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챙길 건 챙겨야지
***
기동 전단 멕 나이트와 정찰병들이 곳곳에 경계를 서는 가운데 루산은 트리어와 함께 알파 기지 개척단 숙영지를 둘러보았다.
현장은 처참했다.
짓밟힌 천막, 무너진 통나무 방벽, 찢어진 옷가지와 뼈만 남은 시체들.
루산은 당시의 참상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벨로키로군요.”
“그런 것 같지?”
“네.”
사방에 남아 있는 발자국들과 좍좍 찢어진 천막과 옷가지들이 딱 벨로키였다.
매우 빠르고 떼로 몰려다니며 대형 괴수도 사냥할 만큼 강한 공격성을 지닌 중형 괴수 벨로키 무리의 습격을 받았다면 알파 기지에서 파견한 멕 나이트 두 대로는 개척단 사람들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멕에 타 보지도 못하고 당했네요. 이건 좀 너무한데?”
며칠 전에 일부러 포석을 깨뜨리며 레인보우 시티를 지나간 멕이 다른 멕과 함께 멀쩡히 서 있었다.
이런 위험 지대에서 숙영지를 세울 때는 방어 체계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방벽을 세우고, 괴수의 침입을 알리는 알람 - 실에 방울을 달아 놓든, 보초병을 세우든, 가축을 묶어 놓든 - 을 설치하고, 즉시 멕을 탈 수 있도록 파일럿의 숙소를 멕과 가까이 둬야 한다.
“방어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거나······.”
루산은 뒷말을 삼켰다. 이미 죽은 사람을 모욕하는 말을 꺼내는 것은 품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리어는 거침이 없었다.
“이 미친 새끼들, 술 먹었어. 저쪽 가면 술병 굴러다닌다. 확인해 보니 한 놈은 변경에 들어온 지 세 달도 안 된 신입이래. 어느 부대에서 사고 치고 들어온 놈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대형 사고를 터뜨려 버리네. 뒈지려면 혼자서 뒈질 것이지.”
“후유!”
루산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변경으로 들어온 멕 나이트 파일럿들은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고를 쳐서 군에서 쫓겨난 경우가 많았다.
멕 나이트 두 대가 정상적으로 싸웠더라도 인명 피해가 상당했을 것 같지만, 전멸은 면했을 것이다.
“알파 기지 대장이나 캡틴은 뭘 한 거야? 위험 지역에 이런 놈을 보내다니! 2년 차나 되면서 같이 술 먹고 뒈진 놈도 한심하고. 에휴!”
트리어도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금세 표적을 바꾸어 루산을 째려보았다.
“멕 세 대가 전부냐?”
“네? 네.”
루산은 켐니츠에게 레인보우 시티를 맡기고 제프와 케르펜만 데리고 왔다. 정찰병도 다 남겨 놓고 왔다.
어차피 본부 기동 전단 정찰대가 있을 테니까.
“최대한 끌고 오라니까.”
“이게 최대한이에요. 이미 소멸된 거점 주변 소탕하는 것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 안전이 더 중요하죠. 오늘 개척민 들어오는 날이란 말이에요.”
“쩝. 어쩔 수 없지. 시작하자.”
이미 괴수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정찰병들이 이곳을 습격한 무리가 이동한 곳을 파악해 두었다.
감마 기지 개척단은 2대밖에 안 되는 멕 나이트를 보내기 어렵다며 빠졌다.
비난할 수는 없지만, 본부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다. 이 괴수들은 언제든 다른 개척 기지를 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2전대 멕 워커와 지원 팀 요원들이 뼈만 남은 사체를 수습하고 현장을 정리하는 가운데 소탕 작전이 시작되었다.
본부 기동 전단 2전대 멕 나이트 12대.
베타 기지 개척단 멕 나이트 1대.
레인보우 시티 멕 나이트 3대.
총 16대의 멕 나이트와 2전대 무장 정찰병들이 트리어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직 인간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강 옆에 원시의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16대의 멕 나이트가 넓게 벌려 서서 그 원시의 숲을 포위하듯 다가갔다.
높이 7미터나 되는 멕 나이트들이지만, 나무에 비하면 꼬마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멕 나이트 사이사이로 탐탐에 올라탄 정찰병들이 보였다.
그들은 갑옷을 입고 손에 금속 악기를 들고 있었다.
[시작한다!]
트리어의 명령에 모든 멕 나이트들이 일정한 보폭으로 전진하며 외부 확성기를 켜고 소음을 냈다.
- 애애애애애애!
- 삐유삐유삐유!
꽹꽹꽹꽹!
쨍쨍쨍쨍!
정찰병들도 쉬지 않고 금속 악기를 두드렸다.
탐탐들이 깜짝 놀라 펄쩍펄쩍 뛰었지만, 잠시 후 왠지 익숙한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잠잠해졌다.
