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느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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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 제8구역은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을 만큼 포근하다지만, 겨울은 겨울이라 모닥불을 흔드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목덜미를 찌르는 듯한 싸늘함에 바이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전 상의를 가져오는 건데······.’
모피로 만들어져 무척 따뜻한 야전 상의.
우르사 조종은 너무 힘이 들어 땀이 줄줄 흘렀다.
그래서 조종실 안에다 벗어 놓고 나온 것이 실수였다.
이제라도 가져올까 하다가 베테랑 기사님들이 나누는 교양 있는 대화를 듣다 보면 자신의 수준도 그 정도로 올라갈까 싶어 참기로 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
001의 파일럿 모리츠의 말에 002의 파비안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드 왕국의 전쟁 이야기였다.
아라드 왕국은 필센 제국 남쪽에 붙어 있는 나라라 피란민들이 계속 제국 영토 안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요?”
바이크가 용기 내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응?”
모리츠와 파비안 그리고 루산이 바이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했나?”
모리츠가 부드럽게 물었다. 젊은 파일럿이 대화에 참여하는 게 기꺼웠던 것이다.
모두의 주목을 받자 바이크는 살짝 떨렸지만, 어차피 다 같은 멕 나이트 파일럿 아닌가? 꿀릴 게 없었다.
“물론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 온 피란민들의 처지가 안되기는 했지만, 국익으로만 놓고 보면 우리 제국에 오히려 이익이 아닌가 싶어서요. 피란민을 받아들여 변경을 더 활발하게 개척할 수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국력이 더 커지겠죠.”
바이크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나 말을 잘할 줄 몰랐다.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모리츠와 파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서라기보다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전대장 생각은 어떠시오?”
파비안이 루산에게 물었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었죠.”
“과거형이로군요?”
“네. 전쟁의 비극성, 이런 걸 일단 빼고 변경과 우리 제국만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죠. 그런데 문제는 피란민들이 워낙 단기간에 대거 들어오는 바람에 그동안 구축된 변경 개척 체계가 감당을 못한다는 겁니다.”
루산은 필센 제국 변경 개척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는 두 기사와 아직은 어렴풋하게 느끼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바이크에게 ‘먼저 투자하고 나중에 장기 분할로 회수하는’ 변경 개척 방식을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쉽게 말해 돈이 떨어져 더 못 받는다는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강제로 계속 밀어 넣으면 변경이 파산하고, 변경에서 안 받게 되면 국경 지방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대로 전쟁이 계속되면 곤란하죠.”
“음!”
모르츠와 파비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일이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겁니다. 변경에서 괴수를 사냥하는 것은 개척민의 안전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이 부산물 수입으로 더 많은 개척민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더 많은 괴수를 잡으면 그만큼 많은 피란민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제국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루산은 괴수 사냥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강조했다.
‘제국을 위한 일!’
제국에 대한 충성심과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선 출신 파일럿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바이크 역시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이 하는 일이 그저 돈벌이가 아니라 제국에 충성하는 다른 방법이라니!
‘역시 전대장님은 생각부터가 다르구나!’
시골 출신 젊은 파일럿은 감동했다.
괴수 사냥으로 제국의 안녕에 이바지한다는 루산의 말은, 절반은 전선 출신 파일럿들을 괴수 사냥에 마음껏 동원하기 위해 포장한 것이지만, 절반은 본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전선의 기사가 되어 나라를 수호하고 제국에 충성을 다하며 명예롭게 사는 삶을 꿈꿔 온 루산.
비록 그 사건 이후 인생의 경로가 달라졌으나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충성심과 명예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진탕과 늪을 헤치며 괴수의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라드에서 전쟁이 계속되면 변경이 파산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바이크가 루산에 대한 존경심이 살짝 가미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럴 수 있지. 워낙 복합적인 문제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말이야.”
“어떤 복합적인 문제가 있는데요?”
