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FC 변경 군단의 기사-18화 (18/450)

18. 내 이름은 우르사

***

바덴은 루산의 편지를 읽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2만 골드를 지원해 주겠다 하니 계획한 대로 승마장을 비롯해 각종 시설을 추가하면 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인간을 잡지 못했지만, 나는 끝까지 잡을 겁니다.>

이 마지막 문장에 살짝 겁을 먹기는 했어도 실패하고 맞아 죽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앞부분,

<단, 이점은 알아 두세요.

자기 꿈이 소중하다면 남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말이 가슴에 꽂혔던 것이다.

‘내가 지금 내 성공을 위해 남을 삶을 망치고 있는 건가?’

바덴은 보름스 가문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루산이 최고의 인재들만 간다는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근위대나 기동 군단에 가지 않고 변경으로 간 이유를 충분히 짐작했다.

그는 돈을 벌어야만 했던 것이다.

외숙 집에 얹혀사는 어머니와 보름스 가문의 빚을 떠안아 가세가 기운 사돈네 가문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누나.

가족들에게 자유를 주려면 명예보다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운명의 장난으로 그는 당숙의 장원을 물려받았지만, 누나에게 자유를 주려면 그 장원 하나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런 사람한테, 장원을 담보로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다고 1만 골드, 2만 골드를 투자하라고 턱턱 요구했구나. 그 거액을······. 과연 내가 빚을 내야 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내 돈이었다면 이렇게 사업할 수 있었을까?’

바덴은 자신이 루산 아버지에게 투자를 권유했던 사기꾼과 별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지!’

바덴은 루산이 송금한 2만 골드를 건드리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요는, 만족감과 행복감을 주면 되는 것이지 꼭 비싼 돈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끙끙대던 바덴은 고용인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기발하고 재밌는 놀이, 또는 별장에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포상하겠어요! 자신이 어릴 때 하던 놀이도 좋아요. 단 돈이 많이 들지 않아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어요.”

바덴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재밌는 것을 찾아 돌아다녔다.

서커스 공연, 마술 공연, 투견 시합, 경마장, 주점, 카지노··· 그렇게 많은 곳을 다니고 고용인들이 낸 아이디어를 수렴해 몇 가지를 뽑았다.

<야산 놀이터>

튼튼한 밧줄만 있으면 아이들을 하루 종일 놀게 만들 수 있다.

매듭진 밧줄을 잡고 비탈을 올라, 밧줄 사다리를 타고 나무 위에 지은 집으로 들어가서, 건너편 나무 집까지 밧줄로 만든 출렁다리를 건넌다.

굵은 나뭇가지 위에 묶여 있는 밧줄을 붙잡고 웅덩이를 건널 수도 있고, 외줄 타기를 할 수도 있고, 그네를 탈 수도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숲은 다채롭고 은밀하며 모험심을 자극한다.

많은 나무와 풀, 동물과 곤충, 꽃과 열매들이 있어 온갖 놀이를 할 수 있다.

<낚시>

예쁜 강이 흐르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므로 낚시터를 깔끔하게 조성하고 낚시터 위에 나무 그늘을 드리운다.

<보트>

가족, 연인을 대상으로 좋은 아이템.

필요한 경우 사공을 이용할 수 있게 한다.

<언덕 썰매>

풀밭 위를 썰매처럼 미끄러져 내려간다.

겨울에는 눈썰매.

<경사 로프 타기>

초대박 아이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줄을 타고 미끄러지는 놀이.

남녀노소 스릴을 즐길 수 있다. 무서워서 못 타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타는 사람은 없다.

여름에 강으로 뛰어내리면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다.

<방방>

바덴이 서커스 단원들의 추락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해 둔 그물망을 보고 떠올린 아이디어.

촘촘하고 탄성 좋은 그물망과 용수철을 이용해 뛰면 된다.

어른, 아이 모두 좋아할 만한 놀이. 단, 어른들은 품위를 지키느라 안 할지도 모른다.

<실내 놀이터>

위에 열거한 놀이 시설을 실내에 만들면 된다.

<어린이 도서관>

화가들이 동화책을 읽고 벽에 이야기 속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들도 좋아할 것.

꾸준히 급료를 받고 있는 화가들을 놀리지 않는 방법.

<그림 교실>

화가들을 놀리지 않고 그림 교실을 운영한다.

아이들, 부모들이 좋아할 것이다.

<음악실>

소음에 주의하자.

