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매끈하네
***
‘칼리슈의 스승이 가프 마법 연구소의 멕 나이트 프로젝트 책임자야.’
그래서 칼리슈가 비밀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칼리슈에게 부탁해 볼까?’
루산은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비밀 임무를 수행하느라 함께 여러 날을 고생했고, 나름 호감을 쌓은 사이니만큼 억지 부탁이 아니면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루산은 그 생각을 얼른 접었다.
오래 볼 사이라면 매달려서는 안 된다.
세상은 냉정하여 아무리 이쪽에 호의를 가진 상대라 해도 이쪽이 아쉬워하는 상황, 부탁하는 상황이 되면 거리를 두거나 남아 있던 호의도 접게 된다.
루산은 아버지와 다니며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합당한 부탁이라는 말도 이쪽 생각인 것이다. 듣는 사람 처지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3만 골드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설비로 남아 있으니 기다리자. 금방 또 만나게 되겠지.’
루산은 칼리슈로부터 머지않아 다시 연락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수행한 임무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했던 것이다.
세르펜스 사냥 임무를 무사히 마쳤기 때문에 조만간 다시 찾아올 것이다.
‘매달리면 안 돼. 매달리게 만들어야지.’
루산은 가프 마법 연구소에 가 볼 생각을 완전히 접고 트리어와 함께 열차 역으로 갔다.
“따끈따끈한 고기 빵 팔아요! 채소 빵도 있어요!”
루산은 아침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꼬르르륵-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왔다. 생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루산은 트리어의 팔을 붙잡고 빵집을 가리켰다.
“응? 뭐? 빵 사달라고?”
끄덕끄덕.
트리어가 피식 웃었다.
“가자! 다 사 줄게.”
“잼이랑 우유도··· 사 줘요.”
“알았다, 알았어. 가자.”
트리어는 여러 가지 빵을 섞어 네 봉지나 샀다.
잼과 우유도 샀다.
이 정도로 이번 일로 진 빚을 갚을 수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게 해 준 루산이 고마웠다.
물론 루산은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보다 배는 고프고 자기 돈은 쓰고 싶지 않아서 늘 하던 대로 트리어를 조른 것이었지만.
둘은 코부스 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며 빵을 먹었다.
남은 빵과 우유는 루산이 자신의 탐탐에 실어 집으로 가져갔다.
“그게 뭐예요, 기사님?”
“빵, 우유, 잼.”
“와! 찰스가 좋아하겠어요!”
“찰스가 누군데?”
“에밀리 동생인데······.”
‘그것도 몰랐어요?’라는 표정이었다.
루산은 몰랐다.
아기는 그저 아기일 뿐.
“아! 찰스. 난 또, 여기서 새로 사귄 네 친구인 줄 알았지.”
루산은 왠지 자신의 삶에 새로운 사람들이 덕지덕지 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지고 있는 짐이 너무나 무거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현명하게 나이 든 노인이 ‘이게 바로 사람 사는 것이지.’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 빵 맛있더라. 고기 빵 하나는 남겨 둬. 내일 저녁에 와서 먹을 거니까.”
“네, 기사님!”
나머지 빵은 다 먹어도 된다는 허락으로 이해한 클라크는 새 새끼처럼 맛있게 빵을 받아먹을 찰스 생각에 싱글벙글 빵 봉지를 옮겼고, 루산은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누가 찾아왔다.
할 수 없이 루산은 찝찝한 몸을 씻지도 못한 채 손님을 맞게 되었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
바이크 헤르스펠트.
나이 22세.
브뤼크 지방 출신.
브뤼크 기사 아카데미 졸업.
루산은 늦은 시간에 찾아온 불청객의 신상 정보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죠?”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캡틴.”
바이크의 얼굴에는 생긴 지 며칠 된 멍이 보였다.
몸에는 아마 더 많은 멍 자국이 있을 것이다.
호숫가로 처음 사냥을 갔을 때 멕 나이트 대검을 부러뜨려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못 하는 바람에 사냥을 망쳤다는 이유로 켐니츠와 하겐에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변경 군단 복무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루산은 간섭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고 수입을 올릴 기회를 날려 버린 데 대한 응징이었다.
견디지 못하면 나가는 것이고, 견딜 생각이라면 악착같이 버텨 실력을 인정받든가 들이받아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게 변경이었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생각이라면, 잘못 온 것이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 용건을 얘기해 보세요. 다른 사람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고 있다는 거 몰라요?”