바이크는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발동되지 않은 학구열이 베테랑 기사들과 모닥불 가에 동등하게 둘러앉아 있다 보니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모리츠와 파비안도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루산을 쳐다보았다.
루산은 그들의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워 잠시 뺨을 긁적이다 바이크를 보고 물었다.
“우리나라 최대 수출 품목이 뭔지 알아?”
“네?”
바이크는 ‘에이! 그런 거, 당연히 모르죠.’라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이미 표정에서 드러났다.
“괴수 부산물 가공품이야.”
‘정말이에요?’
바이크가 모리츠와 파비안을 바라보자 두 기사들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난들 아나?’
‘농산품이나 공산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가프 마법 연구소를 봐. 괴수 혈액과 체액으로 마나 연료, 윤활유를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하는데 멕 나이트 제작에 뛰어들 정도로 엄청난 수입을 올리지. 가프 마법 연구소가,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마법 연구소는 아니거든.”
“괜찮습니다, 허허.”
모리츠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루산은 모리츠와 파비안을 향해 살짝 목례를 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괴수 부산물 산업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거야.”
바이크는 루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라드 왕국 전쟁 이야기에서 갑자기 괴수 부산물 산업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루산은 바이크의 표정을 보고 답답함을 느껴 얼른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오늘날 마나 연료가 없으면 공장, 열차, 자동 마차, 배가 움직이지 않아. 멕 나이트, 멕 워커도 움직일 수 없지. 마리노 공화국이 아라드 왕국을 공격한 이유는,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이 무엇이든, 사실은 변경을 차지하기 위해서야. 괴수 부산물 때문이지.”
“아!”
“우리 제국은 당연히 그 속셈을 알아. 하지만, 마리노 공화국 뒤에 어른거리는 아우로라 대륙의 그림자 때문에 섣불리 개입하지 못하는 거야. 자칫하면 대전쟁이 벌어지니까.”
바이크와 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은 바이크를 이해시킨 데 만족하고 덧붙였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라도 개입할 수밖에 없겠지. 괴수 부산물 가공품 가격을 낮추든, 전쟁을 하든. 어느 쪽을 선택하든 변경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 그러면 변경 군단이 파산할 수도 있지.”
“설마요? 그렇게 쉽게······?”
바이크는 자신이 급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얼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망하는 거, 한순간이야.”
루산이 넋두리처럼 말했다.
의도하지 않고 나온 말이라 뱉은 뒤에 곧바로 후회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신 바이크가 다른 말로 그의 신경을 긁었다.
“그런데 전대장님은 어쩌면 그렇게 똑똑하세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잘 아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나도 기사 아카데미 나왔는데 왜 그런 걸 모르지?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쳐 주나요?”
모리츠와 파비안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루산을 쳐다보았다.
변경의 파일럿이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나왔다니!
루산은 인상을 구기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네? 그게 아니라······.”
바이크는 루산이 왜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그런 모습을 보며 루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 말이 안 통하네. 어쩌다 이런 녀석을 데려와 가지고······.’
이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클라크 밑에서 기본 생활 태도와 학업을 배우게 하고 싶었다.
그때 파비안이 분위기 수습을 위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아라드 왕국이 버티고 있는 것이 대단하긴 해. 산악 지형과 레인저들의 활약으로 말이야.”
모리츠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기는 해. 하지만, 그것도 곧 한계에 부딪칠 거야. 황제 폐하께서도 고심이 많으시겠어.”
“출동한다면 남방군이 출동하겠지?”
“그렇겠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까.”
‘남방군? 오베론 공작이 이끄는 군대다!’
루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이크의 교육이 문제가 아니었다.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머나먼 변경 땅에서조차 오베론 공작과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 놀라웠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 이름을 떠올린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노바에서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모리츠와 파비안은 루산에 대해 어떤 신비감 같은 것을 품게 되었다.
