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러려고 휴가를 준 건 아닌데
***
“방학 때 놀러 갈게! 같이 괴수 잡으러 가자!”
“조심해서 가! 편지 쓸게.”
클라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쌍둥이 남매.
“다음에 또 오세요.”
열차에서 먹으라며 빵과 우유, 삶은 계란과 주스를 싸 주는 바덴의 어머니.
“크흠! 뭐, 잘 가십시오.”
왠지 모르게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덴의 아버지.
루산은 바덴 가족과 인사를 나눈 뒤 다리를 쩍 벌려야 앉을 수 있는 소형 마차를 타고 역으로 떠났다.
대로로 들어가기 전, 루산이 말했다.
“잠깐 세워 봐요.”
“왜요? 뭐 놓고 왔어요?”
루산은 마차에서 내려 과자 가게로 들어가 쿠키 아홉 봉지를 샀다.
여덟 개는 클라크와 그의 가족들 몫.
하나는 바덴에게 주었다.
클라크와 바덴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루산은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얼른 재촉했다.
“늦기 전에 출발하죠. 지금 도로 막힐 시간 아니에요?”
“네, 네, 갑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클라크와 바덴, 다리를 쫙 벌리고 힘겹게 뒷좌석에 탄 루산을 태우고 소형 마차는 대로를 힘차게 달렸다.
많은 마차와 간간이 보이는 자동 마차들 사이에서도 소형 마차는 주눅 들지 않고 달려 마침내 역에 도착했다.
“상속세 납부하고, 마차 알아보고, 변경 프로젝트 구체적 실행 계획 짜서 보고할게요. 그 사건도 신경 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몸 잘 챙기세요.”
“다 잘하려고 하지 말아요. 미스 고슬라에게는 지금 하는 사업이 1순위에요. 변경 프로젝트나 그 사건은 후순위라는 걸 잊지 말아요. 별장 사업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니까. 그러니······.”
“······?”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클라크는 괜히 자신의 얼굴이 달아올라 지나가는 마차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안녕히 계세요, 미스 고슬라.”
“잘 가요, 집사님.”
루산은 바덴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곧바로 마차에서 내려 역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올라갔고, 바덴과 인사를 나눈 클라크는 큰 가방을 들고 헐레벌떡 그 뒤를 쫓아갔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바덴이 중얼거렸다.
“귀여워.”
***
루산은 노바 역에서 판매하는 모든 신문을 구입해 클라크에게 넘겼다.
“이걸 다 보시려고요?”
클라크가 낑낑대며 30여 종의 신문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네가 볼 거야.”
“네?”
“연구해 봐. 각 신문에 실린 연재소설의 특징, 재미 요소 위주로. 그리고 시간이 나면 정치면, 사회면, 경제면도 읽어 보고. 다 보고 나서 신문별 특징도 파악해서 알려 줘.”
무시무시한 숙제를 내준 것이다.
그래도 클라크는 싫지 않았다.
주인님이 자신을 허드렛일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 같아 오히려 좋았다.
의욕에 가득 찬 클라크는 침대칸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신문을 산처럼 쌓아 놓고 읽기 시작했다.
루산이 눈을 감고 자고 있을 때에도 클라크는 때로는 낄낄대고 때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싸매고 여러 번 읽으면서 모든 신문의 연재소설을 독파해 나갔다.
한번은 루산이 실눈을 뜨고 클라크가 하는 양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눈이 벌게지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아닌가?
클라크의 몸에 이상이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란 루산이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 아, 아니에요, 기사님!”
클라크가 화들짝 놀라며 신문을 감추려다 말고 우왕좌왕했다.
루산은 클라크가 읽고 있던 신문의 연재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주무르자 붉은 입술에서 간드러지는 신음이 터져 나오고 촉촉해진······.’
루산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실 삽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루산은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후다닥 신문을 덮었다.
그러고는 어른스러운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크흠! 음, 뭐, 나쁜 건 아닌데, 네가 연구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구나. 이건 내가 연구할게.”
루산이 <경마 신문>을 가져갔다.
클라크의 눈에 잠깐 원망과 아쉬움의 눈빛이 서렸지만, 똑똑한 소년은 얼른 상황을 받아들이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운동 신문, 일요일 신문, 사건과 사건이 남아 있으니까 괜찮아.’
