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나는 이런 거 못 해요
***
<변경 제8구역 수기 공모전>
변경에서의 생활과 체험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1,000단어 안으로 작성하여 각 지역 공무소 수기 공모전 담당자에게 제출한다.
감동과 희망을 주는 작품을 선정하여 상금과 특전을 수여한다.
대상: 제8구역에 사는 모든 사람
기한: 7월 마지막 날까지(공무소에 접수된 작품)
심사: 예심 본부 요원 선정, 본심 초청 심사위원 선정
상금: 대상 100골드, 우수상 50골드, 장려상 10골드
특전: 본부 취재 기자 특별 채용, 유수 신문 수록
제8구역 모든 개척 도시와 개척촌에 공고문이 크게 붙었다.
“이게 뭐시다냐?”
“신경 끄쇼. 까막눈한테는 소용 없으니께.”
그러나 한 달에 10골드 벌기가 수월하지 않은 세상에서 종이 한 장을 채워 100골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큰 유혹이었다.
게다가 본부 요원 특채에 자신의 작품이 신문에 실리는 영예까지!
제8구역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졌다.
[루산, 나도 해도 되는 거야? 아니면 개척민만 해야 하는 거야?]
군단 요원들이 마나 통신기를 사적으로 이용하면서까지 물어 왔다.
“공고에 적힌 대로야. 8구역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해. 개척민뿐 아니라 군단 요원들도 포함되는 거지. 나이, 성별도 상관없어.”
[오케이!]
하루하루 새로운 삶터를 개척해 나가느라 땀에 푹 절어 있던 사람들이 시원한 물로 목욕하고 저녁을 먹은 뒤 식탁에 다시 모여 앉았다.
은은한 촛불 아래에서 사람들은 종이 한 장을 펼쳐 놓고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썼다 지우고 다시 썼다 지우기만 반복하는 사람, 한 글자를 쓰자마자 힘겨웠던 시절이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아 내는 사람, 열심히 무언가를 써 나가는 부모와 언니 오빠 사이에서 낙서하는 철부지.
점심시간 짬을 이용해 나무 아래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몇 글자 끄적거리는 정비 요원, 거대 괴수를 사냥하고 느껴지는 떨림을 기록하고 싶은 파일럿, 손님 없는 시간에 홀 청소를 마치고 주저주저하다 탁자 위에 종이를 펼치고 앉은 술집 아가씨.
“쳇! 어차피 되지도 않을 거 괜히 힘 빼지 말라니께!”
누군가는 비웃음을 날렸지만, 변경으로 오기까지 가슴에 쌓인 한과 슬픔이 많은 만큼 사람들은 쏟아내고 싶었다.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람들은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히 다루며 자신의 지난날과 현재, 그리고 앞으로 만나고픈 희망의 날을 종이 한 장에 채워 나갔다.
홍보용으로 써먹겠다는 루산의 의도와 다르게 변경 제8구역 - 어쩌면 모든 변경 지방을 통틀어 - 최초의 문화 행사였고, 사람들에게 정화와 위로의 시간이었다.
[부장님, 이 많은 걸 둘이서 어떻게 추려냅니까?]
신사업부로 배정된 바네사가 본부 지통실 마나 통신기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노바 대학에 이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대요.”
[갑자기 무슨······?]
“지원자가 하도 많아서 지원서를 쌓아 놓고 부채질해서 가장 멀리 날아간 것들을 뽑았대요. 그렇게 뽑으나 애써 선별하나 똑같다고.”
루산은 전에 바덴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해 주었다.
어떻게 들어가기 어려운 노바 대학 법학과에 지원해서 합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바덴이 그렇게 농담으로 대답한 것이다.
루산은 웃었고 바덴도 웃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웃지 않았다.
통신기 너머로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공감대 없는 농담의 결말.
“노노! 읽어 보고 10분의 1로 추려 줘요. 나머지는 나도 같이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통신을 마친 루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레인보우 시티 개척촌 건설을 신경 쓰면서 변경 투어 루트와 아이템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와중에 본부까지 가서 공모전 응모작 심사도 해야 했다.
탐탐을 타고 빠르게 달려도 두세 시간은 걸리는 거리.
