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여행자 보험은 렌커 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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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에 이어 6차 이주민이 들어오면서 1차부터 3차 이주민들은 자신의 농지를 경작하고 4차부터 6차 이주민들은 개척 건설에 투입되었다.
1, 2, 3차 이주민들 가운데에서도 건설 현장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십장이나 숙련공 대우를 받으며 농사 대신 건축업으로 전업하기도 했다.
제재소, 벽돌 공장, 석회석 광산, 석회석 공장, 봉제 공장에 취업하거나 식당, 식품점, 빵집을 열기도 했다.
일부는 면접을 거쳐 행정 요원으로 뽑히기도 하고 일부는 개척병으로 선발되었다.
자신의 농경지에서 농사일을 하는 주민들도 열흘에 이삼일은 일당을 받고 개척 건설 작업에 동원되었다.
이 모든 것은 변경 군단의 개척 매뉴얼대로 진행되는 것이지만, 레인보우 시티의 개발 속도는 매뉴얼이 상정하고 있는 시간보다 훨씬 빨랐다.
“일반적인 개척민과 달리 피란민이 대거 유입되었다는 점, 이를 수용하기 위해 개척병을 매뉴얼과 다르게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 델타 기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식량과 자원의 부족을 겪지 않았다는 점, 정착 초기에 엄격한 법 집행으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일사불란한 개발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점. 이 정도가 레인보우 시티의 순항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산이 보고하자 성질이 고약해 보이는 60대 노인이 눈에 보일 듯 말 듯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8군단 단장 알렌 뮌스터였다.
그 옆에 약간 통통한 몸집을 지닌 20대 후반의 남자가 선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는데, 그가 바로 변경 제8구역의 통치자 율리안 볼프스 마이센이었다.
변경 제8구역은 제7구역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율리안의 아버지가 초대 통치자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자신의 측근인 경호 기사 알렌 뮌스터와 단 둘이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8구역을 이만큼 일구어 냈다.
원래 변경 구역이 분리될 때는 상당한 갈등이 일어나고는 했다. 본 구역에서는 인력과 자원을 떼 주지 않으려 하고 분리 구역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려 하기 때문이다.
8구역이 분리되었을 때 7구역에서 거의 아무것도 내주지 않으려 해서 율리안의 아버지와 알렌 뮌스터는 그야말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황궁, 정부, 군부, 친인척, 귀족, 사업가, 마법 연구소를 접촉해 지원을 얻어 내고 자금을 빌려 지금의 8구역과 8군단을 만든 것이다.
“통치자께서 그때 얼마나 몸 고생,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몰라. 7구역 놈들이 조금만 지원해 줬더라도 그렇게 빨리 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8구역 단장 알렌 뮌스터는 술 한 방울만 들어가도 눈물을 흘리며 초대 통치자를 그리워하고 7구역을 욕했다.
단장이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8구역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 인물이라 율리안이 비록 황제와 5촌 관계인 황족이고 8구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기는 해도 단장의 의사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통솔과 경영을 배우는 젊은 후계자인 것이었다.
“캡틴 보름스는 자신의 공을 별로 내세우지 않는군요. 레인보우 시티가 이처럼 잘나가게 된 첫 번째 요인은 캡틴 보름스라던데, 아닌가요?”
율리안이 빙긋이 웃으며 루산을 칭찬했다.
자기 주머니에 넣어도 무방한 개척 장려금을 요원들과 개척지 개발에 모두 쏟아부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크흠!”
단장이 헛기침을 하며 율리안을 제지했다.
‘거 참, 아랫사람 함부로 칭찬하면 안 된다고 누차 말하지 않았습니까? 변경 놈들은 함부로 띄워 주면 안 된다니까요!’
‘이크! 미안합니다.’
율리안이 멋쩍게 웃으며 물러나 앉았다.
“커험! 그래, 레인보우 시티 이야기는 그만하면 됐고, 신사업부 사업 계획에 대해 들어 볼까?”
“네.”
루산이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내용 - 바덴이 보내온 계획서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종합한 기획안을 브리핑했다.
“신사업부 사업 계획의 모토는 ‘가고 싶은 변경’입니다.”
“가고 싶은 변경?”
“네. 가고 싶은 변경이라는 모토 아래 ‘희망의 땅, 기회의 땅, 감동의 땅’이라는 세부 표어를 제시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신사업부가 실행할 사업이 이 말에 다 들어 있습니다.”
