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FC 변경 군단의 기사-20화 (20/450)

20. 남의 돈으로 인심 좀 쓰자

***

“이래 봬도 아라드 왕국 변경 레인저 출신이외다!”

“···언제 복무하셨죠?”

“어디 보자, 그러니까 그해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해니까··· 20년 간 복무하고 30년 전에 제대했소이다!”

꼬장꼬장한 노인이 거수경례를 척 붙이고 대답했다.

“···넌 무슨 일로 왔니?”

“용감한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요. 달리기도··· 잘해요.”

“업고 있는 애는 누구니?”

“동생··· 이에요.”

“엄마는?”

“···아파요. 그래서 봉제 공장에서도 반나절밖에 일을 못해요.”

“아빠는?”

“아라드 왕국 군인이었는데···, 죽었대요.”

어린 동생을 업고 찾아온 수줍은 소녀의 말에 루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들이 단지 변경 제8구역의 개척촌을 채워 장차 제국의 부를 더해 줄 수단이 아니라 크나큰 슬픔을 겪은 전쟁 피란민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

“동생을 업고 뛸 수 있겠니?”

“자고 있을 때는··· 안 돼요. 잠에서 깨면··· 큰일이거든요.”

루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합격! 당번병이야.”

“당번··· 병? 그게··· 뭔데요?”

“내 방, 내 사무실을 청소해 주면 돼.”

“아! 잘해요, 청소.”

에밀리가 레인보우 시티 1호 개척병이 되었다.

“캡틴,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한도 끝도 없어요.”

아트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알아요.”

루산 역시 모든 사람의 사정을 봐주다가는 정작 중요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남의 돈으로 하는 사업, 가끔은 인심 좀 써 봅시다.”

그 말에 아트민은 피식 웃고 말았다.

루산은 개척병 모집 기준을 새로 발표했다.

<100미터 달리기 15초. 안 되면 탈락.>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모두 떨어졌다.

어른들도 거의 다 떨어졌다.

합격자들 중에는 가끔 40대, 50대도 있었지만, 10대 중후반부터 30대 중후반까지가 대다수였다.

“남자 45명, 여자 4명 합격했습니다, 캡틴!”

“오슬로 영감을 훈련 교관으로 임명할게요.”

“오슬로 영감이 누군데요?”

“있어요, 아라드 왕국 변경 레인저 장기 복무자.”

사람들은 루산이 또 남의 돈으로 인심을 쓰나 보다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인원이 부족한데 누가 훈련을 시킬 거야? 아라드 레인저 20년 근무자라면 교관으로는 차고 넘치지.”

나라마다 변경에 대처하는 방식이 달랐다.

아라드 왕국은 필센 제국과 달리 가난한 나라여서 멕 나이트를 많이 보유하지 못했다. 전선에 배치할 기체도 부족했기 때문에 변경으로 돌린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 변경 땅은 레인저가 담당해 왔다.

강인한 의지와 계승된 지혜, 단련된 육체를 지닌 아라드의 레인저들은 원시의 땅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함정을 파서 거대 괴수들을 잡아 아라드 왕국의 변경을 지켜 왔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서는 당연히 다른 나라 군대에 대해서도 배운다.

멕 나이트 없이 괴수를 상대하느라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 누가 아라드 변경 레인저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런 곳에서 20년을 복무하고도 죽지 않고 제대하여 70세까지 살아온 영감님을 루산은 기꺼이 활용할 생각이었다.

척!

임명을 받은 오슬로 영감이 루산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말했다.

“단기간에 만들어 보겠소이다, 대장님!”

“캡틴이라고 부르세요.”

“알겠소이다, 캡틴! 한 가지 권한을 요구하외다!”

“뭔데요?”

“훈련병 식사 배식 권한이 필요하외다!”

“···그렇게 하세요.”

식사 배식 권한을 가진 오슬로 교관은 두 가지 훈련만 시켰다.

달리기.

포복.

이유는 간단했다.

“살고 싶으면 달려야지. 못 달리겠으면 들키지 않게 엎드려야지.”

하루 종일 달리기를 시키다 도저히 달리지 못할 것 같을 때는 포복을 시켰다.

개척병 훈련병들은 팔꿈치가 까져 피가 났지만, 오슬로 영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팔꿈치가 아닌 것이다.

“피 나고 딱지가 생기고 피 나고 딱지가 생기고, 이걸 반복하면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해져서 괜찮아.”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던 루산은 오슬로 교관의 훈련 모습을 지켜본 뒤 안심하고 맡겼다.

그리고 개척병에 지원했다 떨어진고 실망해서 돌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애초에 개척병에 지원하지 않은 이주민들의 기록을 시간이 날 때마다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간간이 직접 찾아가 그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고 간단히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루산의 임무는 이곳에 많은 이주민이 들어올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많이 들어오면 많이 들어올수록 그의 주머니도 더욱 불룩해진다.

