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FC 변경 군단의 기사-51화 (51/450)

51. 기사님 빼고 다 나빠요

***

법과 질서가 확립되지 않은 야만 사회에서도 살인과 폭력은 배척된다.

하물며 필센 제국 같은 문명국가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동안 놈들이 한 짓을 보면 은밀하게, 법과 제도를 이용해 재산을 가로채 왔어요. 시끌벅적하게 일을 벌여 주목을 끌고 싶지 않은 거죠. 섣불리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경호 인력을 늘리시는 게 좋겠어요.”

“알겠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기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겁니다. 기자들을 초청해 피닉스 제철의 성장 스토리를 함께 써 나가자고 해 보세요.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낙후된 농어촌에 대규모 공장 시설이 들어서는 것이니 분명 기삿거리가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낙후되었다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으나 슈텐달 남작은 일의 경중을 아는 사람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것보다 기자들을 옆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뜻 아니오?”

“맞습니다. 안전은 물론이고 사업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신문 기사의 위력은 엄청났다.

8군단 단장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개척민 모집 광고를 내지 않고 있음에도 변경 수기나 연재소설을 보고 편지로 변경 이주를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피닉스 제철에서 생산하는 상품이 비록 소비자에게 직접 닿는 물건은 아닐지라도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고 슈텐달 남작에 대한 긍정적인 평판을 널리 퍼뜨리는 데 분명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형의 보호막이 되어 슈텐달 남작을 지켜줄 것이다.

“조만간 사업가들을 초청해 설명회를 개최하시는 것도 생각해 보세요.”

루산은 자작나무숲 장원에 드나드는 사업가 회원들이 떠올랐다.

제철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건설, 설비, 수입, 유통, 제조··· 수많은 유관 산업과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슈텐달 북부에 조성할 대규모 공업 단지에 굳이 제철소 하나만 들어설 필요는 없었다.

“설명회? 무슨 말이오?”

“따로 연락을 드리죠.”

“알겠소.”

슈텐달 남작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호의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사와 신뢰,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자신이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뻔한 순간, 손을 뻗어 끌어올려 준 은인이 아닌가!

게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때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하도록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라이코 리엔츠는 어떡하실 겁니까?”

루산의 질문에 슈텐달 남작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평생 옆에 두고 쓸 것이오.”

“네?”

“경찰에 넘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딴짓을 못 하게 옆에 둬야 안심을 하지.”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슈텐달 남작은 강단 있고 독한 사람이었다.

라이코 리엔츠는 어차피 이 사건의 핵심과 전혀 닿아 있지도 않고 도구에 불과한 인물이라 남작의 처분에 맡기기로 했다.

라이코 리엔츠에게는 그것이 더 지옥일지 모른다.

물론 배신자에게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뵙죠.”

“몸조심하시오.”

슈텐달 남작이 루산에게 가방을 하나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가방을 받은 루산은 남작과 굳게 악수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스텐커가 기다리는 자동 마차의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노바로 출발했다.

“스텐커 씨, 사기 피해자들은 얼마나 파악됐나요?”

“지금까지 아홉 가문입니다.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넓은 영토와 적은 인원. 한계가 있었다.

“사람을 더 쓰죠.”

“비밀 유지가······.”

“피해자 가문 사람들 중에서 적당한 인물들을 합류시키면 되지 않겠어요? 그 사람들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아!”

“그리고 이거······.”

루산이 슈텐달 남작에게 받은 가방을 스텐커에게 넘겼다.

“이게 뭡니까?”

“활동 자금입니다. 알아서 집행하세요.”

가방을 열어 본 스텐커의 눈이 확 뜨였다.

고액권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슈텐달 남작님이 은행에서 대출받은 자금의 일부를 기꺼이 지원해 주셨어요. 놈들이 빌려 준 자금으로 놈들을 잡는 거죠.”