바이크는 생각보다 쌀쌀한 루산의 태도에 살짝 당황했지만, 내친걸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
“어떻게 하면 캡틴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용기를 내 한 문장의 말을 끝까지 내뱉은 바이크는 멍 자국이 사라질 만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루산은 그대로 얼음, 거실 옆 식당에서 빵을 정리하던 클라크도 듣기에 민망하여 바스락 소리도 내지 못하고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뭐지? 사춘기 소년이나 할 법한 이 황당한 질문은?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말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루산은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나직하게 물었다.
“질문의 의도가 정확히 뭡니까?”
“그, 그게······?”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수련해 왔어요. 20년이 됐군요. 유소년 교육을 잘 시키기로 유명한 검술 선생을 가정교사로 두었고, 김나지움은 필센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노바 노스를 나왔고, 아카데미는 최고의 엘리트들만 간다는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습니다. 6년 동안 강도 높은 훈련과 이론 교육을 받았죠.”
루산은 신입 파일럿을 상대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기를 죽여 돌려보내려 했다.
잘난 체한다고 욕을 해도 상관없었다.
뒤에서는 누구나 욕을 하니까.
“대답이 됐나요? 이런 걸 물어보려는 거예요?”
“그저 캡틴처럼 강해지고 싶어서······.”
“나한테 수련법 같은 걸 듣고 싶다는 말인가요?”
“네!”
바이크가 반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내가 왜 그런 걸 가르쳐 줘야 하죠?”
“네?”
“내가 당신의 가정교사도 아니고 아카데미 교수도 아닌데 왜 가르쳐 줘야 하냔 말입니다.”
“······.”
“여긴 당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일터지 김나지움이나 아카데미가 아니에요.”
루산의 냉정한 말에 바이크의 어깨가 축 처졌다.
“사실 저는 브뤼크 기사 아카데미를 나와서 전선의 기동 군단으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네?”
“누가 당신의 사연을 듣고 싶다고 하던가요?”
“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그런 하소연은 신전 가서 신한테나 하세요. 일로 만났으면 일에 관한 이야기나 하죠, 우리. 이 시간에 대체 왜 온 겁니까?”
바이크는 루산이 차가운 얼음벽 같았다.
그저 답답함을 털어놓고 싶었다.
유능한 변경 선배로부터 팁을 듣고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켐니츠나 하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독종이었다.
‘나라고 성질 없는 줄 아나? 쓰벌! 나도 브뤼크에서는 알아주는 꼴통이었다고!’
바이크가 억눌렸던 울분을 터뜨렸다.
“아니, 말 몇 마디 해 주는 게 그렇게 아니꼬우면 관리직에 있지를 말든가! 이것도 크게 보면 조직 관리의 일환 아니야? 내가 당신한테 팁 받아서 열심히 갈고닦아 실력이 오르고 적응 빨리해서 사냥에 도움이 되면 결국 당신도 성과 보상금 더 받고 좋잖아! 뭐가 그리 꽉 막혔어?”
벽 건너편에 있던 클라크가 입을 떡 벌렸다.
화가 나서 지르고 본 바이크도 자신의 행동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 안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루산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볼이 씰룩거렸다.
루산은 쥐를 본 뱀의 눈빛으로 바이크를 노려보았다.
‘아! 쓰벌! 내가 미쳤지.’
바이크는 잠깐 성질을 참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나 루산은, 물론 화가 났지만, 바이크를 만난 이후로 가장 기분이 좋았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 성과 보상금을 더 받게 해 주겠다?”
“뭐···, 틀린 말 했어요?”
이미 지른 것, 바이크는 큰소리를 쳤다.
“그럼 내 지시에 따르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어요?”
“까짓 거, 하죠 뭐! 죽으라는 말만 아니면.”
“죽으면 손해지. 클라크, 종이와 펜을 가져오렴!”
“네, 기사님!”
클라크가 서둘러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이리 와 앉아서 써요.”
“뭐, 뭘요?”
“구두 약속은 증명력이 약하거든. 문서로 남겨 놔야 확실하지. 받아써요.”
바이크는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손으로 받아쓸 준비를 했다.
“바이크 헤르스펠트는 제국 법령과 사회 상규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근데 사회 상규가 뭡니까?”
“상식! 상식이라는 뜻이에요.”
“아, 네.”
“끊지 말고.”
“네.”