저택 밖에 따로 오두막집을 지어 그곳에서 오붓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정 시간대를 정해 강습도 가능.

<도서관>

어른들을 위한 도서관.

책값이 좀 들겠지만, 별장의 품격을 높여 줄 것이다.

<게임방>

어른들을 위한 도박, 친교의 장.

과열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인다.

마감과 안전에는 신경을 썼지만, 돈은 최소한으로 들였다.

책값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1만 골드도 쓰지 않았다.

어쨌든 준비를 마친 바덴은 아인베크 남작에게 연락을 넣었다.

<존경하는 아인베크 남작님을 가족들과 함께 초대합니다.>

다행히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2박 3일 시간을 낼 수 있다는 답장이 왔다.

계절은 늦은 가을.

아인베크 남작 가족과 고용인들이 총 네 대의 마차를 타고 왔다.

바덴과 자작나무숲 장원 사람들은 초긴장 상태였지만, 그동안 연습한 대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중요한 손님을 맞이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바덴은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장이 꼬여 죽을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아인베크 남작 가족이 떠나는 날.

남작은 울며 발버둥치는 막내딸을 안고 내려왔다.

바덴은 가슴이 철렁했다.

“엉엉! 아빠, 가기 싫어! 더 놀 거야!”

막내의 발버둥에 용기를 낸 두 오빠들이 말했다.

“아빠, 우리 여기서 더 놀게요. 아빠는 일하고 여기로 오면 되잖아요.”

“맞아! 여기 존나 좋아요.”

“쓰읍! 누가 그런 품위 없는 말을 하랬어?”

남작의 호통에 뒤따라오던 가정교사가 안절부절못했다.

아인베크 남작은 우는 막내딸을 달래고 개구쟁이 둘째 아들을 야단치며 바덴 앞을 지나가다가 막내딸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오른손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잘 놀다 갑니다, 미스 고슬라! 보시다시피 합격이네요.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소개 많이 할게요!’

바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인베크 남작의 막내딸과 바덴은 그날 펑펑 울었다.

***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기획 팀을 꾸려 만족감과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시설과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굳이 저택 한 채를 통째로 대여하기보다 객실 단위의 대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간을 정해 그렇게 해 보려고요. 자작나무숲 장원이 사교의 장이 된다면 사람들이 이곳에 올 이유가 하나 더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나의 꿈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꿈으로 인해 다른 사람도 함께 꿈꾸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살아가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몸조심하세요.>

바덴의 편지를 흐뭇하게 읽은 루산이 중얼거렸다.

“뒤끝 있는 스타일이네.”

“뭔데 그래?”

켐니츠가 물었다.

“후유! 혹 덩어리 하나 있어요, 혹 덩어리. 근심, 걱정, 우환덩어리.”

변경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루산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켐니츠는 더 묻지 않았다.

“먼저 가세요. 테스트 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나도 좀 보자고.”

루산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그럼.”

루산은 멕 조립이 끝났다는 정비부장의 연락을 받고 델타 기지에 와 있었다.

켐니츠는 붐붐 수레를 호위할 차례가 되어 겸사겸사 함께 온 것이다.

과연 델타 기지 정비부에서 중고 부품들을 모아 멕 나이트를 제대로 조립해 냈을지, 그 성능은 어느 정도일지, 켐니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정비소 앞에는 이미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루산! 얼른 와!”

“아니, 통신 요원이 왜 여기까지 나와 있는 거야? 이거 근무지 이탈이라고!”

루산은 자신을 보고 활짝 웃는 통신 요원 브로디를 보고 과장되게 역정을 냈다.

“히히, 대타 맡겨 놨어. 저쪽에 호른 영감도 와 있다고.”

브로디가 목소리를 낮추고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호른이 루산을 보고 손을 들어 보였다.

루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슬쩍 들었다 내리는 것으로 답례했다.

기지 대장, 경비대장, 관리부장, 지원대장, 경리부장··· 뿐 아니라 델타 기지에 있는 거의 모든 요원들과 이번에 고용된 용병들도 구경하러 와 있었다.

지금은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미소가 순식간에 비웃음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에 루산은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굳이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어서 가 봐!”

“응!”

루산은 사람들의 응원과 기대를 등에 업고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살짝 열어 놓은 정비소 문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격했다.

“왔어요, 캡틴?”

“캡틴, 어서 와서 시승해 봐요!”

“시승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이럴 때는 시험 기동이라고 하는 거야!”