루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전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문의 재산을 되찾으면 무려 5만 골드를 성과 보상금으로 주겠다는 약속을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별말씀을요! 전직 경찰로서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사건입니다. 끝까지 파헤쳐 기사님의 원한을 푸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스텐커가 떨리는 목소리로 각오를 다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가방을 품으로 살짝 끌어안았다.

루산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이 격렬하게 피어올랐다.

결코 돈 때문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고충을 알아주시다니! 정말 이해심과 배려심이 깊은 기사님이야!’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이해심과 배려심이 깊은 기사님을 위해 내일부터 다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뛸 생각이었다.

***

노바를 떠나기 전 루산은 외숙의 저택에서 가족들을 만났다.

2년 만에 보는 누나는 그때처럼 배가 산처럼 나와 있었다.

“넷째야.”

누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봐 주는 사람이 있다지만, 매형은 애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클라크가 얼른 첫째, 둘째와 놀아 준 덕분에 혼란이 가시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에 더해 루산이 셋째를 안자 매형이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처남, 늦기 전에 얼른 낳아야지. 하하하! 나이 들면 힘이 달려서 못 키워.”

어머니가 그 말을 잽싸게 받았다.

“맞는 말이야. 얼마나 다복하고 좋으니. 너도 얼른 결혼하고 애도 낳고 살아야 하는데, 집안 사정이 이러하니 말도 못 하겠구나.”

어머니가 눈물을 찍자 누나 또한 감정이 전염돼 눈시울을 붉혔다.

“또 그런다, 또! 나 대신 누나랑 매형이 많이 낳았으면 됐지 뭐가 걱정이에요?”

“아무리 오누이 간이라도 내 자식하고 누나 자식하고 같니?”

“루산, 참한 아가씨 없어? 만나는 사람 있을 거 아니야?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루산은 인상을 찌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어. 내일부터라도 당장 알아 봐야지. 안나 부인한테 결혼 안 한 막내딸이 있었지 아마?”

“걔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 루산보다 많을걸? 성격이 되게 못 됐다더라고.”

“그래? 카타리나 백작 부인 셋째 딸은?”

“올봄에 결혼식 잡혔대요.”

“누구랑?”

“무슨 큰 공장을 한다던데?”

“그럼 또 누가 있지?”

어머니와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루산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무서운 적들과 살 떨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무슨 결혼이란 말인가!

약점만 늘어날 뿐이다.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누가 변경으로 시집오려 하겠는가?

어머니와 누나가 거론하는 사람들은 다 노바에서 행세께나 하는 집안이었다.

“그만! 결혼 얘기밖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니?”

어머니의 반문에 루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 해도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변경 괴수 이야기를 할 것인가, 변경 개척 이야기를 할 것인가?

멕 나이트 개발 테스트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렇다고 가문을 망하게 한 자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말을 하겠는가?

“요즘에는 자유연애도 유행이라던데 우리 아들은 서른이나 먹고 뭘 하는지······.”

“서른 아니거든요? 스물여덟이지.”

“해가 바뀌었으니 스물아홉 아니니? 어쨌든 이제 아무나 데려와. 그냥 허락할 테니까. 다 내려놨다.”

루산은 어머니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음은 그 옛날 자작 부인 시절의 영화를 잊지 못했다.

비록 집안은 망했지만, 아들이 잘났으므로 그에 걸맞은 집안의 여자를 데려오지 않으면 결코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루산은 현명하게 싸움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런! 열차 시간에 늦겠다. 다음에 올게요.”

“벌써 그렇게 됐니?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휴가가 이렇게 짧아? 고작 몇 시간 있다가 돌아가야 해?”

클라크가 속으로 웃었다.

이미 노바에 온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떠나기 직전에 온 것일 뿐이었다.

어쨌든 헤어질 때가 되자 어린 조카들도 울고 어른들도 울었다.

루산은 이 울음, 이 소란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매형은 지난번과 같이 돈이 든 주머니를 찔러 넣어 주었다.

