 한번 해 보는 소리인지 강력한 권유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루산은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호른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는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호른을 비웃거나 부러워하지만, 루산은 진심으로 그를 높게 평가했다.
용병 출신으로 변경 땅에서 살아남아 통치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관철시킬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간 실력, 마음속이 욕심으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을망정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품위, 그리고 원하는 목표를 기어이 달성하고자 하는 추진력.
재력은 그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른 영감이 고용한 용병들이 들어오면서 델타 기지 요원들은 본격적으로 개척 거점으로 이동할 준비에 돌입했다.
건설 인력을 포함하여 무려 250여 명이 지내야 하기 때문에 식량, 천막, 간이침대, 피복, 건축 자재들이 붐붐 수레에 산더미처럼 실렸다.
삐걱삐걱.
군단 멕보다 훨씬 낡은 멕을 타고 민간 사냥꾼들이 들어온 날, 델타 기지의 개척단은 멕 나이트의 호위를 받으며 반달 호수 지역으로 출발했다.
하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많이 내리지 않았음에도 도로가 포장되지 않은 지역이라 길이 금방 진창이 돼 버렸다.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가 푹푹 빠졌다.
“니미럴! 내 이럴 줄 알았다!”
건설 인력들이 욕을 퍼부으며 진창길에 빠진 붐붐 수레를 밀고 끌었다.
그들의 몸과 옷은 이미 흙탕물을 뒤집어써 엉망이었다.
- 액땜하는 셈 칩시다! 오늘은 도착하자마자 소 한 마리 잡을 테니 다들 힘을 내요!
이런 길을 멕이 밟고 지나가면 마차와 수레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파이기 때문에 루산은 길에서 떨어져 걸으면서 외부 확성기를 통해 열심히 응원했다.
“제기랄! 지는 편하게 가면서 조용히 좀 할 것이지. 시끄러워 죽겠네!”
붐부우움-
루산은 자신이 욕을 먹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우중충한 날씨와 붐붐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개척의 어려움을 암시하는 듯했다.
***
루산이 몇 달 전에 동료들과 함께 웨이브를 저지한 방벽에서 2킬로미터쯤 서쪽으로 이동하니 천막이 몇 개 보였다.
미리 파견된 델타 기지의 전투 요원들과 개척 건설 담당 요원들이 머물러 있는 임시 숙소였다.
개척 건설 요원들이 멕 나이트와 정찰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 일대를 눈으로 살피고, 측량하고, 들어설 마을과 도시를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개척 거점의 이름은 델타2로 하겠습니다.”
개척 건설 요원들을 이끌고 있는, 자칭 노바 대학 토목과 출신 바우엔이 말했다.
루산은 노바 대학 출신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변경까지 흘러들어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은 거의 다 뻥이었다.
물론 친해지면 속사정도 털어놓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그 전까지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가 변경 8군단에서 10년 넘게 일해 왔고 델타 기지 개척촌 건설에 5년 넘게 관여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것 참 직관적인 이름이군요.”
루산의 삐딱한 말투에 바우엔의 눈썹이 꿈틀했다.
“캡틴께서는 이 이름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뭐, 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전진 기지 사람들이나 본부 사람들이 델타2라는 이름을 들으면 괜히 견제하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델타 기지에서 반달 호수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앉아 이득을 보려 한다! 이런 생각이 들 것 같네요. 시작부터 괜히 미움을 살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오호!”
듣고 있던 켐니츠가 과장되게 감탄성을 터뜨렸다.
사실 진심으로 감탄했다.
델타2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별 생각이 없었는데 루산의 말을 들으니 정말로 다른 전진 기지나 본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감탄성을 과장되게 낸 까닭은 개척 건설 요원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개척 건설 요원들은 자신들이 변경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투 요원들을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라고 욕하는 종자들이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종자들이었다.
그래서 루산이 초장에 기를 잡으려는가 보다고 생각해 호응해 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우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루산의 말이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캡틴께서 생각해 둔 이름이 있습니까?”
루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게 뭐 있겠어요? 방금 왔는데. 오다 보니 비가 그쳐 무지개가 예쁘게 걸렸던데 그냥 무지개 도시, 레인보우 시티로 하죠. 여기까지 오는 개척민들은 도살장으로 끌려오는 심정일 텐데 아무래도 델타2보다는 레인보우 타운이나 레인보우 시티가 좋지 않겠어요? 이왕이면 희망을 주자고요. 나중에 중심 도시가 생기면 레인보우 시티, 주변 개척촌은 무지개 색으로 이름을 지으면 되고······.”
“좋은데?”
켐니츠가 크게 맞장구를 쳤다.
바우엔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루산의 말에 설득당한 것이 억울했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단순한 전진 기지가 아니므로 전진 기지에 붙이는 부호 같은 이름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곳을 레인보우 시티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위에서 승인이 나야겠지만 말이죠.”
어쨌든 개척 거점의 이름이 정해지고, 개척 건설 요원들이 그동안 구상하고 설계한 내용에 대해 브리핑했다.
루산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아니, 그렇게 전문 용어를 써 가며 디테일하게 말해 봐야 못 알아들어요. 알아서 잘 하시겠죠. 전문가들이시니······. 나하고는 도시 방어에 대해 의논해 봅시다. 아무리 잘 지어 봐야 대형 괴수가 밀고 들어오면 폐허가 될 테니까.”
루산은 레인보우 시티에 도착한 첫날, 개척 건설 요원들의 기강을 세게 잡았다.
말과 지위로 사람을 조지는 것, 트리어가 무척 잘하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