들어온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살피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산은 어느새 그렇게 하고 있었다.

변경 군단 요원들 가운데 몇몇은 쓸데없이 영주 놀이를 한다고 비꼬았으나 누군가는 감동하기도 했다.

“캡틴, 주제넘지만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지지 못해요. 정해진 자원으로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요. 지원 체계에 맡기는 것이 현명합니다. 안 그러면 누군 도와주고 누군 안 도와준다고 욕만 먹거든요.”

아트민의 말에 루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려울 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것만큼 외롭고 막막한 일이 없죠. 대단한 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거 하는 겁니다. 실제 지원은 개척 요원들과 관리 요원들이 매뉴얼에 따라 하는 거죠.”

루산은 그 말을 남기고 석회석 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떠났다.

개척병들은 훈련 중이라 놔두고 멕 나이트 세 대, 정찰병 열 명만 동원했다.

멀어지는 루산의 뚱뚱한 멕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아트민이 중얼거렸다.

“피곤하고 짜증나는 스타일이야.”

그러나 그의 가슴에 루산에 대한 호감이 짙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유인 작전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정찰대장의 말에 루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려했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우리 일이 늘 위험하죠. 위험수당이나 두둑이 챙겨 주세요, 캡틴.”

“그러죠.”

루산이 승인함에 따라 멕 나이트 파일럿들과 정찰병들은 동선을 짜고 괴수를 유인해서 가둘 수 있는 지형을 골라 작전에 돌입했다.

괴수를 사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웨이브 때가 어쩌면 가장 편하게 사냥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수많은 괴수들이 뒤에서 미는 힘에 떠밀려 이동하기 때문에 길목을 차지하고 다 쓸어 담으면 되는 것이다.

웨이브 시즌이 아닐 때 거구의 멕 나이트를 향해 달려드는 괴수는 공격성이 극히 강한 대형 괴수 일부와 중형 괴수 벨로키, 또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 놓여 있는 녀석들뿐이었다.

나머지는 거대한 멕을 보고 당연히 달아났다.

괴수가 숲이나 초원, 습지나 골짜기로 달아나면 잡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몰이를 하거나 미끼로 유인을 하거나 지나다니는 길목에 트랩을 설치하거나 서식지를 덮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형을 파악해야 하고 해당 지역에 분포한 괴수의 종류를 알아야 한다.

그 일을 정찰병들이 하는 것이다.

정찰병들은 미리 준비해 온 송아지를 능숙한 솜씨로 잡아 껍질을 벗기고 튼튼한 줄로 탐탐에 묶었다.

그런 식으로 송아지 두 마리를 더 잡아 세 명의 정찰병이 미끼 역할을 하고 나머지 정찰병들은 위험에 처한 미끼를 돕는 서포터 역할을 맡았다.

“가자!”

탐탐이 송아지 사체를 끌고 돌아다녔다.

덤불숲이나 높게 자란 풀숲에는 들어가지 않고 풀이 낮게 자란 초지나 자갈밭처럼 시야가 확보되는 곳으로만 움직였다.

탐탐-

탐탐-

정찰병들은 간간이 멈춰 서서 온 신경을 집중해 주위를 살펴보며 송아지 피 냄새를 짙게 뿌린 뒤 다시 이동했다.

그렇게 광활한 평원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시든 덤불숲에서 피 냄새를 맡은 괴수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웨이브 시즌에 많은 괴수들이 한꺼번에 이 지역으로 들어와 머무는 바람에 먹이를 구하는 데 애를 먹고 있던 육식 괴수들은 피 냄새를 맡고 눈이 뒤집혔다.

쿠르르~

먹을 것을 발견하고 자연적으로 나오는 울대의 울림 소리가 근처의 경쟁자들을 깨웠다.

쿠르르~

쿠르르~

맛난 먹이를 끌고 가는 경쟁자 - 탐탐이 만만해 보였다.

상황을 봐서 저 녀석이나 저 녀석 등에 올라타고 있는 기이한 녀석을 먹어도 될 것 같았다.

부스럭!

마른 덤불숲에서 주린 배를 달래고 있던 란드라트 하나가 뛰쳐나왔다. 그러자 녀석에게 먹이를 빼앗길세라 갈대숲에서 쉬고 있던 다른 소형 괴수들도 뛰쳐나왔다.

까야아~

소형 괴수들의 행동을 가소롭게 여긴 벨로키들이 날카로운 경고음을 토하며 추격전에 뛰어들었다.

그때 강력한 발톱으로 벨로키도 찢어 버리는 중형 괴수 데이노 떼가 피 냄새를 맡고 합류했다.

탐탐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몸이 갈가리 찢어져 괴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라 정찰병들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괴수들과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해 나갔다.

키야아!

