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내 이름은 003
***
부웅-!
우르사가 대형 철퇴를 휘둘러 바실리스크의 왼쪽 턱관절을 강하게 후려쳤다.
쩡!
바실리스크의 입에서 깨진 이빨과 뼛조각, 침이 튀어나오며 머리가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갔다.
바실리스크는 오른쪽으로 몇 발짝 옆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넘어갔다.
쿵!
원시의 숲에 출몰한 잔혹한 사냥의 신은 꿈틀대는 바실리스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부웅-!
대형 철퇴가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리꽂히고, 바실리스크는 머리가 절반은 깨지고 절반은 땅에 박힌 채 몸을 떨다 이내 축 늘어졌다.
[이, 이건 정말······.]
[허어!]
레오파드 테스트 파일럿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고생고생 하여 잡은 바실리스크를 단 두 방에 쓰러뜨린 것이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멕 워커 한 대가 약속이나 한 듯 얼른 달려가 자신의 마나 진동 단검을 건네주었다.
우르사는 그것을 받아 익숙하게 대형 바실리스크의 배를 가르고 쩍 벌려 아이 머리통만 한 생명 구슬을 꺼내 그물망 주머니에 넣었다.
우르사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그물망 주머니에서 커다란 생명 구슬들이 쩔그럭쩔그럭 소리를 냈다.
-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기로 하죠. 내일 아침부터 늪지대 깊이 들어가 세르펜스를 사냥할 거니까요.
루산이 외부 확성기로 말했다.
멕 워커에는 고가의 마나 통신기가 설치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멕 워커들이 야영지를 고르고 주위에 줄을 친 뒤 방울을 달았다.
두 번째 와 보는 것이라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냈다.
잠시 후 모닥불 두 개가 피어올랐다.
하나는 칼리슈, 루산 그리고 테스트 파일럿들이, 다른 하나는 멕 워커 파일럿들이 차지했다.
멕 워커 파일럿들이 요리해 가져다 준 음식을 먹고 나서 루산은 바덴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네 시즌 만에 수익 3만 3천 골드.
내년에는 두 배 예상.
은행에서 25만 골드를 대출해 사업 확장.
그리고 이거다 싶은 사업이 있으면 뒷걱정 말고 진행하라는 말까지.
봐도, 봐도 좋았다.
마음이 뿌듯해지고 든든했다.
자기한테 허락을 맡고 나서 진행하라는 식의 말들이 살짝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 역시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뭘 그리 보시오?”
40대 중반인 레오파드 001의 파일럿이 루산에게 넌지시 물었다.
비슷한 또래인 레오파드 002의 파일럿과 칼리슈도 루산을 쳐다보았다.
할 일 없는, 깊은 원시의 숲 야영지에서 누군가를 화젯거리로 올리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밤은 가장 먼저 루산이 화젯거리가 된 것일 뿐이다.
별일 아니지만, 나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루산을 대하는 레오파드 테스트 파일럿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전선의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으레 그러하듯 변경 파일럿이라고 무시하고 말도 걸지 않았다.
모닥불도 함께 쬐지 않았다.
“연서는 아니라고 하시니 괜히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기사님들.”
칼리슈가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농담을 했다.
루산과 테스트 파일럿들 모두 소리 없이 웃었다.
루산이 편지를 안주머니에 넣자 귀족으로서의 매너를 중시하는 중년의 테스트 파일럿들은 편지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캡틴이 보시기에 레오파드는 어떻습니까?”
“······!”
칼리슈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테스트 파일럿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레오파드와 관련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002의 파일럿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캡틴 보름스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다 알고 있습니다. 비밀도 아니잖아요? 마법사께서도 캡틴 보름스의 의견이 궁금할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차피 테스트 진행 중이니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루산을 존중했다.
정확히 말하면 루산의 실력을 존중했다.
우르사가 특별해 보이기는 했지만, 단지 기체의 차이가 아니었다.
파일럿의 기량 차이!
대형 철퇴의 파괴력이 극대화되도록 힘을 가하는 몸놀림과 회전 동작, 다루기 어려운 아트라스 대검의 끝부분으로만 의도한 지점을 정확히 베고 갈 때의 이상적인 궤적.
20년 이상 멕 나이트를 타 온 그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수련해 온 젊은 기사의 재능과 피땀을 알아본 것이다.
“캡틴.”
칼리슈가 조심스럽게 루산의 의중을 물었다.