- 끼융끼융끼융끼융!
- 애앵애앵애앵애앵!
촹촹촹촹촹촹!
땡땡땡땡땡땡!
귀가 터질 듯이 괴로운 소음에 원시의 숲이 들썩였다.
멕 나이트들이 잔뜩 긴장하며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은 멕 나이트 포위망보다 뒤로 물러서서 악기를 두드리며 따라 들어왔다.
동물과 괴수들이 소음과 거대한 강철 거인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웨이브 때 반달 호수 지역으로 밀려 들어왔다가 이 숲을 차지하고 있던 괴수들, 특히 벨로키들이 끼악, 끼악 소리를 지르며 대이동을 시작했다.
[조심해! 갑자기 대형 괴수가 덮칠 수도 있어! 나무 위도 잘 살펴!]
트리어가 대형이 유지되는지 살피며 주의를 주었다.
[좌측! 더 강하게 밀어! 이대로 가면 안 돼!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밀어!]
16대의 멕 나이트는 포위망을 유지한 채 북서쪽으로 사선을 그리면서 이동했다.
그쪽에 절벽이 있었던 것이다.
꽹꽹꽹꽹!
쨍쨍쨍쨍!
요란한 소음에 놀란 괴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다 멕 나이트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파일럿들은 간단히 베어 넘기며 전진을 계속해 나갔다.
[우측! 좌측! 폭 좁혀! 옆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아!]
멕 나이트들이 반원형을 그리며 폭을 좁혔다.
괴수들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고 멕 나이트를 공격하는 녀석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중형 괴수까지는 멕 나이트에 해를 가할 수 없었다.
빛이 일렁이는 마나 진동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괴수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마침내 저 앞에 숲의 끝이 보였다.
숲에서 쫓겨난 괴수들이 벼랑 위에 잔뜩 모여 있었다.
이번 사건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벨로키 떼는 물론이고 사나운 중형 괴수들이 밀려오는 다른 괴수들을 위협하며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 사이로 남다른 덩치를 자랑하는 대형 괴수들이 보였다.
쿠아아아!
시끄러운 소음을 피해 이동한 곳에 자잘한 괴수들이 귀찮게 모여들어 매우 짜증이 났는지 대형 괴수 하나가 가까이 밀려오는 괴수들을 날려 버렸다.
[젠장! 미커다! 미커에 타르보까지!]
트리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때요? 비싼 녀석들을 사냥할 기횐데!]
2전대 파일럿 하나가 트리어의 속도 모르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잘못하면 포위망 뚫리고 뒤에 있는 정찰병들이 죽는다고!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미커나 타르보 같은 대형 괴수가 달려와 부딪치면 멕 나이트도 튕겨져 날아간다.
대형이 무너지면 일껏 포위해 둔 중형 괴수들이 우르르 달아날지도 모른다.
트리어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루산이 미커 맡아!]
“예스, 커맨더!”
루산이 짧게 대답하며 포위망보다 조금 앞으로 나갔다.
[내가 중간에 있는 타르보를 맡는다. 오른쪽 타르보는 가우스가 맡아!]
[예스, 커맨더!]
2전대 소속 파일럿 가우스가 굵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루산과 마찬가지로 포위망보다 앞으로 나섰다.
루산, 트리어, 가우스의 멕이 앞으로 나서고 나머지 13대의 멕 나이트가 더욱 가까이 붙으며 그 뒤를 받쳤다.
쿵쾅쿵쾅!
마침내 숲을 벗어난 멕 나이트들은 힘차게 발을 구르며 절벽 위에 모여 있는 괴수들을 향해 나아갔다.
쿠에엑!
끼아악!
후어엉!
괴수들이 거대한 멕 나이트를 피해 물러나느라 난리가 났다.
그러다 공격성이 강한 벨로키들이 멕 나이트를 향해 돌진해 왔다.
루산은 노란 빛이 일렁이는 멕 나이트 대검으로 달려오는 벨로키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촥!
촥!
소형 괴수들은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꾸에엑!
어중간하게 몸의 일부만 밟힌 괴수들이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 절벽 위의 소란은 더욱 커졌다.
13대의 멕 나이트들은 포위망에 갇힌 괴수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촘촘하게 붙어 빛이 일렁이는 마나 진동 대검으로 벨로키를 비롯한 중형 괴수들을 사정없이 베어 넘겼다.
촤악!
쿵!
괴수의 피와 침이 허공에 퍼지며 멕 나이트의 몸체를 붉게 물들이고 절벽 위에 핏빛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13대의 멕 나이트가 절벽을 막고 몰이사냥을 하는 사이 루산, 트리어, 가우스는 이놈들 가운데 하나만 들어가도 개척촌이 몰살당할 수 있는 중형 괴수들을 잔챙이 잡듯 죽이며 중형 괴수들의 보스처럼 위압적으로 서 있는 대형 괴수에게 다가갔다.
