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FC 변경 군단의 기사-47화 (47/450)

47. 하얀 눈은 어두운 하늘에서 내린다

***

바덴의 편지를 읽은 뒤 루산은 고심했다.

그 일에 대한 처리는 전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며칠 내로 출발할 테니 놈들을 어떻게 생포할지 방법을 찾아보세요.>

더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이곳을 비우는 것.

델타 기지 캡틴일 때에는 켐니츠라는 든든한 파일럿이 있어 마음 편하게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전대장에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자신이 휴가를 떠나면 남아 있는 사람은 바이크, 모리츠, 파비안, 이렇게 세 명뿐이었다.

그런데 모리츠와 파비안은 8군단 소속이 아니라서 변경 군단의 시스템, 이 땅의 지리, 괴수 사냥에 대해 잘 몰랐다.

워낙 베테랑들이라 가르쳐 주면 잘하지만, 스스로 해 나가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바이크에게 뒤를 맡기고 떠나는 것은 온전한 정신으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켐니츠를 만나면 더 잘해 줘야겠어.’

루산은 지나간 인연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다행인 점은 3전대가 신규 멕 나이트 테스트를 위해 들어온 외부 전력으로 괴수 사냥 수입을 높이려고 특별히 편성된 만큼 1전대나 2전대처럼 특정 임무를 배정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전대장이 알아서 사냥을 많이 해서 높은 부산물 수입을 거두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사실 놀아도 상관없었다.

그동안 많이 잡아서 이 지역 괴수의 씨가 말랐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루산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언제나 최고 성과를 기록해 자신의 주머니를 꽉꽉 채워 왔고 동시에 8군단에 가장 큰 기여를 해 왔다.

캡틴 때도 그랬는데 전대장 - 아직 전대가 완전히 편성된 것은 아니지만 - 이 되어서 전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루산은 명예로운 삶을 살아온 전선 출신 기사들에게 돈맛을 보여주기로 했다.

현재 모리츠와 파비안은 가프 마법 연구소로부터 급료와 테스트 파일럿 수당을 받으며 변경 8구역에 머물러 있었다.

쉽게 말해 그동안 괴수 사냥에 참여한 것은 전적으로 기체 테스트와 애국심에 때문이었다.

그들은 괴수 부산물 가격이 얼마인지 몰랐다. 딱히 관심도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성과 보상금이란 동기를 부여해 자신이 없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냥해 나갈 것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양날의 칼!’

왜냐하면 변경 파일럿의 성과 보상금은 생각보다 엄청나기 때문에 한번 맛을 보면 이후로도 계속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이 돈맛에 눈을 뜨면 명예의 세계는 쉽게 잊는다.

그동안 봐 온 변경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러나 루산은 이것만큼 사람을 부리기 쉬운 것도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레오파드 기체 테스트가 언제까지 진행될지 몰라도 성과 보상금을 주고 더 독하게 부려 먹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길들여지면 딱히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더 많이 사냥하려 애를 쓸 것이다.

루산은 모리츠와 파비안을 면담했다.

“이번에 일이 있어 휴가를 내야 할 것 같아요. 열흘?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이크가 아직 아쉬운 부분이 많아 두 분께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뭘 하면 됩니까?”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대형 괴수를 상대로 최대한 많이 기체 테스트를 하고, 변경 개척에 이바지하기 위해 이왕 사냥한 대형 괴수 부산물을 허실 없이 수거하면 됩니다.”

“그러지요.”

모리츠와 파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짝 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괴수 부산물 수입에 따른 성과 보상금을 두 분께도 지급해 드릴 테니,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음?”

모리츠와 파비안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루산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8군단 소속이 아닌데, 그걸 왜 준다는 겁니까?”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매달 급료와 테스트 파일럿 수당을 받고 있어요.”