루산은 그동안 계속 이 순간을 기다려왔으나 한참 동안 고민하는 척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굳이 의견을 물으시니, 그동안 떠오른 것을 말해 보겠습니다.”
칼리슈와 두 테스트 파일럿들이 루산의 말에 집중하느라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확실하게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면 레오파드의 무게를 더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줄인다고요?”
칼리슈가 반문했다.
“네.”
“무게를 더 줄이면 파괴력이 떨어질 텐데요?”
“기동성이 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생산비도 더 절감할 수 있고요.”
“하지만, 며칠 전에 맷집이 없으면 범용 기체가 안 된다고······.”
“범용 기체가 뭔데요? 쓸모가 많아 여기저기서 쓰이면 범용 기체죠.”
“······?”
“굳이 아이언 워리어를 잡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집니다. 회전(會戰)에서 정면으로 맞붙으면 출력이 다소 앞선다 해도 맷집과 중량이 크게 떨어지는 레오파드가 이기기 어렵죠. 하지만, 싸움이 회전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음!”
테스트 파일럿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파괴력이 떨어진다고 하셨는데, 파괴력이라는 게 굳이 가루로 만들거나 산산조각을 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적의 전투력을 상실시킬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나 진동 대검으로 팔다리를 자르거나 조종석을 뚫으면 끝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몸통이나 장갑이 더 두껍다고 해서 안 뚫리는 게 아니죠.”
“그야 그렇지만······.”
루산은 이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더 나가기로 했다.
“멕 나이트 제조사들이 수요가 큰 전선을 염두에 두고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그러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원래 멕 나이트는 변경 괴수로부터 인간 영역을 지키기 위해 개발된 것이죠. 이 무식한 녀석이 그때의 유산입니다. 물론 위력은 300년 전 모델보다 강해졌겠지만요.”
칼리슈와 테스트 파일럿들이 어둠 속에서 모닥불 불빛을 반사하고 있는 거대한 멕 나이트 우르사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루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요? 옵션에 따라 다르겠지만, 통상 아이언 워리어 신품이 15만 골드 정도 합니다. 전선에서 수십 년을 뒹굴다 수리해서 변경으로 넘어오죠. 그때 3분의 1에서 절반 정도에 구입한다더군요. 5만에서 8만 골드라는 거예요.”
“5만에서 8만?”
레오파드 001의 테스트 파일럿이 중얼거렸다.
사실 전선의 파일럿들은 멕 나이트의 가격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명예로운 제국의 기사이지 장사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대화가 무척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네. 그런데 이때 기체 상태는 당연히 신품 때에 못 미칩니다. 엔진 성능은 70퍼센트, 괜찮으면 90퍼센트 정도 될 것이고, 수리를 했다 해도 관절이나 몸체의 금속 피로도가 높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타고도 변경 괴수를 상대하는 데 별문제가 없어요. 과잉 전력이란 말입니다.”
변경 7년 차 파일럿의 생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형 괴수를 상대하려면 맷집과 파워가 더 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레오파드 002의 파일럿이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작정하고 찾아다니지 않는 한 대형 괴수 상대할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적합한 기체를 동원하고 변경의 사냥 노하우를 활용하면 되죠.”
“으음!”
“변경에서 멕 나이트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사냥이 아니에요. 순찰과 정찰입니다.”
“순찰과 정찰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니 기동성이 훨씬 중요하죠. 현재의 레오파드도 과잉 전력이에요. 파일럿들께서 원시의 땅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너무 깊이 들어와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입니다. 중량을 3분의 1 이하로 줄이고 엔진 출력을 절반으로 줄여서 가격을 8만 골드 이하로 낮출 수 있다면, 나는 중고 아이언 워리어 대신 레오파드를 살 겁니다.”
변경의 멕 나이트 시장을 공략하라!
마침내 루산은 이 메시지를 던졌다.
으레 중고 멕들의 각축장으로 여겨졌던 변경의 멕 시장.
레오파드가 이 시장을 공략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레오파드 가격 상승의 원인은 고출력 엔진이었다. 세르펜스 생명 구슬을 점화기로 사용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잡기도 어렵고 그 수가 충분하지도 않으므로 장차 레오파드를 양산하는 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필센 제국의 변경은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수요는 더욱 증가할 거예요. 8구역만 해도 넓은 반달 호수 지역이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몇 년 안에 규모가 몇 배로 커지고 멕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겁니다.”
“흐음······.”