신사업부 부장 직책 수당 20골드를 받는다고 좋아했는데,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초.
마침내 기다리던 첫 번째 변경 투어 팀이 들어왔다.
총 12명.
그중 8명은 바덴이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에 들렀던 손님들 가운데 변경 투어와 변경 사업 안내 책자를 보고 관심을 보이는 손님들을 낚아챈 유료 고객이고, 나머지 4명은 무료 고객이었다.
무료 고객이지만, 중요도는 결코 유료 고객 못지않았다.
바로 변경 체험 기회를 주기로 약속한 연재소설 작가들이었던 것이다.
“변경 투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먼저 손해 보험에 가입하시겠습니다. 8군단과 변경 투어는 고객님들의 안전을 보장하지만, 그래도 귀하신 분들이라 만에 하나라도 다치셨을 때 손해를 보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안내에 따르지 않아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 유의하셔서 반드시 가이드와 안전 팀의 지시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렌커가 그동안 수없이 연습한 대로 손님들을 쥐락펴락하여 자연스럽게 여행자 보험에 가입시켰다.
자산가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신체와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위험 지역 여행자 보험료 5골드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지만, 어차피 변경 투어 비용으로 이미 500골드를 지불한 상태에서 아낄 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첫 수입이다!’
렌커는 감격스러웠다.
루산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안전이기 때문에 관광객이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손님이 다치거나 죽지 않는다면 보험사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가는 금액.
변경 투어 비용은, 손님을 유치한 바덴과 여행사 그리고 군단 본부가 나누는데, 이 보험료는 나누지 않는 금액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컸다.
보험 가입 후 손님들은 거대한 일산을 설치한 붐붐 수레를 타고 본격적인 투어를 시작했다.
붐붐-
“오호~ 드디어 시작인가!”
날은 더웠지만, 일산 아래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했다.
신기한 동물이 끄는 거대한 수레를 타고 나무와 풀이 무성히 자란 원시의 풍경을 보며 이동하는 것은 이국적인 느낌을 주어 무척 신선했다.
관광객들은 기분 좋게 투어를 시작했다.
간간이 만나는 개척촌의 풍경은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켰고 중간중간 가이드가 설명하는 사업도 구미가 당겼다.
식사 때에 맞춰 제공되는 음식들은 거친 듯 보였지만, 세심하게 준비하고 적절히 시중을 들어 주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본격적인 변경 투어가 시작되었다.
숲속을 지나는 케이블카, 장엄한 폭포, 소름끼치는 깊이의 계곡, 두려움이 이는 광대한 풀숲, 멕 나이트 순찰 동행, 탐탐 경주, 빠져들 것 같은 밤하늘, 구슬땀을 흘리는 개척 건설 현장··· 무엇 하나 가슴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압권은 사냥이었다.
인간의 영역을 넓히고 지키기 위한 변경에서의 처절한 싸움.
그 장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 참여도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그 비싼 투어 비용을 지불하고 온 것이 아닌가!
“직접 참여해 보시고 싶은 분들은 중갑을 착용하셔야 합니다. 멀찍이서 구경만 하시겠다 하는 분들도 경갑을 착용하고 대기하십시오.”
탐탐에 탄 루산이 말했다.
그는 뙤약볕 아래에 온몸을 가리는 두꺼운 중갑을 착용하고 키만큼 큰 대검을 탐탐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유료 손님들은 물론 무료 손님들도 사냥 참여를 원했다.
작품에 쓸 수 있는 생생한 느낌을 직접 겪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오우, 이런! 나는 이런 거 못해요.”
대물 괴담의 작가 블랑카가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작가적인 욕망이 약한 것은 아니어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신선한데?’
필설로는 온갖 몬스터를 찢어 버리고 알몸으로 여자를 공중제비 돌리며 별의별 짓을 다하는 사람이 피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에 루산은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관심의 대상이 뒤로 빠지자 어깨를 으쓱하고 일단 다른 사람들의 무장 상황을 확인했다.
작가를 포함한 11명의 관광객들이 안전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중갑을 착용했다.
그중 일부는 발리스타 수레에 올랐고, 일부는 더 용기 내어 삼지창을 들고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 자원하기도 했다.
챙챙챙챙!
