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눈이 삐어 가지고
***
“요새 안색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니?”
“아무 일 없어요.”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바덴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피곤해서 그래요.”
그러자 아버지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너처럼 일하다가는 몸이 열 개라도 못 버티지. 그 보스라는 작자가 그렇게 부려 먹냐? 힘들면 그만둬라. 내 자식은 내가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 일이니까 하는 거죠. 내가 좋아서. 다녀올게요.”
“더 먹지 않고?”
“많이 먹었어요.”
바덴은 서류 가방을 들고 집에서 나와 자동 마차에 올랐다.
가족의 염려와 걱정에 오랜만에 미소가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바덴은 일단 시내로 들어가 법원 앞에 있는 자작나무숲 장원 안내 사무소로 출근했다.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직원들의 보고를 받고 나니 잠깐 짬이 났다.
서랍에 넣어둔 편지가 떠올랐다.
어제 도착한 루산의 편지.
뜯어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보스이고 자신은 고용된 사람이므로.
쓱쓱 종이칼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자른 바덴은 많은 두려움과 약간의 기대를 안고 편지지를 펼쳤다.
“후우우- 하아아-”
심호흡을 하고 읽어 나갔다.
<노바 노스에 다니던 시절, 문학 시간에 아름다움에 대하여 작문해 오라는 숙제를 받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무슨 과목에서든 지기 싫어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쓰고 싶었거든요.
대충 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무언가를 베끼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죠.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검술 수련법이라든가, 전쟁의 역사라든가, 사회 개혁의 의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해 보라 하니, 그 막막함이란······.
무언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런 쓸데없는 짓을 왜 시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훨씬 강했죠.
그래서 당당하게 백지를 제출했고, 처음으로 0점을 맞았습니다.>
바덴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소년 루산의 모습이 상상이 됐던 것이다.
<당신에게 사과의 편지를 쓰는 것은 그 작문 숙제처럼 막막한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아름다움에 대해 몰랐다는 것, 지금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섣불리 편지를 쓰지 못하는 것은 무슨 말을 해도 나의 잘못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고, 내 사과를 받고 당신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이해와 용서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당신에게 알리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서입니다.>
바덴은 루산이 자존심이 강한 만큼 자신에게조차 엄격한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앞서 아름다움에 대해 쓰라는 숙제를 백지로 제출했다고 했는데, 얼마 뒤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 곧바로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는 나보다 네 살이 어렸어요.
눈이 부셨고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그녀가 웃으면 주위가 환해졌고 그녀가 찡그리면 세상에 그늘이 졌습니다.
그게 아름다움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냥 깨달았죠.
그 소녀를 알게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녀와 약혼을 하던 날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죠.
그런데 가문이 망하고 내가 변경으로 가게 되면서 우리는 파혼했습니다.
지난 6년의 세월이 산산이 흩어진 것입니다.>
바덴이 원한 것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슬픔이 급격히 밀려왔다.
그러나 편지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날 노바 역에서, 7년 만에 그녀를 봤지요. 어떤 남자에게 달려가 안기더군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미스 고슬라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됐습니다.
그 순간의 복잡한 심경은 저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과는 그만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라고!’
<이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실례인 것 같지만, 결코 그 당시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세요.
미스 고슬라는 나에게 은인 같은 존재입니다.
일개 변경 기사로 허우적대고 있던 내게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구체적 희망을 보여 주었죠.
미스 고슬라의 열정과 노력은 내가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읽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편지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요.
그러다 보니 당신을 너무나 가까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소중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너무 가깝게 여겨 함부로 대한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찾아와 정중히 사과하겠다는 이야기, 이전처럼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 무리하지 말고 건강 잘 챙기라는 이야기가 이어지다 편지는 끝이 났다.
“후유······.”
바덴은 루산의 행동을 이해해 버렸다.
‘약혼녀였구나!’