“바이크 헤르스펠트는 제국 법령과 사회 상규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실력 증진과 소득 향상을 위해 괴수 사냥과 변경 생활 전반에 걸쳐 루산 보름스의 명령에 따를 것을 약속합니다. 명령을 어길 때에는 1만 골드를 배상합니다.”
바이크가 깜짝 놀랐다.
“1만 골드요?”
“명령을 어기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앞의 내용을 봐. 불리한 내용이 있나.”
“어, 없습니다.”
“싫으면 돌아가고.”
“아, 아닙니다. 해요, 해! 합니다!”
이제 와서 물러서는 건 너무 위신이 상하는 일이었다.
서약서를 작성한 바이크는 아침 여섯 시까지 오라는 루산의 말을 듣고 돌아갔다.
“이게 뭐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얼른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돈독이 올랐지만 8구역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루산 보름스에게 직접 배우게 됐다는 생각에 아직 변경의 때가 덜 묻은 시골 출신 젊은 파일럿은 가슴이 벅찼다.
“기사님, 그런데 이거 법적 효력이 있나요?”
“응? 무슨 말이니?”
“약속 내용은 애매하고 위약금은 너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게 바로 사회 상규에 어긋나지 않나 싶어요.”
“그런 말들은 어디서 들었니?”
“구독하는 신문에서 봤어요.”
“오!”
루산은 감동했다.
그동안 신경을 못 써 줬는데도 교육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상관없어.”
“네?”
“이 서약서의 효력을 두고 법적 다툼까지 간다면 이미 우리 사이는 끝이 난 거지.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내 명령을 들으려 할 테고. 그렇다면 이건 사실상의 효력이 있는 거야. 나와 바이크 사이에 말이야.”
클라크가 눈을 깜박였다.
얼른 이해가 안 된 것이다.
법이라는 것은 신문에서 관련 용어를 몇 번 봤다고 금방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배우고, 실제로 몸서리치게 겪어 봐야 알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루산은 사실상 자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부하를 한 명 손에 넣었다.
어떻게 활용할지는 천천히 생각해 볼 작정이었다.
***
실력 증진이야 쉴 틈 없이 굴리고 시간이 흐르면 되는 일.
자질이 뛰어나면 많이 향상되고 자질이 떨어지면 적게 향상되는 차이는 있지만, 부단한 훈련과 그 경험이 녹아들 시간만 있으면 어떤 존재도 실력이 오른다.
탐탐, 붐붐도 훈련을 시키면 실력이 오르는데 사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루산은 일과 시작 전, 일과 종료 후에 바이크를 집으로 불러 클라크와 함께 검을 휘두르도록 시켰다.
이렇게 하면 누구나 실력이 오른다.
변경의 파일럿들이 괴수를 상대로 굳이 부단한 훈련을 하려 하지 않을 뿐이었다.
수많은 괴수를 상대하며 피부의 두께, 뼈의 단단함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면 멕 나이트 대검을 부러뜨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초보일 때 또는 방심할 때 겪는 실수일 뿐이다.
루산은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바이크에게 <괴수 부산물 수거 기능사 시험>, <괴수 해부학>을 공부시켰다.
공부가 싫어서 공부를 안 했고, 그래서 노바에 있는 아카데미에 떨어지고 지방 아카데미에 들어간 바이크는 변경에 와서 강제로 공부해야 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1만 골드라는, 자신에게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위약금으로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산이 바이크에게 신경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루산은 큰돈을 벌 수 있는 거대 괴수를 잡기 위해 호숫가에서 살다시피 했고, 간간이 변경 투어 관광객들을 안내했고, 레인보우 시티의 개척과 안전을 관리했고, 신사업부가 하고 있는 사업들의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칼리슈가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멕 나이트를 대동하고 왔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새로 만든 멕 나이트를 괴수를 상대로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당연히 8군단 단장의 허락을 받은 뒤였다.
“캡틴, 오랜만이군요.”
“칼리슈 님과의 만남은 반갑지만,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데 참······.”
루산은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와 몸이 떨렸지만, 괜히 튕기는 척했다.
“하하하, 바쁘시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칼리슈 님을 위해서라면 없는 시간이라도 기꺼이 내야죠.”
칼리슈 일행과 루산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개척지 외곽으로 빙 돌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덩치가 크고 각이 져 있어 둔해 보이는 우르사가 앞장을 섰다.
그리고 그동안 멕 소모품과 부품을 만들어 오던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야심차게 제작한 멕 나이트 ‘레오파드’ 시제기 두 대가 매끈한 인간형 몸체를 자랑하며 우르사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