“시작은 거창하군!”
비꼬는 듯한 단장의 촌평에 루산은 살짝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확신이 있었기에 가슴을 좍 펴고 통치자, 단장 그리고 본부의 지원 부서 책임자들과 눈을 마주친 뒤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기존의 변경 이미지는 도시 빈민이나 빚더미에 파묻혀 파산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받아 변경을 개척해 왔죠. 쉽게 말해 손님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식당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맛도 좋고 질도 좋은, 썩 괜찮은 식당인데, 배고픈 사람들이 마지못해 가는 식당이라고 말하는 게 안타깝고 억울하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존심도 상하고 그랬습니다.”
“알고 보면 썩 괜찮은 식당이라··· 비유가 좋아. 역시 배운 사람인가?”
율리안이 호응해 주자 루산은 기분이 좋았다.
통치자에 대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쯧!”
단장이 눈치를 주자 율리안은 다시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하게.”
“네.”
루산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썩 괜찮은 식당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면 어떨까요? 그래서 우리 식당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겁니다. 그러면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들이 마지못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기회를 잡기 위해 오지 않을까요?
이것이 신사업부 출범의 계기입니다.”
시작이 좋았다.
통치자와 부서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단장은 아무 반응 없이 그저 계속해보라는 듯 눈짓을 한 번 했다.
“변경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한 장기 프로젝트로 두 가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첫째, 신문 연재소설.
둘째, 일기나 수필 형식의 ‘변경 생활기’ 신문 수록
“첫 번째는 이미 네 명의 작가를 섭외하여 계약을 마쳤고, 두 번째는 제8구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 생각입니다. 입상자에게는 당연히 상금을 수여해야죠. 그래야 좋은 글이 많이 모이겠죠? 그래서 선정된 글은 신문사에 접촉해 꾸준히 실어 보려 합니다.”
“오! 아이디어도 좋고 추진력도 훌륭하군요!”
율리안이 감탄하고 부서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단장만 반응을 하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눈짓으로 재촉했다.
“이것은 단기간에 효과가 있기 어려워 개척민 모집 광고를 신문에 내 볼까 합니다. 단순 모집이 아니라 사연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집과 땅을 주고 정해진 시간 안에 누가 가장 많은 결실을 얻는지 보는 것이죠. 그래서 우승자에게는 포상을 하는 겁니다. 이 역시 진행 경과를 흥미진진하게 풀어 신문에 연재할 수 있도록 구상하고 있습니다.”
“변경 지원자를 기다리지 않고 포상을 미끼로 개척민을 모집한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모집된 개척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림살이가 얼마나 나아지는지 신문에 공개하는 겁니다.”
“흐음.”
“우승자 상금이 클수록 개척촌에 가서 인생을 역전해 보려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올 것이고,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집과 땅이 생긴 것이고 우리로서는 개척민이 늘어나는 것이죠. 게다가 그들의 풍성한 이야기로 개척지에서의 삶을 널리 알릴 수 있으니 좋지 않겠습니까?”
“한 가지 방법으로 세 가지 효과를 노린다는 것이군.”
단장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계속해 보게.”
“네, 우리는 변경에 가난한 사람만 불러온다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부자들도 와야죠. 그래야 돈이 많이 모이고, 그 돈으로 안전을 확보할 전투 요원과 멕 나이트를 늘려 더 많은 개척민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돈을 모은다?”
“네.”
변경 사업
변경 투어
“솔직히 사업은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이곳에서 나오는 자원이 어떻게 유통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른 부서장님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업가들이 어떤 아이템에 혹할지 고민을 해 봐야지요.”
단장이 회계부장과 개척부장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 투어는 말 그대로 거친 야생이 살아 숨 쉬는 이 땅을 만끽하게 하는 것입니다. 안전을 확보해 주면서 괴수를 구경하고, 거대한 원시의 숲을 탐탐을 타고 지나가고, 저 깊은 땅으로 들어가 장엄한 폭포도 보고··· 기회를 봐서 소형 괴수 소탕에 참여도 시켜볼 생각입니다.”
“오! 관광이라···, 나도 한번 해 보고 싶군요. 먼저 해 봐야 귀족들한테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율리안이 관심을 보였다.
단장도 반대하지 않았다.
“구체적 계획이 잡히면 모시겠습니다.”
루산은 신사업부의 계획과 관련하여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나 이 자리에서 밑천을 다 드러내지는 않기로 했다.