꽝꽝꽝꽝!
뜨거운 변경의 태양이 내리쬐는 가운데 갑옷을 착용한 개척병과 관광객들이 소나기에 젖은 것처럼 땀에 젖은 채 소형 괴수를 밀어붙였다.
캬아오!
쿠와앙!
퇴로가 없는 막다른 절벽으로 몰린 괴수들이 광분해 날뛰자 방패벽이 들썩들썩했다.
방패병들은 솜털이 쭈뼛쭈뼛 섰다.
“너무 많이 들어간 거 아니야?”
“어쩔 수 없지.”
방패병들이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발리스타!”
지휘관의 호령에 발리스타 포병들이 괴수를 조준하며 관광객들에게 발사 장치를 당기라고 지시했다.
푸슈!
푸슈!
워낙 괴수가 많아 대충 그 방향으로 쏘면 다 맞았다.
“이햐!”
관광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워낙 괴수가 많이 들어가 발리스타로는 다 처리할 수 없었다.
탐탐 기병과 삼지창병을 투입할 시점이었다.
그때 델로아가 투입 명령을 내리려는 현장 지휘관을 제지했다.
“너무 많아! 이대로 방패벽 열면 다 튀어 나온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방패벽을 뒤로 물릴까요?”
“아니야! 물러나면서 방벽을 유지하는 것은 훈련이 부족해서 위험해. 그대로 버티고 내 앞에만 방패벽 열어.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발리스타의 대형 화살이 계속해서 방패벽 너머로 날아가고, 석궁수들이 쏘는 화살 역시 방패벽 너머의 괴수들에게 이쑤시개처럼 꽂혔다.
그 와중에 중갑을 착용해 전신을 가린 루산이 자신의 키만큼 큰 대검을 들고 방패벽 뒤로 다가갔다.
그 모습은 누구에게나 눈에 띄었다.
“오호?”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블랑카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옆에서 조준을 다 해주고 발사 장치만 건드리는 관광객들의 사냥은 전혀 흥미가 없었다.
변경의 진짜 사냥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기이한 대검을 든 루산이 멕 나이트 파일럿이면서 이 지역 책임자라는 것은 이미 투어를 하는 동안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명령을 받은 방패병 네 명이 문짝만 한 판금 방패를 옆으로 열자 높은 압력에 의해 괴수들이 그야말로 둑 터진 저수지처럼 밀려나왔다.
루산이 키처럼 긴 대검을 사선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길이가 긴 만큼 동일한 회전 속도로 움직였을 때 대검 끝의 이동 속도는 훨씬 빠르다.
루산은 이 검첨의 속도를 이용해 오로지 칼끝으로 소형 괴수들을 베어 나갔다.
촤악-
촤악-
란드라트의 머리가 사선으로 잘리고 사이티의 목덜미가 깊게 베였다.
녀석들은 밀려나오던 힘에 못 이겨 루산의 좌우를 지나 푹푹 쓰러졌다.
이 훈련용 대검은 길이가 길고 폭이 넓은 만큼 보통의 대검보다 훨씬 무거웠지만, 20년 동안 검을 수련해 온 루산은 그 무게를 버텨 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용해 절삭력을 높였다.
긴 대검의 끝에 걸린 괴수들의 단단한 머리뼈와 목뼈가 모조리 잘려 나갔다.
루산의 좌우에서 쓰러지는 괴수들이 피 분수를 뿜으며 그의 중갑을 더럽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랑카가 탄성을 터뜨렸다.
“이거지! 분수를 뿜게 만드는 기사!”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스토리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블랑카가 자신을 보고 새로운 스토리를 짜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루산은 대검 훈련을 겸해 포위망 안에 갇힌 괴수들의 밀도를 어느 정도 낮춘 뒤 뒤로 살짝 물러났다.
탐탐 기병들과 삼지창병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고, 관광객들은 삼지창병의 보호를 받으며 괴수 사냥의 짜릿한 손맛을 보았다.
변경에서 특별한 체험을 한 관광객들은 변경 본부와 사업 상담을 진행했다.
소설가들은 신작의 영감을 얻고 수기 공모전 본선 심사를 도와 주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얼마 뒤 블랑카의 신작이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