마른 풀에 가려져 있던 웅덩이에서 예상치 못한 괴수가 갑자기 뛰쳐나와 미끼 정찰병이 위험해지는 순간, 근처를 달리던 서포터 정찰병들이 활을 쏘고 투창을 던져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

녀석이 자신을 공격하는 적에게 고개를 돌리고 따라붙자 서포터 정찰병은 죽어라 탐탐을 재촉해 달아났다.

한참을 달리던 미끼 정찰병들이 약속한 지점에서 풀피리를 불었다.

삐유삐유삐유유유~

새소리를 닮은 뿔피리 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 대기하고 있던 멕 파일럿들의 귀에 들어갔다.

미끼 정찰병들은 굽이굽이 휘도는 계곡 지형으로 들어갔고 번들거리는 눈을 한 괴수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그 뒤를 쫓아갔다.

양쪽이 절벽으로 막혀 있는 좁은 계곡 안으로 들어간 미끼 정찰병들은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멕 나이트 뒤로 숨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하아~ 하아~”

탐탐-

탐탐-

상황 파악을 못한 탐탐이 오랜만에 달리기 놀이를 해서 신이 난다는 듯 가슴을 흥겹게 두드렸다.

그때 절벽 안까지 추격해 온 괴수들이 거대한 곰처럼 생긴 멕과 그 뒤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탐탐들을 보고 무슨 일인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아 멈춰 서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사이 녀석들이 들어온 입구 양쪽에 딱 붙어 있던 에센과 케르펜의 멕이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우르사가 4미터짜리 한 손 철퇴를 들어 올렸다.

“시작하자고!”

[오케이!]

[갑니다!]

뻑! 깡! 퍽!

캬아아!

흐어어!

쿠어어!

우르사의 철퇴에 대가리를 맞은 괴수들이 단말마의 지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괴수들의 울음과 비명 소리가 한동안 이어져 마른풀 속에 숨어 있던 평원의 작은 동물들이 몸서리를 쳤다.

세 대의 멕 나이트는 계곡 안의 도살자가 되어 중소형 괴수들을 모조리 죽였다.

[여기는 케르펜, 지원 팀 나와라.]

[지원 팀이다. 말하라, 케르펜.]

[작업할 물량이 많다. 용기(容器)를 제법 많이 가져와야 할 거야. 남서쪽으로 깃발을 따라오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케이, 곧 출발하겠다.]

델타 기지의 신입 파일럿 케르펜이 어느새 신입 티를 벗어 가고 있었다.

석회석 지대로 가는 길에 그들은 이런 유인 작전을 꾸준히 펼쳐 나갔다.

석회석을 얻기 위해 많은 괴수들을 때려잡으면서 루산은 철퇴 사용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

해가 바뀌어 레인보우 시티와 석회석 지대 사이에 길이 닦이고 본격적으로 광산 개발이 시작될 무렵 2차 개척민이 들어왔다.

그때부터 레인보우 시티 개발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석회석을 활용하게 되면서 주택 건설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도로도 더 튼튼하게 포장된 것이다.

루산은 2차 개척민들 중에서도 개척병을 선발해 오슬로 교관에게 맡기고 훈련이 끝난 1차 개척병들에게는 호루라기와 염소 한 마리씩을 지급했다.

“여러분은 이제 우리 레인보우 시티 안전을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레인보우 시티를 둘러싼 숲 방벽 안쪽을 순찰하게 될 겁니다. 괴수가 나타나면 싸울 생각 말고 염소를 던져 주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달아납니다. 겁 내지 마세요. 이미 멕 나이트와 정찰병들이 숲을 수차례 소탕했고 숲 외곽 지역도 매일 순찰하고 있기 때문에 레인보우 시티 안에 괴수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요.”

“괴수 사냥하러 가는 게 아니었나요?”

개척병 하나가 용기 내 질문했다.

괴수 사냥 기여에 따라 성과 보상금을 일정 부분 주기로 한 약속을 상기시키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파일럿이나 정찰병들이 비웃음을 머금었지만, 루산은 그러지 않았다.

“모든 개척병은 레인보우 시티 전투 요원들이 사냥하여 받은 성과금의 일부를 분배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비율이 당장 높지는 않겠죠. 여러분이 경험을 쌓으면 점점 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될 것이고, 분배 비율 역시 더 높아질 것입니다.”

“아!”

“여러분의 임무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레인보우 시티의 주민, 곧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이죠. 가족과 이웃의 안전과 안전감을 책임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고 근무하세요!”

“네!”

그토록 힘든 훈련을 받았음에도 무기도 없고 갑옷도 없이 염소 한 마리와 호루라기 하나를 받고 살짝 실망한 1기 개척병 49명은 루산의 말에 자부심을 가지고 염소를 몰아 각자 맡은 구역으로 가 첫 근무를 시작했다.

매에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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