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뒷걱정 말고 진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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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앞 대로를 달리던 자동 마차 한 대가 속도를 줄이더니 슈미트 은행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후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챙이 넓지 않은 아이보리 보닛 모자를 쓰고 검은색 롱 코트를 입은 여인이 흰색 장갑을 낀 손으로 서류 봉투를 들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쌀쌀한 가을바람에 코트가 펄럭이자 여인은 허리띠를 조여 맸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자동 마차가 아주 귀하지는 않지만, 가격이 결코 싸지 않았고 자동 마차를 탄다 해도 귀족들은 직접 운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가 운전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자동 마차 운전석에서 내린 젊은 여자가 자신감이 넘치는 걸음으로 은행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기존의 모든 상식을 깨뜨리는 파격!
‘훗!’
바덴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의식하지 못한 척 앞만 보고 계단을 또각또각 딛고 올라갔다.
계단 한 칸, 한 칸이 마치 성공으로 가는 디딤돌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은행 경비원의 물음에 바덴은 계단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잠시 고르고 대답했다.
“지점장님과 약속이 있어요.”
경비원이 놀라고 스케줄을 확인한 뒤 직접 지점장실 앞으로 안내했다.
곧바로 지점장이 직원 하나를 불러 바덴이 준비한 서류를 확인한 뒤 25만 골드 대출을 승인했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이 비록 네 시즌 만에 3만 골드 이상의 순수익을 올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 수익 규모만으로 지점장이 이처럼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점장은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의 회계 보고서를 확인하고 엄청난 수익률에 깜짝 놀랐다.
대규모 시설비가 들지 않는 내년부터는 금년보다 수익이 훨씬 오를 것이 확실했다.
무엇보다 지점장 본인이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의 회원이기도 했다.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직접 보고 느꼈다.
이 인기는 잠깐 반짝하고 말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류층 부인들의 인적 유대를 강화해 주기 때문이다.
우선 아이들이 좋아할 뿐 아니라, 아이들을 안전하게 믿고 맡기며 자신들끼리 즐겁게 사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구조였다.
남자들에게도 이 인적 유대가 강하게 작동하여 이곳에서 만나 친분을 쌓고 함께 먼 변경까지 사업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래서 바덴이 다른 은행에 대출을 알아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자작나무숲 장원은 이미 담보 대출금이 상당하여 이 정도 금액의 대출을 신규로 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설령 가능하다 해도 심사에 시간이 오래 걸릴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 과정을 최대한 간략하게 처리해 장차 크게 성장할 사업가를 잡은 것이다.
“고슬라 사장님과 거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우리 은행 자금을 더 많이 가져다 쓰십시오. 하하하.”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감사합니다, 지점장님.”
“내일 계약하기로 하셨지요?”
“네.”
“늦지 않게 직원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덴은 자작나무숲 장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땅을 추가로 매입하기로 했다.
장원 하나와 근처의 경작지 수십 필지를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들을 합쳐 새로운 사업을 벌일 생각이었다.
내일은 그중 가장 큰 장원을 계약하기로 한 날이었다.
구입과 동시에 은행에서 담보권을 설정하기로 대출 조건이 걸려 있었다.
대출 건이 마무리되자 지점장이 차를 대접해 잠시 담소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바덴이 갑자기 생각나 물었다.
“지점장님, 그런데 제가 농지법을 특별히 깊이 공부해 볼 기회가 없어서 그러는데요. 대학에서 배울 때 우리 제국의 농지 기본 원칙이, 농지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만 소유할 수 있다는 것 아니었나요? 상당히 엄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수월하게 구입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농지를 구입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자작나무숲 장원 농부들의 명의를 이용해 차명으로 구입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지점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회 개혁 이후로 그게 농지의 기본 원칙이 되었죠. 제가 은행에 처음 발을 들일 때에도 그랬습니다. 농지 거래는 여간 까다롭지 않았어요.”
“그렇죠? 제가 잘못 배운 게 아니었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 농지법은 사실 악법이었죠.”
“악법이라고요?”
바덴은 농지법이 악법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도 읽은 기억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랬다면 머릿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지점장이 찻잔을 입에 대었다가 떼며 설명해 주었다.
