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헌금이라도 해야 하나
***
“나 참! 오늘부터래요, 오늘부터.”
“크크크!”
트리어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기분이 너무 우울해서 누군가에게 털어 놓고 싶었던 루산은 레인보우 시티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본부 개척 기지에 있는 트리어를 찾아왔던 것이다.
“큭큭, 호른 영감도 정말 대단하다.”
전진 기지를 이전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몸만 빠져나오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장비와 시설을 통째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새로 들어갈 기지에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한다.
몇 달은 족히 걸리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부터’라고 말한 것은 당장 델타 기지 개척단을 이끌고 있는 루산의 권한을 거두겠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개척 장려금.
루산의 주머니로 들어가던 것이 호른 영감에게로 가게 된다.
“이제 슬슬 개척 장려금 모아 나가려던 시점인데······.”
“네가 너무 잘해서 그런 거야. 개척 장려금, 네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개발했으면 됐잖아. 네가 너무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호른 영감 주머니도 바닥이 났겠지.”
“영감님 주머니가요?”
루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그 영감이 명문 귀족도 아니고, 큰 사업가도 아니고, 정부도 아닌데, 돈이 무한정 나오겠어? 개척 장려금도 너한테 줘 버렸으니 고스란히 자기 돈으로 사업한 건데, 그 많은 사람들한테 집 지어 주고 먹여 살렸으면 떨어질 때가 됐지. 지금까지 대 준 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하지만 말이야.”
루산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호른 영감의 주머니 깊이를 알아낸 것이다.
그동안 델타 기지에서 레인보우 시티에 지원한 금액은 계산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데?’
당연히 엄청난 액수이기는 하지만, 막연히 알고 있을 때와 달리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트리어에게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남의 떡이었으니까 잊어 버려.”
“그래야지 어쩌겠어요.”
“그건 그렇고 온 김에 할 말이 있어.”
“······?”
“전에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멕 나이트 시제기를 만들려는 것 같다고 했잖아.”
“그랬죠.”
가프 마법 연구소의 칼리슈와 세르펜스를 잡으러 갔다 오는 길에 들은 이야기로 추측한 것이었다.
“알아봤더니 여기저기 수군거리더라. 아직 업계 사람들만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한번 투자해 볼까?”
“무슨 투자를 해요?”
“가프에서 멕 나이트 몸체 부품을 납품할 회사를 선정하려는 모양이야. 시제기뿐 아니라 양산형으로.”
루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벌써 그런 것까지 알아봤어요?”
“뭐가 벌써야? 네가 그 얘기를 한 게 다섯 달 전인데.”
“그야 그렇지만······.”
“세 군데가 최종 후보에 올랐는데, 그중 한 곳이 눈에 띄더라고. 간간이 시제기 부품을 만들거나 단종 부품 주문 제작을 해 오던 회사인데, 기술력도 좋고 사장님 마인드도 멋지지. 무결점을 추구하는 원칙주의자야. 잘못 만들면 깨지잖아.”
“그렇죠.”
육중한 무게를 지탱하고 강한 충격을 받기 때문에 멕 몸체 부품이 깨지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주 잘 만들어야 한다.
“어쨌든 그 회사가 이제 양산형까지 확장하고 싶은가 봐. 그런데 규모가 작아.”
“그렇겠죠. 주문 제작만 하던 회사라니까.”
“그래서 말인데, 투자를 해 보는 게 어떨까 해. 규모만 늘리면 거의 이 회사로 낙점인 분위기거든.”
“진심이에요?”
“그럼, 내가 너 붙잡고 농담하겠냐? 우리처럼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평생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후 대비 해 놔야지.”
“쳇! 벌써 영감 흉내 내는 거예요. 30년은 더 현역으로 뛰시겠구먼.”
“큭큭! 그렇게 봐 준다니 고맙다만, 농담하는 거 아니야. 양산형 멕 나이트 몸체 부품 납품만 확정되면 회사 가치 엄청 오를 거 아니냐? 구멍가게가 대기업이 된다니까?”
“많이 듣던 소린데? 사기 당한 피해자 인터뷰······.”
“초 치지 말고! 6만 골드면 지분 절반 준대.”
“이미 접촉까지 하셨어요?”
“그럼! 쉬는 날 다녀왔지. 너 3만, 나 3만 어때?”
“휘유~ 부자시네. 그 돈이 어디서 났어요?”
“변경 파일럿 12년 차다. 거기에 처갓집에서 좀 땅겨 오면 얼추 맞출 것 같으니까 너만 마련해 봐.”
“집안 망한 거 다 아시면서······.”
“야! 집안 망해서 돈 없다는 놈이 3만 골드나 들여서 멕 조립하냐? 군단 멕 안 타니까 이제 사냥 수입 배당금 엄청날 거 아니야? 괜히 엄살 부리지 말고 같이 가자. 이거 확실한 거야. 너랑 나랑 알짜 회사 지분 절반을 가지는 거라고.”