자신에게는 잘못한 일이지만, 6년 동안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던 약혼녀와 파혼한 뒤 어느 날 갑자기 재회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결혼하여 다른 남자와 껴안고 키스하고 있었다면, 왠지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솔한 사과에 다행히 마음이 많이 풀려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눈에서 눈물이 빗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확실히 선을 긋는 느낌.
일말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바덴은 아이처럼 엉엉 울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름다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별로 예쁘지도 않더만. 눈이 삐어 가지고!”
***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온 루산은 근육에 부하를 주기 위해 우르사를 먼저 탔다.
[오늘은 호숫가로 가서 대형 괴수들을 사냥하기로 하죠.]
[알겠소.]
[그럽시다.]
레오파드 001, 002에 타고 있는 모리츠와 파비안이 대답했다.
003에 탄 바이크가 보조를 맞추면서 제자리 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모르츠와 파비안이 특급 비법이라며 강조한, 멕 나이트 잔걸음 뛰기였다.
실제로 이것은 전선 신입 파일럿 탈락자들을 단기간에 재교육시킬 때 교육 기간 내내 시키는 것으로 체력, 균형, 민첩성, 인내심을 기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효과는 곧 그만큼 고되다는 뜻, 파일럿들이 가장 몸서리를 치는 훈련이었다.
[포기하고 집에 가라. 가족들이 반가워하겠지. 내 자식이 이렇게 인내심이 없구나, 하고 안쓰러워하실 거야.]
[아, 아닙니다!]
[아냐, 아냐. 집에 가. 그러는 편이 군에도 도움이 돼.]
[끝까지 해 보겠습니다!]
[가라니까. 그만 둬. 마나 연료 낭비 작작하고.]
[해, 해 보겠습니다! 으아아!]
바로 그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크는 루산이 없는 동안에도 루산이 시킨 검술 기본기 훈련과 함께 이 멕 나이트 잔걸음 뛰기 훈련을 계속해 왔다.
이마저 못 하겠다고 포기하면 자기 자신이 너무 실망스러울 것 같아 정말로 이를 악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열흘 남짓한 기간이지만, 확실히 전보다 멕 나이트 균형을 잡고 움직이는 데 익숙해 보였다.
원래 변경에서는 이렇게 파일럿의 체력을 소진하는 훈련을 따로 시키지 않는다.
지치면 사냥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변경은 파일럿을 기르는 곳이 아니고 써 먹는 곳이라서 급료를 받고 도움이 안 되는 파일럿은 퇴출 대상이지 재교육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격렬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은 연료를 낭비하는 일이다.
그러나 루산은 모른 척했다.
어차피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바이크, 훈련을 통해 개선이 되면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실력이 향상되면 3전대와 자신에게도 이익이었다.
연료 또한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런데 모리츠 경과 파비안 경은 부르가스에서 오래 근무하셨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20년 조금 안 될 겁니다.]
그 정도면 거의 현지인이나 다름없었다.
[부르사 왕국이 부르가스와 인접해 있나요?]
[그렇지요.]
[부르사 왕국이 정정이 불안하다던데······.]
[원래 그런 곳입니다. 아주 오래됐어요.]
[그러면 우리 제국 사람들이 부르사 왕국에서 원자재나 광산 개발권을 매입하는 경우에 위험이 크겠군요?]
[원자재? 광산 개발권? 전대장님은 사업도 하세요?]
[아니오! 제가 무슨······. 이번에 휴가 갔더니 아는 분이 사업 이야기를 하셔서요. 두 분이 부르가스에서 오래 근무했다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죠.]
[아! 그건 부르가스 행정청을 끼고 거래를 하시는 게 좋아요. 정확한 부서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워낙 사기 사건이 많은 곳이라서······.]
[그리고 부르사 왕국 내부에서 사람을 고용해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자기가 위험 부담을 안고 하는 거지만, 재산권을 구입했다면 그것은 보장이 됩니다. 감히 부르사 왕국이 -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 우리 제국 사람의 재산권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죠. 우리 제국민이 사기 당하는 일을 막고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부르가스 행정청에서 부서를 만든 겁니다. 중개인들이 난립해 있는데 그 사람들하고 엮일 필요가 없어요.]