멕 나이트보다 2미터는 더 큰 미커가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루산의 멕 나이트에 돌진해 왔다.
멕 나이트 허리까지 오는 벨로키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루산의 멕 나이트를 벅벅 긁고 있는 와중에도 루산은 벨로키들의 목을 쳐 날리며 미커를 최대한 손상 없이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차피 포위망은 완성되었으니 속도보다는 수입을 생각할 때였다.
머리를 잘못 공격했다가는 값비싼 마나 진동 대검이 단단한 머리뼈에 끼어 부러질 수가 있었다.
심장은, 몸이 워낙 두꺼워 공격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자칫 피가 다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출혈이 많은 베기보다는 찌르기. 옅게 찔러 승부를 낼 수 있는 곳은? 그래! 발바닥!’
루산은 두 발로 쿵쿵 달려오는 미커의 돌진을 왼쪽으로 살짝 움직여 피하며 대검으로 녀석의 무릎 관절을 베었다.
서걱!
돌덩이처럼 단단한 피부가 갈라지며 미커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쿵!
중소형 괴수들이 미커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산은 쓰러진 미커의 발바닥을 찔렀다.
츅!
대검이 두껍고 단단한 발바닥 피부를 뚫고 다리까지 쑥 들어갔다.
거대한 미커가 극심한 통증에 데굴데굴 굴렀다.
루산은 아까운 피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미커의 발바닥에 꽂힌 대검을 그대로 두고 다른 대검을 들어 트리어에게 다가갔다.
트리어 역시 손상 없는 사냥을 하느라 곧바로 처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울까요?”
[얼른 끝내!]
괴수 사냥에는 자존심을 따지지 않았다.
첫 번째는 안전, 두 번째는 돈.
루산은 트리어가 타르보의 주목을 끄는 사이 녀석의 뒤에서 뇌를 푹 찔렀다.
거칠게 트리어를 공격하던 타르보가 거짓말처럼 힘이 빠지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쿵!
[역시 제국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야!]
옛날부터 트리어가 루산을 갈굴 때 늘 하던 말이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그러나 지금은 친밀감을 보이기 위한 짓궂은 장난이라는 것을 루산은 알고 있었다. 부러움과 감탄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가볍게 반응하고 넘어갔다.
“쳇!”
[실력이 더 늘었구나.]
“커맨더한테 몇 년 동안 이가 갈리도록 갈굼당하니 이렇게 되더군요.”
[후훗, 그럼 내가 은인이네.]
“흥!”
두 사람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은 뒤 곧바로 가우스가 상대하는 타르보에 붙어 최소한의 손상만 입히고 쓰러뜨렸다.
루산에게 발바닥을 찔려 죽는다고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던 미커는 그 사이 축 늘어져 있었다.
대형 괴수를 빠르게 처치한 세 사람은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멕 나이트들과 함께 절벽 위에 몰아 놓은 중소형 괴수들을 모조리 잡았다.
엄청난 양의 피가 절벽 아래로 흘러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여기는 트리어다. 지원 팀은 당장 이쪽으로 오고, 캠프에 있는 수거 팀 요원들도 모두 이쪽으로 합류한다. 처리할 괴수들이 아주 많으니 용기는 넉넉히 준비하도록!]
[알았다. 곧바로 출동하겠다.]
사냥이 끝난 뒤에도 멕 나이트들은 수거 팀을 호위하고 이 일대를 경계하느라 각자의 거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돈 되는 것은 훼손되기 전에 철저히 챙겨야 하는 것이다.
잠시 멕에서 내린 루산은 절벽 끝에 서서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강 건너편 서쪽 평원을 바라보았다.
괴수의 사체와 피로 얼룩진 등 뒤의 풍경과 달리 아름다웠다.
한참 후에 지원 팀과 수거 팀 요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값이 비싼 괴수부터 해체해 부산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멕 나이트 요원들과 정찰병들, 지원 팀과 수거 팀 요원들은 자신들에게 떨어질 성과 보상금 생각에 희희낙락했다.
‘어젯밤에 우리 동료를 죽인 녀석들을 때려잡은 것인데······.’
누군가는 괴수에게 죽고, 누군가는 그 괴수를 잡아 돈을 벌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탓할 일은 아니었다.
“이거 누구 겁니까?”
지원 팀 요원 하나가 미커 발바닥에 꽂혀 있는 멕 나이트 대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이! 그거 내 거예요.”
루산이 얼른 다가가 자신의 비싼 대검을 챙겼다.
‘슬퍼하는 건 슬퍼하는 거고 챙길 건 챙겨야지.’
루산은 변경에서 인생을 배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