루산은 생각해 본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사실 예전 같으면 생각해 본다는 말도 하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사업이니 투자니 하는 것은 역병과 같은 것이었다. 자신은 물론 가족, 친척, 친구, 사돈네까지 망하게 만드는 몹쓸 것이다.
그러나 작년에 바덴을 만나 시작한 별장 사업, 직접 해 본 변경 투어 사업을 경험해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큰돈을 벌려면 역시 사업을 해야지!’
트리어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비록 변경에서 생활하지만 높이 올라가기 위해 책잡히지 않도록 철저하게 신변을 관리했고, 그러면서도 돈이 될 만한 곳에 자기 돈을 투자해 가족이나 친척에게 맡겼다.
라돔 시에 있는 가장 큰 식품점이 바로 트리어가 투자해 처사촌이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렌커 명의로 변경 투어를 열 생각을 한 것이다.
“분명 철저히 살펴봤을 거야. 그치, 우르사? 이번에 네 몸뚱어리를 만들어 준 회사라잖아. 믿을 만한 거 맞지?”
우훙- 우훙-
우르사가 경쾌한 엔진 소리로 호응했다.
레인보우 시티에 도착한 루산은 곧바로 바덴에게 편지를 썼다.
***
“···개척 요원들은 델타 기지 이전 부지를 확정하고 당분간 기지 건설 작업에 매진하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현 레인보우 시티보다는 서쪽에 새로 마련한 개척지에 건설하는 게 좋겠죠? 웨이브가 온다 해도 서쪽에서 올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전투 요원들도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다들 힘을 냅시다!”
“···네.”
하는 일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개척단 요원들은 시무룩했다.
레인보우 시티가 델타 기지 소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은, 그동안 루산이 자신의 판단으로 나눠 주던 개척 장려금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적응하게 될 것이다.
요원들이 나가고 마지막까지 남은 켐니츠가 루산에게 물었다.
“괜찮아?”
루산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달라진 것도 없잖아요. 개척단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경험해 봤으면 됐죠.”
지금 속도대로라면 내년까지 레인보우 시티의 인구가 3, 4만 명은 족히 될 것 같았기에 아쉬움이 컸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앞으로 하는 일이 달라질 것은 없어도 전투 요원 운용 방식은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사냥 좀 해야죠.”
“음!”
켐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델타 기지 파일럿들이 사냥 성과 보상금 수입을 포기하고 오로지 개척지의 안전을 위해 괴수도 거의 없는 레인보우 시티 주변을 순찰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루산이 주는 개척 장려금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그것이 안 나온다?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무능한 캡틴이 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사냥 루트를 개척해야 했다.
파일럿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다섯 달 동안 사냥을 못해 성과 보상금 수입이 형편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델타 기지 소속이니까 레인보우 시티의 안전을 외면할 수 없죠. 돌아가면서 멕 나이트 한 대는 레인보우 시티에 대기하고, 두 대는 순찰하는 방식을 유지할 거예요.”
“그럼 사냥은 네 대로?”
“원칙적으로 세 대죠.”
한 대씩 돌아가면서 쉬기 때문이다. 다만 본인이 원하면 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었다.
루산은 휴일에도 쉬지 않았다. 어차피 저녁이 되면 쉬는데 따로 휴일이 왜 필요하냐는 입장이었다.
“어디로 갈 건데? 사냥 말이야.”
“돈 많이 버는 곳으로?”
***
루산, 켐니츠, 하겐, 바이크.
네 명의 파일럿이 탄 멕 나이트 네 대가 멕 워커 두 대, 정찰병들, 수거 요원들을 데리고 호숫가로 갔다.
물가는 인간에게 중요한 땅이기 이전에 수많은 동물과 괴수들의 보금자리였다.
탐탐보다 높게 자란 호숫가 갈대숲으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우르사를 필두로 멕 나이트들은 정찰병과 지원 팀 요원들의 안전을 위해 갈대숲을 밟아 시야를 확보하며 전진해 나갔다.
한참을 들어가니 물과 육지를 오가며 생활하는 대형 괴수 스피노가 눈에 띄었다.
남쪽에서 발원한 강과 반달 호수가 만나는 지점에서 커다란 물고기를 사냥하던 녀석들이 낯선 침입자의 출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꾸꾸꾸꾹-
꾸꾸꾸꾹-
그러거나 말거나 루산은 껍질을 벗긴 송아지를 튼튼한 밧줄에 묶어 낚시처럼 휙 던졌다.
거대한 멕 나이트가 던진 것이라 송아지는 멀리 날아가 스피노 곁에 첨벙 떨어졌다.
- 자, 지원팀은 뒤로 충분히 물러나고 파일럿들은 준비해요. 자칫하다가는 다 터져.
