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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56화 (56/450)

56. 이왕 만든 거, 많이 팔아야지

***

“확실히 물갈퀴는 너무 약해요.”

루산이 스피디 발가락 사이의 찢어진 금속 막을 보며 말했다.

“관절도 보강해야겠어요.”

처음 가 보는 길을 안내하느라 워낙 많이 뛰어다니고 지형을 살피기 위해 계속해서 산을 오르내리는 바람에 걸을 때마다 관절에서 끼익끼익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그런데 정비 없이 이 정도로 혹사하면 관절이 조금씩 헐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다른 기체들도 비슷할 겁니다.”

모리츠의 말에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츠 경 말씀이 맞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문제점을 지적해야죠. 이를 받아들여 개선할지 말지는 연구소에서 결정하겠지만요.”

이번에는 모리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스피디는 양호한 편이었다. 모든 기체들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그동안 겪은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시의 숲을 통과하다 이런저런 괴수들의 공격을 받는 것은 늘 있는 일이라 제국군 파일럿들도 이제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캄캄한 밤에 거대한 세르펜스 무리가 야영지 주위에 설치해 놓은 알람을 울리며 나타나 잠에 빠져 있는 멕 나이트를 꿀꺽 삼켰을 때의 두려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모든 멕 나이트들이 달려들어 공격했지만, 세르펜스의 질긴 피부는 마나 진동 대검에도 좀처럼 잘리지 않았다.

그때 세르펜스 사냥 경험이 있는 루산이 001, 002와 함께 세르펜스의 입아귀를 찢어 버리는 방식으로 겨우 녀석들을 해치우고 목구멍에 박혀 있는 아이언 워리어를 끄집어냈다.

며칠 전에는 산을 피해 넓은 평원을 지나는데 이 지역이 대규모 퐁고 서식지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강철 거인들을 보고 위협을 느낀 퐁고가 동료들을 불러냈다.

숲에서 쉬고 있던 대규모 퐁고 무리가 대형 괴수의 넓적다리뼈로 만든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평원으로 들어선 원정군을 에워싸고 다가올 때의 두려움이란!

원시의 땅에서 거대한 퐁고들과 거대한 강철 거인들 사이에 엄청난 교전이 벌어지고, 여러 대의 멕 나이트가 퐁고의 뼈 몽둥이에 맞아 심하게 우그러지고 말았다.

루산이 퐁고들 사이를 빠르게 달려서 마나 진동 삼지창으로 우두머리의 머리를 꿰뚫어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잠시나마 놈들이 달아났던 것이다.

깊은 원시의 숲을 한참 동안 헤치고 나아갔는데 거대한 강이 앞을 가로막아 상류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고, 쩍 벌어진 낭떠러지를 피해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원정대의 멕들은 괴수의 피와 늪지대의 오물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언뜻 봐서는 어떤 모델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손상이 심한 멕들은 두고 간다.”

아이젠 자작의 결정에 심하게 부서진 아이언 워리어 일곱 대가 원시의 숲에 남겨졌다.

명색이 아라드 왕국을 구하기 위한 부대인데 패잔병의 모습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단지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전력에 도움이 안 될 정도로 몸체가 부서진 것들이었다.

이제 누구도 변경 군단 길잡이 파일럿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동안 깨달은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자신들은 이 원시의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이동한다!”

휴식이 끝나고 원정대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키가 6미터밖에 안 되는, 왜소한 스피디를 필두로 레오파드들이 길을 찾기 위해 앞장서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허리춤에 달린 그물망 주머니에는 어느새 대형 괴수의 생명 구슬이 그득그득 차 있었다.

누구도 말은 안 했지만, 이 험한 여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마주치는 괴수들의 위험 수준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변경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

쿵!

쿵!

쿠쿵!

쿠쿠쿠쿵!

은은한 진동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높게 자란 풀숲에서 땅을 파헤치며 벌레를 잡아먹고 있던 야생 탐탐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두리번거렸다.

거대한 강철 거인들이 초원을 헤치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탐탐-

탐탐-

탐탐들이 가슴을 북처럼 두드려 동료들에게 경계 신호를 보냈다.

