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뭉쳐야 산다
***
“남작님, 육지가 보입니다.”
“오! 그렇군!”
세련된 정장을 입은 40대 후반의 신사가 배의 난간을 붙잡고 멀리 보이는 브레머 항을 반갑게 바라보았다.
워낙 예민한 탓에 큰 배를 탔음에도 멀미로 고생을 해서 얼굴이 핼쑥해진 그가 바로 슈텐달 남작이었다.
슈텐달 남작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쐬고 곧 육지에 닿는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았다.
“미스터 핀, 도착하자마자 계약 마무리하고 개발을 진행하도록 합시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남작님. 아무래도 시간은 금이니까요.”
그동안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법률, 기술, 자금 조달, 그리고 현지 실사까지 많은 조언과 도움을 준 중년의 신사가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슈텐달 남작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내 자신의 가문이 급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고 날개를 활짝 펴게 된 것 같아 무척 뿌듯했다.
잠시 후 바다를 건너온 배가 브레머 항으로 들어가 접안과 계류를 마쳤다.
철제 다리가 펼쳐지고 승객들이 내릴 준비를 했다.
슈텐달 남작 일행은 선장의 배려로 가장 먼저 내렸다.
그들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피해 얼른 여객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미널에는 배를 타려는 사람들과 막 배에서 내린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그런 인파를 뚫고 사람들이 다가와 슈텐달 남작 일행을 에워쌌다.
그 움직임은 매우 강압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뭐요?”
슈텐달 남작의 비서가 남작을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때 그리마가 부하들을 뚫고 앞으로 나와 남작에게 경찰 패를 보여 주며 말했다.
“슈텐달 남작님이십니까?”
“그렇소만. 무슨 일이죠?”
“슈텐달 남작님 일행이 밀수에 가담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조사가 필요하니 잠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누가 그런 허튼 소리를 했단 말이오?”
슈텐달 남작과 측근들이 언성을 높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소란을 피우면 남작님이 범죄와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질 수 있습니다. 조용히 조사 받으시죠.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곧바로 풀려나실 겁니다.”
슈텐달 남작은 발작하려는 측근들을 제지했다.
요즘 기자들은 진실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흥미를 돋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쓴다.
<슈텐달 남작, 밀수 혐의로 여객선 터미널에서 긴급 체포!>
이런 기사가 나오도록 해서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알았소. 갑시다. 단, 이번 일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슈텐달 남작이 그리마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마는 속으로 스텐커를 원망했지만, 겉으로는 귀족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넘겼다.
“경찰로서 법률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흥!”
“정중히 모셔라.”
경찰들이 슈텐달 남작 일행 옆에 밀착해서 밖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경찰을 뿌리치고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잡아!”
경찰들이 그 뒤를 쫓았다.
슈텐달 남작과 그 일행들은 의아했다.
“아니, 미스터 핀이 왜······?”
밀수를 한 적이 없으니 밀수품을 찾을 수 없을 테고 금방 풀려날 텐데, 왜 도망간다는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핀은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며 인파 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누군가가 갑자기 뻗은 지팡이에 걸려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경찰들이 얼른 그의 몸을 덮쳤다.
“남작님, 정말로 협조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핀의 도주를 빌미로 그리마가 슈텐달 남작을 압박했다.
남작은 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구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걱정 마시오.”
경찰들이 슈텐달 남작 일행을 데리고 터미널 밖으로 나가 마차 여러 대에 나눠 태우고 떠났다.
조금 뒤에 나온 루산과 스텐커가 자동 마차에 올라탔다.
루산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지팡이 좀 써 본 모양입니다.”
“허허! 그저 잡기술이죠, 기사님.”
루산이 엷은 미소를 짓다가 곧바로 경찰 마차를 따라갔다.
***
슈텐달은 항구 도시 브레머의 남쪽에 자리한 농어촌 지방으로 오랫동안 남작 가문이 다스려 왔다.
전대 슈텐달 남작은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거대한 공장이 들어서고 커다란 배가 화물을 산더미처럼 싣고 바다 위를 떠다녀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브레머에 대규모 공업 단지가 들어선답니다! 세상이 확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도 북쪽에 공단을 건설하면 브레머 공단과 동반 상승하는 효과를 거두어 크게 성장할 겁니다, 아버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첫째 아들 멜크는 오래전부터 슈텐달 지방의 개발을 주장해 왔다.