그러나 정신이 확 깬 루산이 모든 연재소설을 다 훑어 문제적인 소설이 실린 신문을 다 압수해 갔다.
클라크는 인생 최초로 고용주에게 반항을 시도할까 하다가 루산의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고 포기했다.
“2년 뒤부터는 네가 연구해.”
두 사람은 변경에 도착할 때까지 신문을 연구했다.
중간에 멈출 때마다 그 지역 신문을 몇 종씩 구입해 라돔 역에 도착할 때는 신문이 무려 80여 종이나 되었다.
***
“캡틴이 말한 내용에 대해 논의해 봤는데, 단장님과 통치자께서 아주 깊은 관심을 보이셨어요.”
8군단 기동 전단장이 루산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요. 개척민이 지원해서 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적극적으로 유치해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니 얼마나 기특하냐며 칭찬을 하셨어요. 조만간 만나 뵙고 설명을 드릴 자리를 만들 테니 구체적인 계획을 짜 보세요.”
루산은 깜짝 놀랐다.
일로 황족과 대면하는 자리가 이렇게 일찍 생기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직접 말입니까?”
“왜? 싫습니까?”
“아, 아닙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필요한 지원을 말씀드려야 그에 대해 준비해 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
기동 전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당 부서의 이름을 고민해 봤는데,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더군요. 너무 광범위해서 말이에요. 그래서 일단 신사업부로 이름을 짓고 나중에 범위가 명확해지면 그때 가서 다시 이름을 정하기로 했어요. 어때요, 신사업부?”
“좋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딱 좋은 이름 같았다.
“이 부서를 어떤 식으로 운영해야 할지 몰라서 별도 부서로 독립시키지 않고 캡틴이 지금처럼 캡틴으로서 활동하면서 아이디어를 하나씩 구체화해 나가는 것으로 했습니다.”
윗사람들은 신사업부의 업무 성격과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능한 멕 나이트 파일럿 캡틴을 현재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루산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다.
최고 대우 캡틴 자리를 내던지고 신사업부를 맡을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델타 기지 캡틴 루산 보름스는 8군단 신사업부 부장을 겸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직책 수당은 한 달에 20골드. 세부적인 모든 내용은 앞으로 채워 나가기로 하죠. 신사업부와 관련된 내용은 단장님께 보고하도록 합니다.”
“단장님께요?”
“부장 아닙니까? 부장 위가 단장이죠.”
“아~!”
루산은 왠지 족보가 심하게 꼬이는 것 같았다.
전진 기지 캡틴은 전진 기지 대장의 명령을 받지만, 직무상으로는 군단 단장, 기동 전단장, 기동 전대장 아래에 위치한다.
그런데 신사업부 부장은 단장 바로 밑에 위치한다.
‘단장이 직접 신경 쓰는 부서가 되면 골치 아프겠는데?’
트리어가 상급자라면 아이디어든 다른 보고 사항이든 편하게 말할 수 있지만, 단장이 상급자가 되면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문구 하나, 단어 하나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기존 부서장들로서는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젊은 캡틴이 위계를 무너뜨리고 하늘같은 단장과 직접 통한다고 고깝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변경 생활이 고달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위로 올라가는 지름길을 만든 셈이니, 그 정도 괴로움은 감수해야지.’
루산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변경 생활 6년 차에,
기본급 180골드
캡틴 수당 10골드
신사업부 부장 수당 20골드
총 210골드를 매달 받게 된 것이다.
성과 보상금을 제외하고 따박따박 나오는 급료가 이 정도였다.
변경 최고 대우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여기에 성과 보상금을 합치면, 군단 멕이 아닌 자신의 멕을 소유하고 있으며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마나 연료봉을 포함하여 각종 소모품과 부품을 무상으로 제공받게 되었으니, 1년에 1만 골드 수입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언뜻 계산해 봤을 때 작년, 재작년 수준으로만 사냥해도 1년에 3만 골드에서 5만 골드까지 가능할 것 같았다.
장밋빛 전망에 루산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에게 가문을 멸망시킨 세력이 준동하는 바깥세상이 어둠의 땅이라면 이곳 변경은 밝은 미래가 펼쳐진 기회의 땅이었다.