탐탐-

탐탐-

북소리를 듣고 달아나던 탐탐들이 간간이 멈춰 서서 불청객들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강철 거인들은 자신들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탐탐-

탐탐-

야생 탐탐들은 경계를 풀고 다시 땅을 파헤치며 벌레를 잡아먹는 일에 몰두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알았네.]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루산이 일행과 함께 야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제국군 파일럿 하나가 다가왔다.

아이젠 자작의 서브 파일럿이었다.

전단장 정도 되면 직접 멕을 타고 일선에서 싸우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았다.

아이젠 자작이 그만큼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 왔던 것이다.

전단장의 서브 파일럿은 ‘서브’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과 달리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다.

전단장의 멕을 타고 싸우기 때문에 유사시에 이 전단을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전단장님이 부르시네.”

“···알겠습니다.”

루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아이젠 자작의 모닥불로 가서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젠 자작의 서브 파일럿이나 평소 곁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은 지시를 받고 멀찍이 떨어진 모닥불로 가고 없었다.

두 사람만 앉아 있는 어색한 자리.

“식사나 하자고 불렀네.”

“네.”

괴수와 싸우고 길을 찾느라 바빴다지만, 조용히 둘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동안 서로 의도적으로 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고,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기 때문에 아이젠 자작은 이 자리를 마련했다.

잠시 후 멕 워커 파일럿 두 명이 뜨겁게 달군 철판에 즉석에서 구운 빵과 군용 간편식 통조림, 그리고 물 잔을 가져왔다.

아이젠 자작이 손짓으로 권하자 루산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불티가 타닥타닥 튀는 가운데 음식 냄새를 맡고 날벌레들이 날아들었다.

루산과 아이젠 자작은 통조림으로 달려드는 날벌레들을 쫓으며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빨리 먹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군.”

아이젠 자작이 화젯거리를 찾아서 다행이라는 듯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더 빨라졌을 겁니다. 한가하게 밥 먹고 있을 여유가 없는 곳이거든요. 특히 밖에서 야영을 할 때는.”

“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멕 워커 파일럿들이 다가와 빈 그릇과 용기를 치우는 통에 잠시 말이 끊어졌다.

“7년이 지났구나.”

“···네.”

“지낼 만하던가?”

“그럭저럭 지냅니다.”

“으음······.”

아이젠 자작이 공연히 불쏘시개로 모닥불 장작을 건드렸다.

불티가 확 날렸다.

괜한 일을 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작은 통나무 하나를 모닥불에 얹는 바람에 다시 불티가 솟구쳤다.

“애는?”

“네?”

루산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아이는 몇이나 되나? 잘 크나?”

“무슨 아이를 말씀하시는 건지······?”

“자네 아이 말이야.”

루산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아입니까?”

아이젠 자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인가?”

“제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데 무슨 결혼입니까? 변경에 살겠다고 오는 여자도 없을 테고요.”

아이젠 자작은 줄리아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루산에게 여자가 있는 것을 봤다며 눈물을 펑펑 흘리지 않았는가?

‘그 녀석이 술에 취해서 잘못 봤나?’

평소 하고 다니는 짓을 생각하면 그럴 만했다.

어쨌든 아이젠 자작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력은 여전한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군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자네 실력이라면 출발이 몇 년 늦더라도 금방 추월할 거야. 알다시피 우리 제국은 여러 전선에서 유능한 파일럿을 필요로 하지. 공을 세울 기회는 충분해. 어떤가?”

루산은 길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지만, 예의상 잠깐 숙고하는 표정을 지은 뒤 말했다.

“변경이 무시당할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사들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면 자네가 이해하게.”

“그게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변경에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저는 여기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으음!”

“교수님께서 저를 얼마나 아껴 주셨는지, 저를 얼마나 위해 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경에 대한 생각은 꺾으실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제 힘으로 반드시 가문을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이 땅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리라고 확신합니다.”

아이젠 자작이 루산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루산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하아! 그런가?”

“······.”

“알았네.”

루산은 목례를 하고 아이젠 자작의 모닥불을 떠났다.

바이크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물었다.

“전대장님, 저 까칠한 아저씨가 왜 불렀대요?”

바이크의 단어 선택에 루산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동안 안내해 줘서 고맙다고.”

“에이, 설마! 제국군 두목이 그럴 리가 있나요? 우리 전대장님, 농담도 잘하셔.”

루산은 웃고 말았다.

이제 바이크의 넉살이 싫지 않았다.