“멀쩡한 농토에 공장을 세우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대학 가서 공부하랬더니 허황된 소리만 듣고 왔구나! 농토는 우리의 근본이다. 농토가 없는 놈들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거야. 공장을 지으면 근본 없는 놈들이 몰려와 이 땅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사회 개혁, 세상의 변화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인근 브레머는 갈수록 발전하는데 슈텐달은 농촌, 어촌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슈텐달의 젊은 청년들이 브레머로 죄다 빠져 나가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농사짓고 고기 잡을 사람이 부족해졌다.
슈텐달 남작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마음속에 높은 성을 쌓고 그 안에서만 살았다.
70이 넘어서까지 자식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자식이 자신의 삶을 부정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슈텐달 남작이 죽고 나서야 멜크는 이 땅을 물려받아 자신의 뜻대로 경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46세. 재작년의 일이었다.
멜크 슈텐달 남작은 마음이 급했다.
이미 뒤처진 이 땅을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측근들도 그 뜻을 알기 때문에 사업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제국은 매년 급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제철소와 같은 자재 산업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제철소?”
“브레머 항과 가깝고, 강과 바다를 끼고 있으니 우선 입지가 좋죠. 우리 철강을 브레머 공단이나 노바 동부 공업 지구 같은 곳에 팔 수 있으니 수요처와도 가깝습니다.”
“하지만, 기존 제철소들이 이미 있잖나? 신규로 진입해서 경쟁력이 있겠어? 게다가 제철소는 대규모 설비가 드는 사업인데 그 자금을 어떻게 감당하겠어?”
그러자 제철소 아이디어를 낸 측근이 사업가 핀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너무나 유능하여 멜크 슈텐달 남작의 답답함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아직은 널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흥 마법 연구소에서 새로운 제철 공정을 개발했습니다. 생산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죠.”
“정말 그런 곳이 있습니까?”
“그럼요. 미심쩍으시다면 직접 방문하셔서 세미나에 참석하시거나 시연을 참관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루앙 마법 연구소를 알게 되었다.
“부르사 왕국이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여 원자재 가격이 크게 떨어진 상황입니다. 철광산을 인수하시죠.”
“정정이 불안하다면서요? 과연 생산이나 제대로 되겠습니까? 지금 구입한다 한들 나중에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부르사 왕국 옆이 바로 우리 제국의 영토 부르가스입니다. 부르사 왕국의 권력을 누가 잡든 감히 필센 제국인의 재산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죠.”
“으흠!”
“불안하시면 직접 현지답사를 가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쪽 당국자의 이야기를 듣고 광산 상황을 살펴보시면 결심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좋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현지답사를 다녀온 것이다.
“자금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제철소를 건설하고 해외 광산을 구입하려면 자금이 엄청날 텐데 걱정입니다.”
“제가 은행 쪽 사람들을 잘 압니다. 사업성만 좋으면 동일 담보에 대해서 중복 대출도 해 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은행 지점장을 면담하고 대출 확약을 받아 깜짝 놀랐다.
“다 좋지만, 제철소라는 것이 특별하고 확실하다는 느낌이 부족한 게 아쉽군요. 이거다! 이걸 하면 성공한다! 우리 공장에서는 이것을 만든다! 이런 느낌을 주는 사업 아이템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슈텐달 남작의 넋두리를 듣고 한참을 고민하던 핀은 얼마 뒤 루앙 마법 연구소에서 놀라운 아이템을 선보였다.
“이건 어디에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루앙 마법 연구소에서 나중에 주력으로 밀려는 사업이 이것이거든요. 제철 공정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고요.”
“세상에! 이것이 무엇입니까?”
“파워 아머라고 합니다. 대인전 무적의 장비죠. 전쟁을 멕 나이트로만 치를 수는 없습니다. 점령전, 시가전, 수색전에는 지상군의 참여가 필수적인데, 이러한 전투에서 전장을 지배할 것입니다.”
“아!”