“됐다니까 그러네. 매형, 넷이나 키우려면 아껴야죠.”

“어허! 그 정도는 벌어. 더 못 줘서 미안해.”

루산은 매형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자신이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택 바깥에는 미리 불러둔 마차 대신 익숙한 자동 마차가 서 있었다.

“어?”

바덴의 차였다.

바덴이 루산과 클라크를 발견하고는 차에서 내려 루산의 매형을 향해 인사했다.

자동 마차를 탄 세련된 젊은 여인의 등장에 매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야, 처남?”

매형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루산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루산이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아는 사람.”

“이야~! 있긴 있었네.”

자꾸 어깨를 툭툭 치며 괜히 좋아하는 매형을 보자니 루산은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와 누나한테 말하지 말아요. 진짜 그냥 아는 사람이니까.”

“그럼, 그럼. 입 무겁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지.”

‘퍽이나······.’

“갈게요.”

“어, 처남! 잘 지내!”

루산은 성큼성큼 자동 마차로 걸어갔다.

클라크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 가방을 들고 따라왔다.

루산과 클라크가 뒷자리에 앉자 바덴이 루산의 매형에게 인사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잠시 후 자동 마차가 출발했다.

부릉-

멀어지는 자동 마차를 보며 루산의 매형이 중얼거렸다.

“봄이 오려나?”

자동 마차가 일으킨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오는 것 같았다.

***

“바쁘다면서 왜 왔어요?”

루산의 목소리가 살짝 퉁명스러워서 바덴은 약간 서운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왔는데······.’

그래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는데 얼굴은 봬야죠.”

“다음부터는 그럴 필요 없어요. 일이 우선이니까.”

“···네.”

클라크는 안절부절못했다.

기사님이 오늘따라 더 까칠하게 구는 이유는 결혼 이야기에 시달리다 나왔기 때문이고, 하필 그의 매형이 바덴을 목격해 가족들에게 괜한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 짜증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은 알았지만 바덴은 몰랐다.

친절한 미스 고슬라가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루산은 슈텐달 남작의 사업 설명회를 구상해 보라고 지시하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노바의 겨울 풍경이 뒤로 휙휙 지나갔다.

도로 위의 눈은 따사로운 겨울 햇살에 녹았지만, 인도에는 상인들이 치운 눈이 쌓여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진 가로수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조금 남아 있던 눈이 바람에 날리고, 그 아래를 지나가던 연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루산은 바덴에게 고맙다고는 못 할망정 괜히 화를 내서 미안했지만,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몰랐다.

자동 마차 구르는 소리, 마차 소리, 바람 소리로 바깥은 시끄러웠으나 차 안은 적막이 흘렀다.

클라크는 숨소리가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마음속에서 극심하게 갈등하던 루산이 마침내 그 적막을 깨드렸다.

“미안해요.”

바덴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고 룸 미러로 살짝 루산을 봤다.

“와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평소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진심입니다, 미스 고슬라.”

바덴은 자신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일로 눈물을 흘리는 건 최악이야!’

좋은 상사도 있고 나쁜 상사도 있다.

좋은 날도 있고 안 좋은 날도 있는 것이다.

일로 만난 사이, 일로 풀어야 한다.

일하다 한 소리 들었다고 걸핏하면 우는 여자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바덴은 눈물과 콧물을 안으로 꿀꺽 삼켰다.

그리고 운전에 방해되지 않도록 얼굴을 만지는 척하며 눈가를 살짝 훔쳤다.

그렇게 겨우 역에 도착했다.

마침내 울음기를 수습한 바덴은 표정을 밝게 가다듬고,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내렸다.

그동안 얼굴을 못 봐서 주지 못했던 루산의 옷이었다.

“이건 뭡니까?”

“기사님 옷차림이 너무 얇아 보여서 샀어요.”

루산은 ‘이런 데 쓸데없이 돈 낭비하지 마세요.’, ‘급료가 너무 많나요?’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누르고 두 번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고마워요, 미스 고슬라.”