“희망의 땅! 기회의 땅! 감동의 땅!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성공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고, 즐거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격한 감동을 주는 사업. 이를 통해 우리 변경 제8구역은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짝짝짝!
율리안이 감탄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다가 단장이 가만히 있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단장이 입을 열었다.
“다 좋다 치자.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계획은 모든 변경에 다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 8구역에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돈은 우리가 쓰고 이익은 다 같이 본다? 이해가 안 되는데?”
루산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 보았다.
“선점의 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선점의 효과?”
“네. 반달 호수 지역에 들어간 본부 개척단이 델타 기지 개척단보다 규모가 두 배 이상 크지만 발전 속도는 우리 델타 기지 개척단을 따라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흐음.”
“신문 연재소설, 개척민 모집 광고, 수기 연재, 사업 유치, 변경 투어··· 이 모든 것이 8구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다른 구역에서 저게 뭐지? 하고 지켜보다가 나중에 효과가 있는 것을 보고 따라하겠지만, 그때 이미 우리는 선점을 해서 사람과 돈의 흐름이 8군단으로 향할 것입니다. 먼저 시작한다는 것은 더 많은 사업 아이템, 더 많은 관광 루트를 개발해 냈다는 것이고, 사람들도 변경 하면 8구역으로 간다는 생각이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죠.”
브리핑이 끝이 났다.
지금까지 표정 변화 없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듣기만 하던 단장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
그제야 율리안도 마음 놓고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짝!
부서장들도 동참했다.
짝짝짝!
짝짝짝!
“그래,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가?”
단장이 물었다.
“연재소설 창작 지원금, 공모전 상금, 개척민 모집 광고비, 진행비 등 사업비 1만 골드, 본부 상주 신사업부 요원 2명, 본부 신사업부에 마나 통신기 한 대, 취재 기자 2명, 취재 기자를 지켜줄 정찰병 2명, 탐탐 4마리. 일단 이 정도입니다.”
단장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아니, 돈이 땅 파면 나오는 줄 아나? 마나 통신기는 지통실 통신기 일단 같이 쓰고, 사업비는 절반으로 줄여! 인력은 지원해 주지. 성과를 봐서 차차 늘려 나가.”
“···알겠습니다.”
루산은 살짝 풀이 죽은 표정으로 대답하고 브리핑을 마쳤다.
그러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5천 골드를 예상하고 1만 골드를 불렀던 것이다.
어차피 나중에 회계부에서 다 따져 볼 테지만, 남의 돈으로 하는 사업, 이왕이면 크게 시작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금방 또 봅시다.”
어깨를 툭툭 치며 미소를 짓고 나가는 젊은 황족에게 루산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호의가 담긴 목례를 했다. 그런 뒤 단장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본부를 나왔다.
그리고 본부 무기 제작소에서 1.8미터짜리 장검 네 자루를 받아 탐탐에 실었다.
전에 주문해 둔, 아트라스 대검에 익숙해지기 위한 훈련용 장검이었다.
고가의 수제품이 아니라 주문 규격에 맞게 철판을 잘라 열처리하고 회전 숫돌로 날만 세운 것이었다.
“이가 빠지고 휘어지면 또 말씀하세요, 캡틴. 계속 만들어드릴 테니까요.”
“고마워요.”
루산은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장검 네 자루를 실은 탐탐을 타고 라돔 역으로 갔다.
역 앞 빈 사무실에 처음 보는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변경 투어>
루산이 필요한 자금의 100퍼센트를 투자하기로 하고 렌커가 운영을 맡기로 한 여행사.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루산의 장담과는 달리 오랫동안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사무실 앞으로 과거 렌커의 동료 마부들이 비웃음을 날리며 지나갔고, 렌커가 불안한 마음에 쪼그리고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는 루산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반색하며 일어났다.
“기사님!”
“갑시다.”
“어디를요?”
“본부 승인이 떨어졌거든. 투어 루트를 짜 봐야죠.”
렌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는 얼른 자신의 마차에 올라타고 루산의 탐탐을 따라갔다.
렌커의 마차 바깥 면에는 대충 페인트로 휘갈긴 것이 아니라 고급스럽게 작업한 글씨가 도색돼 있었다.
변경 투어
세상의 끝에서 무한한 즐거움과 감동을 드립니다.
여행자 보험은 변경 투어 옆 사무실 렌커 보험에 문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