칼리슈의 고뇌가 점점 깊어졌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처음 기획한 의도가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더 철저히 관철하세요. 중량을 확 줄여 기동성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성공합니다.”
“중량을 확 줄여라?”
“네. 그리고 이왕 개발한 것이잖습니까? 굳이 비밀로 하지 말고 공개하세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무슨 비밀입니까? 이왕 8군단과 협력해 오셨으니, 8군단에 레오파드 몇 기를 맡기고 어떻게 운용하는지 파악해 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변경의 쓰임새에 최적화된 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칼리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장점을 홍보해야죠.”
“어떻게 말입니까?”
“8군단은 꾸준히 교류하는 신문사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외부에서 사업가들도 투어를 오죠. 레오파드를 활용하는 것이 변경의 괴수 사냥과 개척지 보호에 더 큰 도움을 주고 경제적으로도 이롭다는 것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겁니다.”
“오!”
칼리슈뿐 아니라 두 테스트 파일럿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이런 홍보 기회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세 사람은 루산의 말에 완전히 설득되었다.
8군단에 부탁하면 당연히 이 일을 루산에게 맡길 것이다.
루산이 레오파드 테스트를 맡아 주는 것은 칼리슈가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
[갑니다!]
[알았소!]
루산이 레오파드 001에 올라타 첨벙첨벙 늪지대를 질주했다.
확실히 우르사에 비해 가벼웠다.
우르사였다면 늪에 푹푹 빠져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겨웠을 것이다.
레오파드가 이보다 더 가벼워진다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루산은 늪지대를 달리면서 변경에서 가벼운 멕 나이트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레오파드 001의 뒤로 거대한 세르펜스가 입을 쩍 벌리고 추격해 왔다.
녀석은 간간이 용수철처럼 몸을 확 뻗어 레오파드를 삼키려 했다.
그때마다 레오파드는 지그재그 좌우로 움직이며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계속해서 달렸다.
늪지대 가장자리에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레오파드가 날렵하게 질주하고, 그 뒤로 세르펜스가 열차 같은 긴 몸을 이끌고 맹렬하게 따라오고 있을 때, 거대한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우르사 - 레오파드 001의 파일럿이 타고 있었다 - 가 대형 철퇴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후웅-
빡!
세르펜스의 대가리가 함몰되면서 땅바닥에 깊이 처박히자, 몸통이 탈선한 열차처럼 관성을 이기지 못해 대가리 위로 넘어갔다.
세르펜스는 온몸을 배배 꼬며 고통스러워했다.
[끝을 냅시다!]
레오파드 001과 002, 그리고 우르사는 세르펜스의 머리를 찍고 베며 완전히 끝장을 냈다.
그렇게 그들은 레오파드의 장점을 살리는 사냥법을 시험해 가면서 이왕 온 김에 세르펜스를 다 잡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레인보우 시티로 세 대의 기체가 들어왔다.
루산에게 익숙한 레오파드 001과 002. 이 둘은 부서진 장갑만 보강하고 그대로 다시 왔다.
그리고 레오파드 001, 002와 마찬가지로 세르펜스 생명 구슬을 점화기로 사용한 고출력 엔진을 탑재했으면서도 루산의 주문에 따라 중량을 3분의 1로 확 줄인 빼빼한 003.
레오파드 003을 타고 여기까지 온 파일럿이 루산에게 멕 나이트 열쇠를 인계하며 칼리슈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조만간 출력을 낮춘 변경 전용 모델이 완성되는 대로 가져가겠습니다. 일단 여러 가지 모델을 시험해 볼 생각입니다. 나중에 뵙죠.>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는 루산의 제안을 수용하면서도 출력을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지, 중량은 얼마나 줄이는 것이 효과적일지 다양하게 테스트해 보기로 한 것이다.
변경 시장을 노리면서 전선 시장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 정도 욕심은 있어야지.’
루산은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눈앞에 있는 크고 마른 멕을 올려다보았다.
파일럿을 보호하기 위해 조종석은 튼튼한 몸체 부품으로 보호하고 그 위에 장갑판을 설치했지만, 팔다리는 몸체 부품을 모두 떼고 장갑판도 달지 않았다.
뼈대와 관절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세르펜스의 가죽으로 온몸을 덮은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워낙 질겨 마나 진동 검으로도 잘 베이지 않는다는 세르펜스의 가죽.
그 무시무시한 괴수의 피부를 뒤집어쓴 레오파드 003이 변경의 햇살 아래에서 요사스러운 빛을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