기사님이 발전했다고 클라크가 속으로 기뻐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기사님. 집사님도 잘 가요.”

“네, 미스 고슬라. 안녕히 계세요.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역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루산은 하필 보고 말았다.

화려한 색감에 몸매가 드러나도록 몸에 착 달라붙는 모피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역에서 나와 바덴의 뒤로 지나가는 것을.

그 여자는 바덴의 차 바로 앞 차에 기대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를 보고 환한 표정으로 달려가 격정적으로 껴안았다.

남자가 여자를 안고 키스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줄리아, 보고 싶었소!”

“다니엘, 저도요!”

그렇게 한참 동안 남자의 목을 껴안고 돌던 여인은 회전 속도가 느려지면서 주변 풍경을 서서히 식별하다 그중에 루산의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줄리아!

파혼한 약혼녀.

한때 세상의 전부였던 여자.

루산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줄리아 앞에서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행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줄리아가 부러워할 정도로 세상에서 더 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찰나의 순간, 바덴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가, 오른손으로는 바덴의 허리를, 왼손으로는 바덴의 뒷목을 받치고, 바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깜짝 놀란 바덴은 그야말로 어찌할 틈도 없이 루산에게 입술을 허용하고 말았다.

‘아!’

말랑하면서도 거칠고 뜨거운 입술의 공격에 똑똑한 머리가 마비되고, 마음속 깊이 꼭꼭 숨겨 두었던 루산에 대한 감정이 불같이 일어나 바덴의 몸을 조종했다.

바덴은 저도 모르게 루산의 목을 감싸고 자신의 입술로 루산의 입술을 압박해 빨아들였다.

‘헉!’

루산은 심장이 철렁했다.

처음에는 줄리아 때문이었지만, 바덴의 입술에 닿고 나니 줄리아는 이미 뇌리에서 사라졌다.

손으로 느껴지는 바덴의 몸, 바덴의 달콤한 숨결과 부드러운 입술··· 거기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세하자 품위와 이성은 젊음의 뜨거운 열기를 제어하지 못했다.

갑자기 노바 역 앞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열렬한 첫 키스는 방해꾼의 등장으로 인해 끝이 났다.

“루···산?”

바덴은 루산을 부르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루산 역시 두 사람만 들어갔던 세계에서 벗어났다.

“어? 줄리아, 오랜만이야.”

“그래요. 잘··· 지내죠?”

“그럼! 열차 시간 때문에 이만······.”

“아! 그래요.”

루산은 후회, 자책, 아쉬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덴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 볼게요.”

그러나 바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똑똑한 그녀는 루산의 키스가 바로 저 여자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챈 것이다.

첫 키스가 달콤하고 강렬했던 만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너져 울부짖고 분노의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그런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덴은 얼른 몸을 돌려 자동 마차를 타고 떠났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나쁜 자식!”

바덴은 루산을 욕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한편 역으로 들어간 루산은 마음이 영 불편해서 떠날 수가 없었다.

‘이걸 어쩌지?’

‘내가 왜 그랬을까?’

‘이게 다 줄리아 때문이야. 하필 이때 나타나서!’

‘어떻게 사과하지?’

그때 클라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며 말했다.

“나쁜 놈!”

“뭐?”

“나쁜 놈!”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니?”

클라크가 고개를 저으며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님한테 하는 말이 아니고요. 고양이한테요.”

“고양이가 왜 나빠?”

“강아지한테요.”

“강아지가 왜?”

“바람한테요.”

“······?”

“열차, 역, 도로, 마차, 사람들 다요! 다 나빠요!”

사춘기 소년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이다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미스 고슬라의 입술을 빼앗고 미스 고슬라의 마음을 아프게 한 루산이 너무나 미웠지만, 차마 루산을 미워할 수 없어 그를 제외한 세상 만물을 욕하며 엉엉 울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