모리츠와 파비안은 루산이 순간적으로 착각한 줄 안 것이다.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압니다. 두 분이 가프 마법 연구소 소속인 거. 하지만, 그동안 함께 고생해 왔고 또 제가 없을 때 각별히 잘 부탁드린다는 뜻으로, 하하하······.”

모르츠와 파비안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다시 루산을 바라보았다.

모르츠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커맨더 보름스.”

“네?”

“나는 20년을 부르가스에서 근무해 왔습니다.”

부르가스는 필센 제국의 해외 영토로 확장을 위해 공을 들이느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 땅에서 많은 파일럿들을 떠나보냈는데,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전사, 부상, 그런 게 아니에요. 독직! 뇌물! 돈 문제였어요.”

“······!”

“돈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머나먼 전선에서 민간 업자가 찔러주는 돈, 거절하는 사람 드물죠. 그런데 다 말로가 좋지 않더군요. 제국군이 괜히 명예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20년 간 명예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전선을 떠나고도 가프 마법 연구소라는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겁니다. 위에서 좋게 봐서 소개장을 잘 써 줬나 보더라고요. 허허허!”

“이 사람 말이 맞아요. 돈과 명예는 양립하기 어렵더군요. 휴가가 열흘이라고 했나요? 길어 봐야 그보다 며칠 더 될 텐데, 우리가 상하관계는 아니니 친구로, 동료로 부탁하면 됩니다. 우리는 커맨더 보름스에게 제법 호감이 있으니까요. 기체 테스트는 어차피 우리 일인데 커맨더가 없다고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괴수 사냥?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커맨더가 보인 시범, 잘 봐 왔고 모르는 것은 물어서 해 나갈 테니까요.”

루산은 ‘생각보다 액수가 상당한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같은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부끄러움에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릴 적부터 꿈꿔 온 명예로운 기사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당당함이 너무 눈부셔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너무 왜소한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루산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모르츠 경, 파비안 경.”

“잘 다녀와요, 커맨더 보름스.”

루산은 황급히 자리를 뜨고 이미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클라크와 함께 마침 레인보우 시에 들렀던 렌커의 마차를 타고 라돔 시로 떠났다.

모르츠가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다가 중얼거렸다.

“받을 걸 그랬나?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는데······.”

“허허허, 받겠다고 하지 그랬나?”

“한 번만 더 물어 봤으면 받으려 했지.”

“그렇게 정색하고 말하는데 어떻게 다시 돈 얘기를 꺼내겠어?”

“그치?”

“그럼! 저 젊은 커맨더는 아직 철저한 업자 마인드가 안 돼 있어. 거절해도 찔러 넣어 줘야 하는 건데 말이야. 크크크!”

“그럼 저 친구에게 업자 마인드를 장착시켜야 하겠군그래.”

두 사람은 농담을 하며 돌아갔다.

어깨가 무거웠다. 사실 그동안 사냥의 8할은 루산이 해 왔다.

이렇게 멋진 척 말을 했으면 그 빈자리를 훌륭히 메우고 성과로 증명해야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바이크였다.

“바이크, 그 친구부터 가르쳐야겠군.”

“이미 과부하 아닌가? 예전에 우르사를 타 보니 동화기 장력이 너무 강해 죽겠더군. 그걸 해 내는 커맨더가 대단한 거지.”

“기본이 너무 안 돼 있어. 아침저녁으로 커맨더가 내 준 숙제를 하기는 하는 모양인데, 거기에 전선 신입 파일럿 탈락자를 위한 단기 속성 재교육 프로그램을 추가해야겠어.”

“죽일 셈인가?”

“어차피 이 상태라면 곧 죽겠던데? 변경의 동료들한테든 괴수한테든.”

“그건 그래.”

루산이 휴가 간 틈에 녹초가 된 자신의 육신에 휴식을 부여하려 했던 바이크에게 새로운 선생들이 붙었다.

***

노바로 가는 길.

창밖에 눈이 쌓여 있었다.

