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너무 약하게 불렀나?
***
알파 기지 개척단이 소멸한 이후 알파 기지는 추가 개척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반달 호수 지역에 들어와 있는 개척 기지는,
델타 기지 개척단: 레인보우 시티
감마 기지 개척단: 감마2 기지
베타 기지 개척단: 베타2 기지
본부 개척단: 본부 개척 기지
이렇게 네 개였다.
“알파 기지는 이제 못 들어와. 남은 인력과 자원으로 알파 기지를 운영하는 데도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니까. 단기간에 인적, 물적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 쉽지 않지.”
트리어의 말에 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트리어의 호출로 본부 개척 기지에 와 있었다.
그 정도 피해를 입게 되면 군단 본부의 신뢰가 크게 떨어져 인력과 자원 제공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더 잘하는 곳에 주지 못하는 곳에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왜 알파 기지 말아먹은 놈들이 타던 멕 있잖아.”
“네.”
“두 대. 그거 한 대는 다시 알파 기지에 줄 거야. 신입 파일럿 태워서.”
“아예 지원 안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 미우나 고우나 8군단 소속이니까. 전력이 부족해서 알파 기지에서 사고 터지면 8구역 손해고······. 그리고 남은 한 대는 델타 기지로 배정될 거야. 너한테 간다는 말이지.”
“예? 왜요?”
“왜긴 왜야. 잘하고 있으니까 주는 거지. 더 잘하라고.”
“오! 감동인데?”
루산은 인정받은 것 같아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잖아도 레인보우 시티 외곽 순찰 범위가 점점 더 확대되면서 파일럿들이 힘겨워하고 있었다.
파일럿들의 피로도 줄이고, 레인보우 시티의 안전도 더 확보하고, 외곽 개발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왕 주는 거 한 대 더 주지. 내가 타던 것도 있잖아요.”
루산이 우르사를 타면서 남게 된 멕 나이트를 말하는 것이다.
“하여간 욕심은······. 주면 더 달라고 한다니까. 그건 2전대에 배속될 거야.”
“왜요? 이미 12대나 있는데 왜 더 줘요?”
“나도 더 잘하라고 주는 거지.”
반달 호수 지역에 들어와 있는 개척 기지 네 개 중에 베타2 기지와 감마2 기지는 성장이 그리 빠르지 않았다.
개척단의 규모도 작고 기지 대장의 지원도 델타 기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래서 반달 호수 지역 개척은 사실상 레인보우 시티와 본부 개척 기지 간의 경쟁이었다.
본부 개척 기지는 인력 면에서 레인보우 시티의 두 배나 됐기 때문에 시작이 늦었음에도 급격히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레인보우 시티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레인보우 시티의 첫 번째 성장 요인은 가장 먼저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덕에 가장 먼저 개척민이 들어왔고, 그 인력이 개척 건설에 고스란히 투입되면서 새로운 개척민을 받을 수 있는 주택,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공장과 경작지를 계속해서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니 주민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세금을 걷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개척민들에게 일을 시키고 급여를 지급할 수 있는 자금력이 두 번째 요인이었다.
호른 영감의 재력과 의지 덕에 성장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거리와 위치가 세 번째 요인이었다.
지원 물자를 제공해 주는 본거지와의 거리가 레인보우 시티가 가장 가까웠다.
본부 개척 기지는 라돔 시에서부터 물자를 실어 와야 하는 반면 레인보우 시티는 델타 기지에서 운반해 오면 되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델타 기지 또한 필요한 물자를 라돔 시에서 들여오지만, 그 부분은 델타 기지에서 알아서 했기 때문에 레인보우 시티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또한 2전대 멕 나이트들이 이미 이 지역을 소탕하고 서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레인보우 시티는 다른 개척 기지들에 비해 괴수 출몰 빈도가 현저히 낮았다.
그 덕에 개척민들이 괴수를 만나지 않아 동요하지 않고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요인은 바로 루산.
그는 호른 영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개척 장려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를 받았다.
개척 주체가 이주민 1인당 20골드를 국가로부터 받는 개척 장려금.