“토지 귀족들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사업을 하려고 할 때 어떻게 자본을 마련하겠습니까? 당연히 토지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해야지요.”
“그렇겠죠.”
“그런데 사업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은행은 이 토지를 어떻게 처리하죠? 누가 이 땅을 살 수가 있겠어요? 농민 가운데 누가 귀족의 장원을 구입할 자금력이 있죠? 농지는 농민만이 소유할 수 있게 해 놓았는데, 농민은 땅을 살 돈이 없어요. 그러니 은행으로서는 토지 담보 대출을 꺼려하게 되고, 결국 토지 귀족들은 사업 진출에 늦어지게 된 겁니다.”
“아!”
“도시의 상인들, 장인들, 무역업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꼴을 눈 뜨고 지켜봐야 했던 것이죠. 전통 토지 귀족들이 굉장히 분노했어요.”
바덴이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회 개혁 이후 황제 폐하의 권위는 무척 강해서 이 일이 공론화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오베론 공작께서 상원에 농지법 개정 법안을 발의하셨고 높은 지지를 받으며 통과되었죠. 그때 이후 농지는 농민만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은 남겨 두면서 투기 목적이 아닌 경제 활동을 위한 토지 거래를 폭넓게 인정하는 쪽으로 법이 바뀐 것입니다.”
“오베론 공작?”
“네. 그때 은행법도 함께 개정되어 토지 귀족들이 토지를 담보로 자금을 확보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바덴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오베론 공작의 이름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지점장과 조금 더 담소를 나누다 돌아가는 길에도 바덴은 몸의 떨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보름스 가문의 사건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떤 거대한 흐름들이 서로 부딪치는 와중에 하필 그 사이에 낀 것일까?’
그러나 여전히 단서가 부족했다.
바덴은 생각이 난 김에 루산에게 편지를 썼다.
<···멋모르고 함부로 투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를 만났을 때처럼 확실한 사람과 확실한 사업 아이템이 아니라면 신중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3만 골드가 길 가다가 주울 수 있는 금액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거다! 싶을 때는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 은행에서 25만 골드를 대출받았습니다. 정말 이거다! 싶으면 뒷걱정 말고 진행하세요. 단! 먼저 저와 상의는 하고 진행하시기를······.>
바덴은 말줄임표를 통해 자신의 기분이 살짝 상했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농지법, 은행법과 오베론 공작 이야기는 이번에 하지 않기로 했다.
확실한 것을 잡을 때까지 변경에서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공연히 싱숭생숭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
“치!”
루산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편지를 접어 상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칼리슈 일행과 출발하기 직전에 도착한 바덴의 편지였다.
‘잘났어, 정말!’
잘나기는 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이렇게 네 시즌 만에 순익 3만 3천 골드.
내년에는 최소 두 배 예상.
벌써 사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으며, 은행에서 25만 골드나 대출을 해 줄 성도로 사업성을 인정받았다.
그 덕에 자신의 3만 골드 투자 실패 - 실패가 아니라 먼 훗날을 보는 장기 투자라고 애써 위로하고 있지만 - 로 가슴을 조여 오던 압박감도 사라졌다.
든든했다.
그러면서도 오기와 경쟁심이 생겼다.
자신이 바덴보다 더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멋지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중에 봅시다, 미스 고슬라!’
루산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뭐예요? 혹시 연서?”
모닥불을 피워 점심을 먹고 나서 차를 끓이던 칼리슈가 루산에게 찻잔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이상한데? 연인한테 온 편지도 아닌데 시간 날 때마다 봐요?”
칼리슈가 첫 만남 때보다 더 친근하게 굴었다.
아무래도 이미 만나 함께 여러 날을 보낸 사이라 자연스럽기도 하고 루산에게 호감도 있었지만,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매장 판매에 나선 것처럼 조금 어색했다.
그에게는 루산과 더 친해져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 임무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목적한 괴수의 부산물 획득.
멕 나이트 레오파드 테스트.
그리고 테스트 파일럿으로 루산 섭외.
가프 마법 연구소에도 물론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있었다.
그동안 주력으로 생산해 온 멕 연료와 윤활유, 각종 부품들의 성능 테스트를 위해 여러 기종의 멕 나이트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능 테스트에는 ‘뛰어난 전투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 고용된 파일럿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직원들이었다.