정비부장과 정비 요원들의 환영에도 루산은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뭐야?”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후에야 나온 말에 정비부장 바르통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멋지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바로 캡틴 루산을 위한 멕이야. 먼 옛날 우르사라고 불렸지. 요새 나오는 멕들은 개성이 없잖아.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단 말이야. 그런데 봐 봐요. 어깨도 떡 벌어지고 덩치도 우람하고, 아주 튼튼해서 대형 괴수가 깨물어도 내장 부품은 전혀 손상이 없다니까!”

루산은 제국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라 멕 나이트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거대 괴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투박한 멕 나이트들이 국가 간의 전쟁에 사용되면서부터 기사의 검술을 제대로 구현해 낼 수 있도록 점점 정교해졌다.

초기 모델이 단단하고 두툼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이건 책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곰같이 우람했다.

게다가 제대로 다듬지 않은 목각 인형처럼 몸 전체가 매끄럽지 못하고 각이 져 있었다.

이런 무식한 덩치를 타고 과연 기사의 검술을 구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 덩치면 무게가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나가겠어!’

그러면 움직임이 느리고 연료 소모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움직이기는 하는 거예요?”

“모르지. 우리는 멕 나이트 파일럿이 아니잖아. 그걸 확인해 보려고 부른 거잖아요, 캡틴을.”

‘이런, 씨!’

너무나 태연한 바르통의 대답에 루산은 품위를 완전히 잃을 뻔했다.

“허허, 장난이에요, 장난! 조립 잘 됐으니까 믿고 타 봐요. 이래 봬도 이거 아트라스 엔진 탑재한 놈이야.”

“정말? 그게 아직 남아 있어요? 어떻게 구했대?”

루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50여년 전 자코 왕국이 만든 멕 나이트 아트라스.

높이 7미터 안팎으로 만들어 오던 기존의 멕들과 달리 9미터짜리 멕이 전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모든 나라가 깜짝 놀랐다.

“더 큰 놈이 이기지.”

단순한 논리에서 출발한 아트라스.

그러나 비용이 너무 비쌌다.

키가 큰 만큼 무게도 늘어났고 이를 버티며 움직이기 위해 관절과 뼈대, 그리고 엔진을 훨씬 강화해야 했다.

키는 2미터 더 컸는데, 가격은 열 배가 넘었다.

아트라스는 강했지만, 다른 멕 나이트 열 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사나운 소년들에게 둘러싸여 얻어맞는 불쌍한 어른 같았다.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퇴출된 아트라스는 자코 왕국이 전란에 휩싸이면서 남아 있던 기체들이 모두 파괴되고 제작에 참여한 엔지니어와 마법사들도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완전히 감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변경 중고 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니까. 자! 어서 타 봐!”

아트라스 엔진이 탑재됐다는 말에 루산은 아주 조금은 기대가 됐다.

그는 바르통이 건넨 멕 나이트 열쇠를 받아 목에 건 뒤 멕 다리에 작게 붙어 있는 디딤 사다리를 타고 앞이 열려 있는 가슴 부위 조종실로 들어갔다.

“후유~”

루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머리 위에 달려 있는 투구를 조절하여 썼다.

멕 나이트의 눈으로 본 광경을 보여주고 귀로 들은 소리를 들려주는 장치였다.

투구를 쓴 뒤에는 장갑에 손가락을 끼우고 사람의 몸을 닮은 틀에 등을 기댔다.

고정 장치가 팔다리를 철컥철컥 덮었다.

처음이라 미세 조정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부터는 이 ‘동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된다.

동화를 마친 루산이 엔진을 작동시켰다.

후웅-

우르사는 그동안 타 왔던 멕 나이트의 엔진보다 훨씬 강력하고 웅혼한 엔진 음을 냈다.

리드미컬한 진동이 루산의 몸에 짜릿하게 전해졌다.

‘이게 아트라스 엔진!’

루산은 외부 확성기를 작동시켰다.

- 그럼 시작해 볼까? 다들 물러서요!

정비 요원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조종실에서 루산이 왼쪽 다리를 들자 곰을 닮은 거대한 멕 나이트가 루산과 똑같이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렸고, 루산이 다리를 앞으로 뻗자 멕 나이트가 첫 발을 내디뎠다.

쿵!

300년 전에 만들어진 멕 나이트 우르사가 50년 전 사라진 아트라스의 심장과 온갖 중고 부품을 몸 안에 달고 마침내 새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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