밤이 깊은 뒤에도 아이젠 자작과 루산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별들만 눈에 담다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다음 날, 필센 제국 원정군은 아라드 왕국의 변경 개척촌을 발견했다.

필센 제국 변경의 개척촌과 달리 나무와 돌과 흙으로 높고 단단한 성곽을 구축해 놓은 개척 마을.

개척촌을 빠르게 확대해 나갈 것이라면 성곽을 쌓는 데 들인 노력이 무척 아깝지만, 가난하여 멕 나이트 자원이 부족한 아라드 왕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이었다.

먼 옛날에는 모든 나라의 변경이 이러했을 것이다.

개척촌 성벽 위에서 레인저 하나가 원시의 땅에서 나타난 멕 나이트 대군을 보고 깜짝 놀라 비상종을 쳤다.

땡땡땡땡땡-

개척촌이 발칵 뒤집혔다.

- 두려워 마시오. 아라드 왕국을 돕기 위한 원군이니.

아이젠 자작이 외부 확성기로 우렁우렁 소리쳤다.

잠시 후, 개척촌 책임자가 달려와 아이젠 자작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왕성까지 길을 안내해 주기로 했다.

아이젠 자작이 자신의 아이언 워리어에서 내려 루산을 불렀다.

루산이 내려 다가오자 아이젠 자작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약간의 피해는 있었지만, 자네 덕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네. 필센 제국 군인으로서 감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군. 정말 고마웠네.”

아이젠 자작이 정말로 감사의 말을 하자 003에서 듣고 있던 바이크는 깜짝 놀랐다.

루산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젠 자작이 루산을 좀 더 가까이 당기더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나직이 말했다.

“줄리아가 아직까지 자네를 잊지 못해 독신으로 지낸다네. 아비로서 미칠 노릇이지.”

“······!”

루산은 깜짝 놀랐다.

지난번에 열차 역에서 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네가 아직까지 생각이 있다면, 그리고 지금이라도 군에 들어온다면 당장 결혼을 시키도록 하지. 만약 자네가 변경이 더 좋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리고 줄리아가 기꺼이 변경 땅에서 살겠다고 하면 그때도 결혼을 시키겠네. 어떤가?”

아이젠 자작이 밤새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루산은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젠 자작이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고 대답을 듣도록 하지.”

아이젠 자작이 몸을 돌려 자신의 멕 나이트에 올라타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수도 군단 제3 기동 전단 멕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때까지 루산은 멍하니 가만히 서 있었다.

- 전대장님! 커맨더! 우리도 가아죠.

“어? 어! 알았어.”

루산이 스피디에 올라타고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001, 002, 003, 그리고 탐탐에 탄 정찰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 때까지 루산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침묵을 깨고 말했다.

[멕 나이트를 테스트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실전성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멕 나이트를 상대로 얼마나 잘 싸우는지 봐야죠.]

[네?]

[우리도 제국군 파일럿들과 함께 마리노 공화국의 멕을 쳐부숴 애국도 하고 레오파드 실전 테스트도 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갑자기요?]

[하지만, 이번 작전은 비밀이 생명이라면서요? 우리 기체는 노출된 적이 없는데······.]

[그러니 더욱 비밀이 지켜지는 거죠.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우리 기체를 보고 나서 그때 아라드 왕국에서 싸웠던 게 필센 제국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겠습니까?]

[제국군이 부대 표시와 마크를 지워도 적들은 필센 제국군이라는 것을 짐작할 겁니다.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그야 그렇지만······.]

[우리도 적에게 노획되지만 않으면 상관없어요.]

[그건 맞죠.]

[아라드 왕국은 산지가 많습니다. 레오파드가 다른 기체들보다 훨씬 위력을 발휘할 겁니다. 그걸 보면 제국군에서 레오파드를 구입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 이왕 만든 거, 많이 팔아야 하지 않겠어요?]

결국 모리츠와 파비안은 루산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바이크는 딱히 발언권이 없었다.

레오파드 네 대로 아라드 왕국을 돕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국군 멕 나이트 70여 대가 함께하기 때문에 그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레오파드 시제기들과 탐탐에 올라탄 정찰병들이 다시 동쪽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탐탐-

탐탐-

투덜대는 정찰병들과 달리 탐탐들은 신나게 달려서 마냥 기뻤다.

[우르사, 003, 스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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