멕 나이트 성능 테스트를 위해서는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파일럿이 필요했다.
극한 상황에서 기체를 험하게 굴릴 수 있는 거친 맹수 같은 파일럿.
그래야 문제점을 고치고 멕 나이트의 장점을 더욱 빛낼 수 있는 것이다.
“루산 보름스가 제격입니다, 스승님!”
실력은 감동적이었고, 이미 같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비밀 엄수 사항도 의미가 없었다.
칼리슈는 강력하게 주장하여 일단 스승의 승낙을 받아 놓았다.
8군단 단장도 허락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8군단에 이로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루산이 바쁘다는 것과 지난번 임무 때 워낙 고생을 하여 가프 마법 연구소 일을 맡기를 꺼려하는 기색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럴 만했다.
세르펜스를 사냥하다 죽을 뻔했고, 그의 멕이 크게 부서져 수리하는 데 5개월이나 걸렸다.
그래서 일단 친근하게 다가가 더욱 호감을 쌓고 설득할 방법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경 생활 7년 차인 루산은 칼리슈의 과장된 말과 표정에서 이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왜 이래, 이 마법사?’
당연히 루산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사기 당한 금액이 400만 골드가 넘는다고. 만나는 사람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어요.”
루산이 찻잔을 받으며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약점을 보임으로써 동정과 호감을 사는 기술을 펼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칼리슈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괜한 얘기를 했군요. 미안합니다, 기사님.”
“뭐 그런 걸로 사과까지 하고 그러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제 일 이야기를 할까요?”
“···네. 그러죠.”
“세르펜스를 잡으려면 상당히 멀리 가야 할 겁니다. 지난번에 잡은 곳에서 그 정도 사이즈는 아마 다 잡았을 거예요.”
“그렇겠죠?”
“네. 가는 도중에 대형 괴수들을 많이 만날 거예요. 그중에서도 퐁고 서식지를 지나게 됩니다.”
“퐁고라면··· 오거?”
“맞습니다. 한때 거인이라고도 불리고 오거라고도 불리던, 두 발로 걷는 대형 괴수죠.”
변경 마을을 습격해 방벽을 부수거나 뛰어넘어 집을 부수고 사람들을 잡아 패대기쳐 줄에 꿰어 끌고 가 좍좍 찢어서 씹어 먹는 잔혹 동화 속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퐁고다.
멕 나이트는 퐁고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과거 인간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두려움을 안긴 존재였다.
퐁고는 두 발로 걷고 손이 자유롭기 때문에 도구를 쓸 줄 알았다.
다른 대형 괴수들의 넓적다리뼈를 휘두르고는 하는데, 잘못 맞으면 멕 나이트의 몸체가 깨지거나 우그러지고, 여러 마리에 둘러싸여 얻어맞으면 충격에 진탕되어 멕 나이트 파일럿이 죽을 수도 있었다.
멕 나이트가 나타난 뒤로 인간 사회 가까이 살던 퐁고 서식지는 거의 다 소멸되었지만, 아직 원시의 땅 깊은 곳에서는 수많은 퐁고를 만날 수 있었다.
“멕 나이트 실전 테스트 상대로는 제격이죠. 퐁고가 나오면 저는 테스트를 돕기 위해 뒤로 빠져 있겠습니다.”
루산의 말에 칼리슈가 침을 꿀꺽 삼켰다.
퐁고는 다른 괴수들과는 다른, 어린 시절 동화를 들으며 각인된 두려움을 되살아나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루산이 우르사에 올라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이쪽 길을 선택한 이유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 가프 마법 연구소의 멕 나이트 테스트에 개입하기 위해서였다.
신화 공업사를 성장시키기 위한 첫걸음!
칼리슈와 루산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을 숨기고 있어 상대의 뜻을 아직 알지 못했다.
우르사는 오른쪽 어깨에 대형 철퇴, 왼쪽 어깨에 아트라스 대검을 걸치고, 왼쪽 다리에 소형 철퇴를 달고 거대한 나무가 하늘 높이 자란 원시의 숲을 뒤뚱뒤뚱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