자신의 주머니로 모두 넣어도 상관없었지만, 루산은 그중 절반인 10골드를 개척단 모든 요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분배 비율은 다르지만, 개척민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전투 요원, 개척 건설 요원, 관리 요원들은 더 많은 돈을 받기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산은 나머지 10골드도 자신의 주머니에 넣지 않고 개척지 건설에 모두 투입했다.
사람이 늘면서 더 필요해진 마차와 수레를 구입하고 호른 영감의 지원으로 충분하지 않은 공장 설비를 들여오는 데 썼다.
그로 인해 레인보우 시티는 벽돌 공장, 제재소, 석회석 공장에서 건설 자재가 풍족하게 생산되어 새로운 주택을 계속해서 빠르게 지을 수 있었고 가장 많은 개척민이 레인보우 시티에 배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레인보우 시티 이주민 수가 몇이지?”
“3차까지 들어와서 1,300명이 넘었죠.”
“그럼 1만 3천 골드라는 거금이 네 주머니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걸 포기했다는 말이야?”
호른 영감이 루산에게 개척 장려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인센티브로 주었다는 사실, 루산이 그중 절반을 개척단 요원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될 수 없었다.
본부로부터 그러한 권한을 받지 못한 트리어는 루산을 무척 부러워했다.
본부 개척 기지는 그 개척 장려금을 말 그대로 개척지 건설에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개척민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수 있는데 아낄 필요가 있나요? 늘어난 개척민 수만큼 장려금은 계속 받을 테니까요.”
“으음, 똑똑하군!”
트리어가 과장되게 감탄했다.
“놀리지 말아요.”
“놀리기는 뭘 놀려? 부러워서 그러는 건데.”
루산은 개척 장려금으로 당장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보다는 개척에 투자하여 많은 이주민을 수용함으로써 윗사람들의 신임을 받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트리어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아라드 왕국의 전쟁은 계속되는 건가요?”
“그러게 말이야. 딱히 돌파구가 안 보이는 것 같아.”
“황제 폐하의 중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서요?”
“그러게. 어쨌든 당분간 피란민은 계속 들어오겠지.”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이들은 자발적으로 변경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어떡해요?”
“쉽지 않을 거야.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변경으로 오기 전에 동의서에 서명하고 왔으니까. 빚을 다 갚으면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10년, 20년 자신의 피땀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흐음······.”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지 알겠지?”
“···네.”
필센 제국의 황제는 아라드 왕국의 전쟁 통에 피란민을 살린다는 명문과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국가 생산력을 키운다는 실리를 동시에 취한 것이다.
“은혜가 맞기는 하죠. 누가 이들을 먹여 살리겠어요?”
“그렇지. 어쨌든 당분간 우리의 일감이 사라질 일은 없겠어.”
트리어의 말투가 다소 냉소적이기는 해도 사실이 그러했다.
루산은 에밀리가 떠올랐다.
어느 가족의 슬픔과 자신의 수입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 슬픔을 이용하거나 조장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젖은 사람들이 힘을 내 살아가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왜 불렀어요? 이런 이야기나 하자고 바쁜 사람을 불렀어요?”
루산이 짐짓 퉁명스럽게 말하자 트리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소개할 사람이 있어서 불렀어.”
***
“루산 보름스입니다.”
“칼리슈라고 불러주세요.”
자신을 칼리슈라고 소개한 사람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차분한 학자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그러나 루산은 칼리슈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마법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레노블 마법 연구소.
바로 아버지에게 사기를 친 자들이 동원한 단체의 이름이었다.
그 단체에 실제 마법사가 있었든 없었든 그때 이후로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싫었다.
마법사에 의해 만들어진 멕 나이트를 타고 있었음에도.
“칼리슈 님은 우리 8군단에서 괴수 부산물을 구입하고 8군단에 멕의 연료를 비롯해 각종 장비와 소모품을 판매하는 가프 마법 연구소 소속이셔.”
트리어의 소개에 루산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8군단이 거래하는 마법 연구소는 한두 곳이 아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프 마법 연구소가 상당히 규모가 크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칼리슈가 루산의 눈을 보고 직접 말했다.