슈텐달 남작은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핀이라는 유능한 사업가이자 조언자이자 조력자를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축복이었다.
그는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
슈텐달 남작은 핀이 제안한 모든 것을 그대로 해 나갔다.
부르사 왕국 철광 현지답사를 만족스럽게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브레머 항에서 경찰들에 체포되기 전까지는.
“내가 사기를 당하기 직전이었단 말이오? 말도 안 돼!”
별도로 마련된 방에서 스텐커가 차분하게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슈텐달 남작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
루산은 슈텐달 남작이 구금되어 있는 방의 바로 옆방에서 슈텐달 남작과 스텐커 그리고 간간이 질문하는 그리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핀을 소개한 사람이 누구라고요?”
“라이코. 라이코 리엔츠. 내 측근이오. 절대 그럴 리 없소!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자라온 사람이오!”
묻기도 전에 부정하는 슈텐달 남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루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슈텐달 남작은 행운아였다.
그동안 이런저런 명목으로 이미 대출을 받아 자금을 건네준 것들이 있기는 해도 본격적인 사업을 크게 벌이기 전에 구원자를 만나 보름스 가문처럼 망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슈텐달 남작에게 잠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주기 위해 스텐커와 그리마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마는 다른 쪽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갔고, 스텐커는 루산의 방으로 들어왔다.
루산과 스텐커는 슈텐달 남작이 있는 쪽에서 멀리 떨어져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사람 이야기를 들으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기꾼을 믿게 되었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유감입니다.”
스텐커의 위로에 루산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과정은 판박이인 것 같네요. 딱 하나, 파워 아머가 등장한 것만 빼면 말이죠.”
“그러고 보니 기사님은 파워 아머가 뭔지 아시는 것 같은데, 대체 뭡니까? 처음 들어 보거든요.”
“하아! 이게 또 머리가 아프네요.”
“······?”
“필센 마법 연구소에서 오래전부터 개발해 오던 겁니다. 아카데미 시절에 본 적이 있습니다.”
“필센 마법 연구소라면······?”
“선황제께서 직접 이름을 내리신 국립 마법 연구소죠.”
“······!”
스텐커의 눈이 확 커졌다.
“그, 그럼 이게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동안 오베론 공작이 이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했는데, 파워 아머의 등장으로 종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파워 아머는 7년 전에도 이미 완성돼 있었어요. 다만 비용 대비 효율의 문제 때문에 실용화가 안 되었던 거죠. 어쨌든 파워 아머를 사기꾼 놈들이 마음대로 활용했다는 것에서 몇 가지 경우를 가정을 해 볼 수 있겠군요.”
국립 마법 연구소가 파워 아머 기술을 민간 마법 연구소에 넘겼거나 - 더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었다, 파워 아머 기술이 탈취되었거나.
이게 아니라면 오베론 공작이 국립 마법 연구소를 장악했거나, 황제가 사기 사건과 관련돼 있거나.
첫 번째, 두 번째 경우에는 사기 사건과 파워 아머가 그리 중요한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세 번째, 네 번째라면 매우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건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물어볼 대상이 많다는 것.
“핀이라는 실행자, 마법사들, 파워 아머 착용 기사를 조져야겠군요.”
스텐커의 말에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내면 어떡할 거예요? 배후가 오베론 공작이다, 배후가 황제인 것 같다, 증거, 증인을 확보한들 어쩌겠어요? 우리는 개미라서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짓밟히고 말 텐데.”
사실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복수심과 인내심으로 서서히 파고들면 된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그랬는데, 파워 아머를 동원하는 것을 보고 정신이 확 들었다.
국립 마법 연구소에서 개발한 무기를 동원할 수 있는 상대라면 정말로 무지막지한 적이다.
상대의 강함을 인정하고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막연한 준비가 아니라 정말로 죽지 않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개미 같은 작은 미물이 커다란 짐승을 상대로 이기려면 뭉쳐야 한다.
우리를 건드리면 너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줘야 한다.
“사자도 개미 떼를 만나면 못 당하죠. 슈텐달 남작부터 만나 봐야겠어요.”
루산은 피해자 연대를 구축할 생각이었다.
일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