루산의 지시에 지원 팀 요원들이 부리나케 물러나고, 멕 나이트들은 대검을 뽑아 들고 사냥을 준비했다.
근처에 떨어진 송아지에 놀라는 것도 잠시, 피 냄새를 맡은 스피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먹이를 먹기 위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12미터가 넘는 스피노들이 첨벙거리자 물보라가 어마어마하게 튀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루산은 신경을 집중해 밧줄을 당겼다.
스피노들이 낯선 침입자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오직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눈앞의 먹이만 보고 따라왔다.
푸학-
푸학-
쏴아아-
물이 뒤집히고 하늘 높이 치솟은 물방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떤 짐승이든 먹이를 쫓는 짐승은 무섭다.
그것이 길이 12미터가 넘는 괴수라면 더욱 무서웠다.
그것들이 돌진하면 7미터짜리 멕 나이트도 허수아비처럼 날아간다.
덩치만으로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2전대는 호숫가 괴수 소탕을 뒤로 미루고 평지 괴수를 먼저 소탕하는 것이다.
쿵쿵쿵쿵쿵쿵-
육상으로 올라온 스피노가 땅을 흔들려 달려왔다.
[이거, 너무 많이 몰린 거 아니야?]
[이미 늦었어. 정신 바짝 차려!]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사냥에 대비했다.
“옆으로 벌려!”
루산이 외치자 멕 나이트들이 간격을 더욱 벌렸다.
마침내 송아지가 멈추고, 스피노들이 입을 좍 벌리며 송아지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 밀리고 넘어지고 야단이었다.
쿵!
땅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넘어지는 녀석에 깔리면 멕 나이트도 무사하지 못할 상황, 신경이 절로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스피노 한 마리가 송아지를 물자 다른 스피노가 나머지 부위를 물고 잡아당기고, 그 사이로 머리를 비집고 들어온 녀석이 조금이라도 송아지를 물기 위해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 혼란을 틈타 우르사가 무려 7미터짜리 아트라스 대검을 들고 먹이 다툼을 하는 스피노 무리 뒤로 천천히 접근했다.
스피노 무리는 동네 야산이 출렁출렁하는 것 같았다.
우르사가 마나 진동 기능을 활성화하자 아트라스 대검이 금빛으로 일렁였다.
우르사는 스피노 뒤에서 등을 찔렀다.
푹!
대검이 두껍고 단단한 껍질을 뚫고 깊이 들어갔다.
꾸어어어!
먹이 다툼을 하던 스피노가 목을 쳐들고 울부짖었다.
그때 다른 멕 나이트들도 스피노들 뒤에서 멕 대검을 깊숙이 찔렀다.
꾸어어어어!
산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스피노의 등을 찌르는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때 바이크가 스피노의 몸에서 대검을 미처 뽑지 못하다 녀석이 요동치는 바람에 대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마나 진동 대검은 만능이 아니다. 찔린 상대가 강하게 몸을 틀어 버리면 꺾이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는 했다.
물론 해당 파일럿은 욕을 먹고 조롱거리가 된다.
[대검 파손! 대검 파손! 뒤로 빠집니다!]
[야! 이 머저리 같은 자식! 다음부터 나오지 마! 꺼져!]
하겐이 욕을 퍼부었다.
“됐어. 집중해!”
네 명이서 하던 일을 세 명이서 하려면 감당해야 할 스피노의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송아지가 괴수들의 입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스피노들은 그제야 자신들을 노리는 강철 괴물들의 존재를 눈치 채고 몸을 돌려 거세게 달려들었다.
최대한 손상 없이 처리한다는 원래 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루산은 스피노들과 거리를 두로 긴 아트라스 대검의 끝 부분으로 베기 시작했다.
아트라스 대검의 길이와 질량, 우르사의 파워를 충분히 살린 강력한 베기 공격에 스피노들의 목과 머리가 쩍쩍 갈라졌다.
스피노들의 아까운 피가 호숫가를 흥건하게 적셨다.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흐르자 피 냄새를 맡은 호숫가와 물속의 거대 괴수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푸움-
푸하학-
물을 뒤집고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 괴수의 모습을 본 루산은 갈등했다.
‘녀석들을 막으면서 생명 구슬이라도 뽑아 봐?’
그러나 사상자가 나오거나 일껏 수리한 우르사가 부서지면 그게 더 손해였다.
“오늘은 그냥 갑시다!”
[젠장! 저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그러든 말든 일단 다 빠져요! 빨리!”
멕 나이트, 멕 워커, 지원 팀 요원들이 서둘러 현장을 벗어났다.
잠시 후 스피노의 사체가 산처럼 쌓인 곳으로 호수와 호숫가에 사는 거대 괴수들이 몽땅 몰려와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돌아가는 길에 루산은 생각했다.
‘왜 이러지? 오랜만에 신전에 헌금이라도 해야 하나?’
사냥을 하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것은 1년 차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어째 일진이 영 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