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우리 집으로 오세요
***
라돔 역 앞 마차 정류장에서 젊은 마부 렌커는 손님을 기다리다 아는 체하는 사람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렌커 씨.”
“응?”
렌커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소년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소년 옆에 있는 청년을 보고 이들이 누군지 이내 깨달았다.
달리는 마차 위에서 삼지창으로 송아지만 한 란드라트의 입을 단숨에 꿰어 들어 올리던 놀라운 광경은 1년이 지났음에도 뇌리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 꼬마 집사! 기사님, 안녕하세요?”
“꼬마 아니에요.”
클라크는 입술을 삐죽이며 항의했고, 루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눈인사로 답례했다.
“하하하, 꼬마가 아니라 소년 집사님이지. 그래, 어디 가는 거야, 갔다 오는 거야?”
“방향 보면 몰라요? 역으로 가는 길이지.”
꼬마라는 말에 화가 난 클라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루산은 자신에게 절대 보이지 않는 행동을 하는 클라크가 신기했다. 그만큼 렌커가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괜히 살짝 부러웠다.
“요새 경기는 좀 어때요?”
루산이 렌커에게 인사치레로 물었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기사님. 피란민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군단에서 맡기는 수송 일이 늘었거든요. 운임은 짠 편이지만, 확실히 수입은 늘었어요. 아주 조금이지만요.”
렌커의 표정은 딱히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렌커 씨, 나랑 일 좀 해 볼래요?”
루산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렌커와 클라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루산도 계획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무슨··· 일을요?”
“글쎄, 확정된 건 아니고 갔다 와서 시간 되면 얘기나 해 봅시다.”
“뭐, 네! 알겠습니다!”
맨 앞에 있던 마차가 손님을 태우고 빠져나가자 기다리던 마차들이 줄줄이 한 칸씩 앞으로 움직였다.
렌커가 이동할 차례가 되어 그들은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사님! 꼬마, 아니 소년 집사도 잘 가!”
“치! 나중에 봐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고!”
루산은 고개를 까딱해 답례하고는 역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든 클라크가 얼른 따라오며 물었다.
“렌커 씨랑 무슨 일을 하시려고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
“모르죠. 이제 겨우 두 번 본 사람이잖아요.”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정답이었다.
“그래도 뭐랄까, 용감하고 일도 열심히 할 것 같기는 해요.”
“후훗, 그래서 마음에 드니?”
“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루산이 장난으로 던진 질문에 클라크는 괜히 펄쩍 뛰었다.
루산은 웃으며 침대칸으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클라크가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따라 들어왔다. 그러다 침대를 보더니 이내 기분이 풀려 얼굴이 환해졌다.
지난번 여행이 고단하기는 고단했던 것이다.
변경에서 노바까지 비싼 침대칸을 타고 갈 사람은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편하게 침대칸의 고요를 즐겼다.
그래도 두 번째 기차 여행이라고 클라크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말고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소년을 위한 세계사>
루산은 피식 웃고는 눈을 감았다.
***
“아 참!”
칼리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루산은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뭐예요?”
세르펜스를 잡고 돌아오던 어느 날, 저녁을 먹은 뒤 모닥불 가에서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생각이 났어요!”
“뭐가요?”
“그레노블 마법 연구소!”
“······!”
루산의 눈이 퉁방울만 해졌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기억이 났다는 건가요?”
칼리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이 눈으로 재촉하자 그가 얼른 말했다.
“5년 전 군수 산업 박람회장이었어요. 거기서 사람들을 만났죠.”
“누구를요?”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오베론 공작의 둘째 아들하고 공업 은행 지점장이던가? 여하튼 그랬고, 한 사람이 더 있었어요. 세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오베론 가문의 공자가 우리 스승님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죠.”
“음!”
“그때 오베론 공작의 둘째 아들이 다른 사람들을 스승님께 소개해 주었는데, 분명히 그레노블 마법 연구소의 누구라고 소개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소개 받은 사람이 얼른 나서더니 클레··· 무슨 연구소의 누구라며 자신을 소개하더라고요. 그러자 오베론 가의 둘째 아들이 허허 웃으며 곧바로 말을 바꿔 클레··· 무어라고 정정해서 소개하더군요.”
“그레노블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급하게 클레··· 무슨 연구소라고 말을 바꿨단 말이죠?”
“그랬던 것 같아요.”
“오베론 공작의 둘째 아들하고 공업 은행 지점장이 확실한가요?”
“지점장인지 은행장인지는 헷갈리는데 공업 은행은 맞아요. 그리고 오베론 공작의 둘째 아들도 확실해요.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루산은 가슴이 뛰고 눈에서 불이 났다.
칼리슈가 잘못 들었거나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오베론 가문의 둘째 아들과 공업 은행 사람이 그레노블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들도 그 자리에서 만난 사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일이 터지고 나서 처음으로 잡은 실마리였다.
반드시 이 실마리를 따라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실패했고 마음속으로 포기한 일에 매달려 현재를 망칠 수는 없었다.
이미 자신의 인생을 나름의 방법으로 개척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루산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우우우우.”
***
노바에 도착한 루산은 역에서 마차를 잡아타고 바덴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혼자서 해결해 볼 생각이었지만, 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꿨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루산은 이제 정의감과 충성심, 순수와 열정으로 가득 찬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었다.
지난 5년 동안 만나고 함께 지낸 사람들은 닳고 닳은 변경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혼자서 알아보기보다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노바에 자작나무숲 장원 홍보와 예약을 위한 안내 사무소를 열었고 바덴이 하루에 한 번씩 들렀다가 장원으로 간다는 사실은 이미 편지를 통해 알고 있었다.