그래서 변경을 희망의 땅으로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앞으로 자주 보겠군요.”
“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전단장님.”
“뭘, 내가 잘 부탁드려야죠.”
인사를 마치고 본부를 나오던 루산은 갑자기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주 본다고? 아!”
신사업부 일과 관련하여 보고하고 일을 진행하려면 본부까지 와야 한다.
라돔 시에서 델타 기지, 델타 기지에서 레인보우 시티까지 가려면 마차로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린다.
‘아! 죽었다!’
루산은 도로 포장 사업을 신사업부의 첫 번째 사업으로 요청하겠다고 다짐하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렌커의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
“네.”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움직였다.
“렌커 씨, 관광 사업 한번 해 볼래요?”
“관광 사업이요? 지난번에 제안하신 다는 게······.”
“네. 용감하고, 붙임성 좋고, 성실하니 충분히 잘 하실 것 같아서요.”
“그게 뭘 어떻게 하는 건가요?”
루산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바덴에게 들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렌커가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정신 빠진 귀족들 주머니를 터는 일이라 이 말씀인가요?”
“하하하! 비슷합니다. 하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죠. 그건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거니까요. 고객에게 만족을 드리는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겁니다. 마차를 몰고 목적지에 태워다 주는 것도 결국 비슷한 것 아니겠어요? 목적이 다를 뿐이죠.”
“음······.”
“귀족, 부자들은 오가는 돈의 단위가 달라요. 만족스럽기만 하면 기꺼이 10골드, 100골드도 척척 낼 겁니다. 게다가 이 사업은 손님 모집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노바에서 모집해 준 손님을 잘 모시기만 하면 되는 거죠.”
마침내 렌커가 루산의 설득에 넘어왔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기사님!”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클라크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기사님이 하시면 잘하시겠는걸?’
***
루산은 한 열흘 푹 쉬다 오라며 클라크를 고향 집에 내려 주었다.
클라크는 부모님과 다섯 명의 동생들을 볼 생각에 기쁘면서도 그 좁고 시끄러운 집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틀만 있다가 갈게요. 기사님께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
루산은 살짝 감동했다.
“네가 연구를 도와주면 나야 좋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동생들이 서운해 하실 테니 다섯 밤은 자고 오렴.”
클라크는 동생들 등쌀에 시달릴 생각에 벌써부터 식은땀이 났다.
“그럼 세 밤만 자고 갈게요.”
“정 그렇다면 네 밤만 자고 와.”
“흐유! 네, 알겠습니다.”
렌커의 마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클라크의 어깨가 왠지 모르게 축 처져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동생들이 나오고 노바에서 사온 쿠키를 받은 동생들이 기뻐 날뛰자 클라크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루산은 클라크의 집에서 멀어졌다.
“다복한 집이네요.”
렌커의 목소리에 복잡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물으면 사연이 술술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루산은 묻지 않았다.
마음에 그럴 여유도 없었고, 아직 그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가깝지도 않았다.
루산은 잠시 풍경을 감상하다 다시 사업 이야기를 하기도 하면서 델타 기지에 도착했다.
“렌커 씨, 조심해서 가세요.”
“네, 기사님. 편히 쉬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렌커가 떠나고 루산은 집으로 들어갔다.
아늑하면서 편안한 것이 마치 고향 집에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은 오랜만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면 늘 클라크가 인사하고 밥을 차려 주고 하루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외로움이 확 밀려왔다.
루산은 저녁으로 먹기 위해 라돔 역에서 사온 빵과 잼을 먹고 목욕을 했다.
장거리 여행에서 묻은 때와 먼지가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상쾌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다시 적적하고 외로웠다.
그때 왜 하필 그것이 생각났는지 알 수 없었다.
루산은 <경마 신문>, <운동 신문>, <일요일 신문> 그리고 <사건과 사건>에 실려 있는 연재소설을 자세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 이러려고 클라크에게 휴가를 준 건 아닌데······.’
살짝 자괴감이 들었지만, 클라크에게 휴가를 준 것은 참 잘한 일 같았다.
‘구독하자.’
루산은 신문 구독을 결심했다.
오로지 변경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연구 목적이었다.
연구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