[아하!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루산은 만족스럽게 대화를 마쳤다.
사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누구나 설득될 만한 내용에 살짝 거짓을 섞어 완성시키는 것이다.
제철 공정 효율화, 저렴한 철광석.
이런 것들이 완전히 허위라면 상대가 무지렁이도 아닌데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재산이 많은 귀족들이 허술하게 검증할 리 없는 것이다.
상당 부분은 진실일 수밖에 없었다.
이걸 미끼로 서류에 장난을 쳐 투자금이 유령 회사로 들어가게 만들고, 은행에서 대출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파산을 시켜 재산을 가로채는 것이다.
루산은 슈텐달 남작에게 부르사 왕국의 철광을 부르가스 행정청을 끼고 구입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제철 공정 효율화 연구를 마쳐 적용할 수만 있다면, 피닉스 제철은 원래 사기꾼들이 제시한 두 가지 요소를 충족하여 철재와 강재를 저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제철소가 된다.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제철소의 꿈이 슈텐달 남작의 피닉스 제철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며 루산은 호숫가에서 대형 괴수들을 때려잡았다.
붕-
붕-
오랜만에 휘두르는 대형 철퇴에 수륙양용 괴수들의 대가리가 퍽퍽 깨져 나갔다.
루산과 001, 002 파일럿들은 쉬지 않고 호숫가 괴수들을 사냥했다.
[003, 잔걸음 뛰기 속도가 느려진다!]
[헉, 헉! 하, 하, 합니다. 해요!]
바이크가 숨을 헐떡대면서도 악에 받쳐 소리쳤다.
세 대의 멕이 사냥에 나서는 동안 003은 비틀비틀 잔걸음을 쉬지 않고 뛰었다.
***
루산이 반달 호수 지역에 있는 대형 괴수의 씨를 말리려는 듯 사냥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본부에서 그를 호출했다.
루산은 정찰병 경갑을 착용하고 그 위에 바덴이 선물한 여행자 외투를 걸친 뒤 탐탐에 올라타 본부까지 달려갔다.
오랜만에 통치자와 단장 그리고 기동 전단장이 함께 모여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오! 어서 와요, 커맨더 보름스. 외투가 멋지군요.”
8구역 통치자가 루산을 반갑게 맞이했다.
“감사합니다.”
그때 전단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원시의 땅 깊은 곳으로 가장 많이 정찰해 본 사람이 3전대장이라더군요.”
루산은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금방 알아챘다.
“혹시 물어본 사람이라는 게 트리어는 아니겠죠?”
“하하, 왜 아니겠어요?”
루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경 초년 시절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단장이 원래도 표정이 딱딱한데 더욱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극비야. 입을 꼭 다물어야 해. 알겠나?”
“네? 네, 알겠습니다!”
루산이 표정을 바로 하고 대답했다.
“제국군 멕 나이트 기동 전단이 얼마 뒤면 우리 8구역으로 들어와 원시의 땅을 거쳐 아라드 왕국을 구하러 간다.”
“······!”
“커맨더 보름스!”
“네, 단장님!”
“길잡이를 해 주게.”
루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군지 몰라도 변경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이 책상에 앉아 지도 위에 선을 대충 그으면서 세운 계획 같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변경 8구역 역시 제국의 일부이니 명령에 따라야지.”
“···알겠습니다.”
루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겪지 않았음에도 앞으로 펼쳐질 고난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어쨌든 제국군이 아라드 왕국을 돕든 말든 남의 일이었다.
길 안내를 하는 동안 괴수 사냥을 못 하게 되는 셈이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야 했다.
그게 바로 변경의 방식이니까.
“길 안내 기간에 사냥 못 하는 부분은 어떻게 보상이 이루어집니까?”
루산의 질문에 단장은 인상을 썼고, 전단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젊은 통치자가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원하는 게 있나요? 신사업부 부장 겸 3전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