실력, 지식, 판단력, 품행을 볼 때 확실히 변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되바라진 기사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매너를 아는 기사답게 루산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나왔다는 말이 왠지 맞을 것 같았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가?
실력뿐 아니라 출신까지, 그야말로 필센 제국 최고의 엘리트만 간다는 곳이 아닌가?
그 대단한 곳을 나온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변경에서 괴수와 씨름하고 있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이크! 앞을 막아!]
[예스, 커맨더!]
쿵쿵쿵쿵!
거목들 사이로 달려 나간 우르사가 대형 철퇴를 두 팔로 들고 앞으로 뻗어 진로를 차단하려 했다.
레오파드 세 대의 몰이에 놀라 달아나던 타르보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난 우르사를 보고 얼른 방향을 틀려다가 우르사와 오른쪽 나무 사이의 빈틈을 보고 그대로 돌진했다.
우르사는 대형 철퇴를 왼쪽으로 더 뻗어 막으려 했지만, 육중한 타르보의 돌진을 그런 식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타르보가 철퇴를 밀고 지나가자 뚱뚱한 우르사는 철퇴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빙글 돌다 넘어질 뻔했다.
‘어휴! 저걸 진짜······!’
이런 일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볼 때마다 속이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파파파팟!
003은 거대한 나무들 사이를 겅중겅중 달려 타르보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마침내 자신보다 더 크고 육중한 타르보 옆에 붙어 달리게 된 003은 녀석의 왼쪽 다리를 마나 진동 대검으로 그었다.
슥!
그리 큰 상처도 아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고통에 깜짝 놀란 타르보가 균형을 잃고 넘어져 우당탕 구르다 거대한 나무에 부딪쳤다.
쿵!
원시의 나무가 부르르 떨었다.
타르보는 일어나려 했지만 충격에 자꾸 비틀거렸다.
003은 그런 녀석의 숨골을 정확히 찔렀다.
푹!
거대한 타르보가 쿵 하고 쓰러졌다.
[우와! 전대장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우르사가 뒤뚱뒤뚱 달려와 물었다.
루산은 바이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답답함이 밀려왔지만, 꾹 눌러 참으며 설명해 주었다.
[자, 여기 목하고 머리 사이 이 부분에 숨골이 있어. 잘 봐.]
003은 마나 진동 대검으로 타르보의 머리를 잘라 친절하게 내부 구조를 보여 주었다.
[으으······! 못 보겠어요! 우웩!]
[우르사 안에다 토하면 가만 안 둬!]
[저 귀하게 자랐다고요!]
[누구는 천하게 자랐냐?]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티격태격 난리를 쳤다.
잠시 후 지원 팀 멕 워커들이 도착해 타르보 분해를 시작하자 루산은 다시 한 번 바이크 옆에 착 달라붙어 몸통 내부 구조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 장난기가 돌아 멕에서 내려 직접 커다란 생명 구슬을 채취했다.
멕 워커들이 타르보의 배를 쩍 벌려 잡아 주고 있었지만, 루산의 몸은 대형 괴수의 피로 흠뻑 젖었다.
루산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통만 한 생명 구슬을 들고 다가가자 바이크가 질색하며 물러났다.
“저리 가요!”
“이게 얼마나 귀한 건 줄 알아? 느껴 봐. 그래야 사냥꾼의 마음을 알지.”
“싫어요!”
한참을 술래잡기하던 루산은 멕 워커가 옆구리에 차고 있는 커다란 그물망 주머니에 생명 구슬을 넣었다.
바이크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감탄했다.
“와! 벌써 가득 찼어요!”
“어때? 기분 좋지?”
“네, 전대장님!”
“이 맛에 사냥하는 거야.”
“뭔지 알 것 같아요!”
둘은 희희낙락했다.
모리츠와 파비안이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신기하긴 해.]
[많이 신기하지.]
그 시각, 8군단 우편병이 레인보우 시티에 있는 루산의 집에 도착해 클라크에게 바덴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우르사와 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