루산은 아무도 밟지 않은 산과 들의 새하얀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변경의 방식이 모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반가우면서도 그곳에서 7년을 꽉 채운 그에게 무척 낯설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돈이 아닌 다른 가치로 움직인다는 것.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더 없이 바라던 모습이었다.

사실 돈이 아닌 다른 가치로 움직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돈이 넉넉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선의 기사들은 나라에서 수많은 혜택을 부여하기 이전에 이미 풍족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 옛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도둑을 만드는 것은 가난이기 때문에 가난하지 않은 자들로 선발해 놓아 비루하지 않게 명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가문의 재산이 다 날아가고, 거기에 더해 친척과 사돈의 재산마저 주저앉힌 보름스 가문의 아들인 자신으로서는 다소 비루한 모습을 보여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면죄부를 줘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돈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명예로 대하면 되지 않겠어?’

루산은 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고민하다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러다 클라크가 깨우는 소리에 깨어났다.

“기사님! 기사님!”

“응? 무슨 일이야?”

“도착했어요.”

“알았어.”

루산과 클라크는 노바 역에서 밖으로 나가 마차를 잡아타고 법원 앞 자작나무숲 장원 안내 사무소로 가서 바덴을 만났다.

“안녕하셨어요, 미스 고슬라.”

“잘 지냈어요, 집사님?”

“네.”

곧이어 바덴은 루산에게 고개를 숙였고 루산도 살짝 답례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곧바로 스텐커 씨 사무실로 가시는 게 좋겠어요, 기사님.”

“그러죠. 클라크를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동 마차 운전할 줄 아시나요?”

“압니다.”

루산의 대답에 바덴이 열쇠를 내밀었다.

자신이 타던 자동 마차 열쇠였다.

루산은 이미 편지를 통해 바덴이 자동 마차를 구입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묻지 않고 곧바로 열쇠를 집어 들었다.

“지난번에 갔던 마차 보관소에 있어요.”

“고마워요.”

“조심하세요, 기사님.”

루산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바덴과 클라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사무실을 나와 마차 보관소로 갔다.

노바의 겨울은 차가웠다.

그러나 루산은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와 추운 줄 몰랐다.

부릉-

루산은 마차 보관소에 있던 바덴의 자동 마차에 시동을 걸었다.

운전한 지 어느새 7년이 넘은 자동 마차.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천천히 달리다 보니 숨 쉬는 법처럼 금세 적응했다.

하늘이 우울한 잿빛이었다.

루산은 잿빛 하늘과 잿빛 도로 사이를 달려 스텐커의 사무실로 가서 그를 태웠다.

“오랜만입니다, 기사님.”

“잘 지냈습니까?”

“네.”

“자동 마차를 타고 가는 게 빠르겠죠?”

“속도로는 그렇지만, 길을 모르시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가죠.”

루산이 자동 마차를 출발시켰다.

노바와 인근 도시의 도로는 이미 다 꿰고 있었다.

노바에서 태어났고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서 수도 방어 훈련을 수차례 해 왔기 때문이다.

브레머로 가는 길에 스텐커가 말했다.

“경찰에 있을 때 후임으로 있던 녀석이 브레머에 근무하더군요. 그래서 부탁을 했습니다. 달아나지 못하게 포위해 줄 겁니다.”

“경찰? 흐음······.”

루산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지만, 스텐커가 생각할 때 이것이 최선이었다.

“우리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하니까요.”

“그래도 나중에 심문 과정을 참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슈텐달 남작은?”

“아직 접촉하지 않았지만, 접촉할 방법은 이미 확인해 두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외에도 스텐커는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루산은 정면을 보면서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브레머 항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멀었다.

눈이 내릴 것처럼 하늘이 어두웠다.

루산은 왜 어두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지 갑자기 궁금해졌으나 이내 운전에 집중했다.

부아앙-

자동 마차가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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