예전 변호사 사무소 근처 1층에 깨끗하고 화사하게 장식된 자작나무숲 장원 안내 사무소가 있었다.
‘임대료가 비싸겠군.’
보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드는 자신에 쓴웃음을 지으며 루산은 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귀를 씻어주는 청량한 알림 종소리.
“어서 오세요.”
잘 교육받은 직원들의 정갈한 웃음.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루산을 보고 살짝 당황하다가 이내 미소를 짓는 바덴.
주로 귀부인들을 상대하느라 그런지 활동하기 편한 옷이 아니라 몸을 꽁꽁 싸매는 정숙한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오신다는 편지는 받았어요. 잘 오셨어요. 집사님도 잘 지냈죠?”
“안녕하세요, 미스 고슬라.”
클라크는 얼굴이 붉어지는 와중에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장원으로 오실 줄 알았는데······.”
“마음이 급해 이리 왔어요. 둘이서만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어머! 세상에!”
여직원 둘이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바덴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못 들은 척하고는 클라크에게 자리를 권하고 음료를 대접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뒤 루산을 안쪽 상담실로 데려갔다.
“어머! 어머!”
귀가 따가웠다.
‘저것들을 그냥!’
바덴은 자작나무숲 장원으로 가기 전에 단단히 교육시키리라 다짐하고 루산 앞에 마주 앉았다.
“급하게 하실 말씀이 뭔가요?”
“개인적인 일이에요.”
루산은 칼리슈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덴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 이야기를 충분히 소화할 시간을 준 뒤 루산이 말했다.
“사실 나는 그때 당시의 사정을 정확히 몰라요. 지금보다 어렸고 경험도 없었고 우리 가문이 그런 일을 당하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해해요.”
이해한다는 말, 루산은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예전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비록 사업을 본격적으로 해 보신 적은 없지만, 대대로 물려받은 장원과 그에 딸린 가공 공장을 운영해 오신 분인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계약, 보증, 대출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바덴이 루산의 말을 신중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지만, 은행이라는 곳이 아무에게나 턱턱 거액을 빌려 주지는 않지 않나요? 주채무자에 대한 심사 평가 없이 보증인만 심사해서 대출이 이루어지나요? 그리고 보증 금액이 우리 가문의 재산 가액을 넘어섰어요. 그래서 하아···, 사돈네 가문에도 막대한 피해를 끼치게 된 거죠. 은행이 그런 대출도 막 합니까?”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네요.”
“기차를 타고 오면서 소설을 써 봤습니다. 은행, 오베론 공작, 실행 그룹이 협잡하여 우리 가문을 작업한 게 아닌가. 이게 무리한 생각인가요?”
바덴은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았다.
증거 없이 예단하지 않는 것은 법률가로서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변경 어느 마법사의 기억 하나에 바탕을 둔, 이런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보름스 가문의 몰락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루산 보름스는 이제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 바덴은 그렇게 생각했다 - 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도와줄 도의적 책임이 있었다.
“혹시 당시 사업이나 소송과 관련해 남아 있는 서류들이 있나요? 검토를 해 볼게요.”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가지고 계실 거예요.”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미 패소했잖아요.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고······. 실망하실까 봐 드리는 말씀이에요.”
“기대는 안 해요. 이 일이 우리의 현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현재’라는 루산의 말이 바덴에게 묘한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노력은 하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 사람을 쓰든 돈을 쓰든 ‘클레’로 시작하는 마법 연구소가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5년 전 군수 산업 박람회에 참석한 공업 은행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봐 줘요.”
바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루산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오베론 공작가에서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그 둘째 아들이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알아봐 줘요.”
바덴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사회 개혁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신분과 작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누구나 얻지 못하는 작위를 더 귀하게 여기는 풍조도 일어났다.
더구나 오베론 공작이었다.
필센 제국 영토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오베론 지방의 주인이며 남방군 사령관으로 휘하에 3개 기동 군단과 3개 보병 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바덴은 그 정도까지는 몰랐지만,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나온 루산은 오베론 공작의 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렵지 않았다.
“사람은 평소에 발밑의 개미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의식하게 되면 그때부터 신경을 쓰죠. 조심하면 괜찮을 겁니다.”
바덴이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을 마친 루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면 나에게 먼저 보내 줘요. 고위 귀족의 뒤를 밟을 때 주의할 사항을 일러 줘야 하니까.”
“어디에 묵으실 건가요? 외숙님 저택?”
“거긴 안 되고, 숙소는 아직 생각 안 해 봤는데···, 혹시 추천해 줄 곳이 있나요? 클라크와 함께 지내기 적당하고 비싸지 않은 곳으로.”
“자작나무숲 장원으로 가시는 건 어때요?”
“빠르게 대응하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거기는 영업하는 곳이잖아요.”
‘하아!’
바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젊은 청년과 소년, 단 둘이 호텔이나 여관에서 오래 묵는 것은 과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죠. 우리 집으로 오세요.”
“······!”
“오해 마세요. 가족들과 함께 사니까.”
“누가 뭐라고 했나요? 폐를 끼칠까 봐 그런 거지.”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루산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숙박비는 얼마나······?”
바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앞으로 해야 할 위험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싹 날아가 버렸다.
‘우이 씨!’
그러나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꾹꾹 눌러 담듯이 말했다.
“어머니한테 꽃 한 다발, 아버지한테 포도주 한 병, 동생들한테 쿠키 한 봉지씩. 오케이?”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