“우리 연구소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8군단에 부탁했더니 감사하게도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더군요.”
‘8군단에 부탁했다면서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지?’
루산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트리어가 얼른 말했다.
“그러니까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구하는 게 있는데, 그게 실력이 뛰어난 파일럿이 필요한가 봐. 8군단에서 뛰어난 실력 하면 또 우리 캡틴 아니겠어? 하하하하!”
루산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도 뛰어난 파일럿들은 있을 텐데요?”
“그게 여러 가지 이유로 기사님의 협조를 구하게 됐습니다.”
루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본부에서 자신을 지목했다면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인데요?”
“비밀을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러죠.”
“오래 묵은 세르펜스를 잡는 일입니다. 그것도 온전하게.”
“······!”
루산이 인상을 썼다.
상대가 마법사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일의 어려움 때문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찡그린 것이다.
세르펜스는 거대한 뱀처럼 생긴 괴수로 중형 괴수 정도는 통째로 꿀꺽 삼키고 대형 괴수도 칭칭 감아 조여서 죽이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원시의 거대한 나무를 감고 있다가 지나가는 멕 나이트를 머리부터 상체까지 삼켜 들어 올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용은 사실 세르펜스라는 주장도 변경에서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피부가 너무나 질겨서 마나 진동 대검으로도 잘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소, 중, 대로 나누는 일반적인 분류법을 벗어난 괴수 세르펜스.
“그걸 어떻게 잡으라고요?”
“루산 보름스 기사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하! 혼자서요?”
“많은 사람들이 알면 비밀이 아니게 되니까요.”
루산은 자신의 실력을 이렇게나 높게 봐 주는 본부와 칼리슈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싶었다.
“날 언제 봤다고 그런 무모한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전에 바실리스크 부산물을 우리 연구소에서 구입했는데 상태가 아주 양호하더군요. 그게 기사님 솜씨라는 이야기를 듣고 부탁을 드린 겁니다.”
‘이런, 이런······! 날 지목한 게 본부가 아니었구나.’
루산은 트리어를 쳐다보았다.
“내가 레인보우 시티를 비울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멕 나이트 한 대 충원해 준다잖아.”
“그게 그 뜻이었어요?”
루산이 인상을 팍 썼다.
“아니, 아니! 겸사겸사.”
“신입 파일럿이 나를 대체할 정도가 되면 이 일에 신입 보내면 되겠군요.”
“에이, 괜히 그런다. 이미 위에서 이야기 다 끝났어.”
트리어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당사자도 모르게 무슨 이야기를 끝내요? 내가 노예에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게?”
곤란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산은 강하게 나갔다.
8군단과는 계약 관계였지 군대처럼 명령 복종 관계도 아니었다.
“대검 공짜로 고쳐 준대.”
“······!”
아트라스 대검을 공짜로 고쳐 준다는 말에 루산은 살짝 구미가 당겼다.
상당한 거금을 절약하는 셈이 아닌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이러해서 맡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아쉬운 게 저쪽이라면 더 강하게 나가도 될 것 같았다.
그때 칼리슈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저희도 사례를 할 것입니다만, 혹시 바라시는 게 있다면 말씀을 해 주시지요.”
루산은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품위가 조금 떨어지기는 해도 이 정도를 조건으로 걸면 썩 괜찮을 것 같았다.
“음······, 향후 마나 연료봉을 무상으로 제공해 주신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연료 먹는 하마, 우르사의 연료비를 영구적으로 0으로 만들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이 아닌가?
조건을 걸면서도 너무 심했나 싶어 루산은 살짝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루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리슈가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기꺼이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루산 보름스 기사님.”
언제까지 제공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한데 상대가 말을 바꿀까 봐 서둘러 대답하는 칼리슈를 보고 루산은 아차 싶었다.
‘너무 약했나? 더 세게 불렀어야 했나?’
그러나 이제 와서 말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지나간 일을 붙들고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루산은 이왕 이렇게 된 것, 빨리 끝내고 싶었다.
“세르펜스 잡으러 가죠,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