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우리 어디 가요?
***
탐정 겸 해결사 스텐커.
그는 최대한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하려 하지만, 불법적 방법을 아예 거부하는 결벽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가 엄격한 준법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경찰 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루돌프 기센 씨죠? 잠시 여쭤 볼 게 있습니다.”
필센 제국은 법 앞에 평등한 나라.
귀족들도 경찰의 검문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하물며 부인과 자식들이 기다리는 자신의 저택이 아닌, 애첩의 주택으로 들어가던 길이라 기센은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찰 패를 본 기센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 무슨 일이오?”
“이 집의 주인 되십니까?”
“아, 아, 아니···, 그렇소.”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맞다는 말씀입니까?”
“무, 무슨 일로 그러는지 먼저 말해 보시오.”
“탈세 혐의로 조사 중인데, 이 집이 비올라 양의 명의로 돼 있지만 사실은 회삿돈을 빼돌려 마련해 준 것이라는 투서가 들어와서요.”
“투, 투서? 대체 누가 그런 허튼 소리를!”
“비올라 양과 선생 사이에 어린아이가 하나 있더군요. 부인께서도 아십니까?”
기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창백해졌다.
기센의 약점.
“아니, 대체······.”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여기서 계속 이야기할까요?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군요. 이도 저도 싫다면 경찰서로 소환하겠습니다. 아니면 부인께도 알리죠. 아! 비올라 양 말고 기센 부인 말입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스텐커의 압박 화술에 휘말려 기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나와 반갑게 기센을 마중하려다 따라 들어오는 스텐커와 그의 조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아. 급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온 손님이야. 걱정 말고 방에 들어가 있어.”
그러면서 그는 스텐커와 조수를 서재로 이끌었다.
스텐커는 두려운 눈빛으로 아이를 끌어안은 젊은 여인에게 살짝 목례하고 기센을 따라 들어갔다.
지킬 것이 있는 곳으로 들어와서인지, 들어오는 동안 머리를 굴려서인지 몰라도 기센이 표정을 굳히고 엄중히 항의했다.
“그런데 경찰이 야간에 이렇게 다짜고짜 들이닥쳐도 되는 것이오?”
그때 조수가 문을 닫았다.
쿵!
낮은 소리였지만, 기센은 흠칫 놀랐다.
스텐커가 의자를 쭉 끌어와 앉으며 범인을 추궁하는 예리한 눈빛으로 기센을 노려보았다.
“뭐가 그리 당당해서 큰 소리지? 섬기던 가문 팔아먹고 받은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젊은 여자랑 딴 살림 차리고 사는 주제에 말이야.”
기센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대, 대체 뭔 소리야? 지, 지금 말 다 했소?”
“뭐, 당신 사생활이야 내가 알 바 아닌데, 애는 죄가 없잖소. 협조하면 가정은 파탄 나지 않도록 해 주겠소. 비록 남의 가정은 파탄을 냈지만 말이야. 파탄 난 가정의 말로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소?”
‘부인이 이 집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기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뭘 협조하라는 것이오?”
“보름스 가문에 작업 건 자들에 대해 털어놔 봐요. 기억이 안 난다, 난 모른다, 그런 가정 파탄적인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스텐커는 경찰 패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문을 지키고 선 그의 조수는 더욱더 무서운 눈빛으로 기센을 노려보았다.
기센은 머릿속이 헝클어진 것 같이 혼란스러웠다.
“하아!”
결국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체념한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 동안 듣고 있던 스텐커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조수도 입을 떡 벌렸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기센은 스텐커에게 절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제발 부인에게는 이야기하지 말아 주시오!”
“허!”
스텐커는 기가 찼다.
이 사건의 스케일보다 자신의 가정이 더 중요한 이 남자.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
스텐커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경찰 패를 집어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사업 핑계로 외박 작작 하고 본집에도 자주 들어가시오. 당신 셋째 아들이 얼마 전에 실연을 당해서 매일 술에 절어 살고 있으니까.”
깜짝 놀란 기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스텐커를 쳐다보았다.
‘나뿐 아니라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 크나큰 두려움이 깃들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다시 물어보러 올 테니 얌전히 살고 있어요.”
기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텐커는 기센에게 두려움을 깊이 심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와 그의 조수는 서둘러 골목에 세워 둔 마차에 올라탔다.
조수가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말했다.
“세상에 재무부라니! 이 사건,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보다는 아는 것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슈텐달 남작한테 다시 가 봐야겠어.”
“지금 바로 갈까요?”
“음.”
스텐커는 턱을 쓰다듬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시간에도 다니는 마차와 자동 마차가 제법 되었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필센 제국은 분명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발전과 풍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누군가의 재산? 누군가의 눈물?’
스텐커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공연히 거창한 감상에 빠지려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증언, 증거,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가로등이 환하게 비쳐 주는 밤길을, 마차는 달렸다.
***
그동안 루산이 이끄는 산악 특임 기동 전대는 엄청난 활약을 했다.
아라드 레인저의 협조를 받아 적의 보급을 끊고, 전령을 차단하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수도로 진군하려는 마리노 공화국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4대뿐이지만, 40대 이상의 역할을 하겠다!”
처음에 아라드 왕국군을 안심시키기 위해 큰소리친 것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루산의 성과에 고무된 아이젠 자작은 시간을 더 끌지 않기로 했다.
기세가 올랐을 때 승부를 봐야 한다.
일단 유인 작전으로 적의 병력을 확 줄이고 충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정면 대결에서 승리하여 마리노 공화국군의 전투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젠 자작의 두 번째 유인 작전에 걸려 절반의 멕 나이트가 날아간 마리노 공화국 2전단이 지키고 있는 산길.
부대 표시와 마크가 없는 아이언 워리어 수십 대가 지축을 울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시간 끌 것 없다! 힘으로 밀어라!]
[네!]
수도 군단 제3 기동 전단 파일럿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육중한 아이언 워리어 70여 대가 뱀처럼 길게 산길을 올라와 아래에 진을 치고 있는 마리노 공화국 멕 나이트 부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라드 왕국군이 차지하고 있던 고지라도 장악하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별 고민 없이 그동안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진지와 숙영지 앞에 그대로 자리한 것이 그들의 실수였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쿵쿵쿵쿵!
쿵쿵쿵쿵!
멕 나이트 70여 대가 방패를 앞세우고 비탈길을 달려 내려오자 고작 20여 대의 멕 나이트로는 그 충격을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쾅!
쿵!
마리노 공화국의 멕 나이트들이 충격에 크게 휘청하며 뒤로 밀려났다.
[버텨라!]
[뒤에서 받쳐!]
뒤쪽 멕 나이트들이 앞쪽 멕의 등을 받쳤지만, 바닥에 스파이크를 박은 발이 버티지 못하고 밀렸다.
흙이 뒤집히고 바위가 파이며 뒤로 죽죽 밀렸다.
[밀어!]
[버텨라!]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상대를 밀었다.
그러나 상류에서 둑이 터져 쏟아져 내려오는 물을 막을 수 없듯이 한계를 넘은 마리노 공화국의 멕 나이트들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터덩텅!
투두퉁!
뒤로 넘어지고, 앞쪽 멕이 쓰러지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고···, 그야말로 거대한 나무토막처럼 흐트러졌다.
[가라!]
아이언 워리어들이 쓰러진 마리노의 멕 나이트들을 짓밟으며 일렁이는 빛의 대검으로 그 가슴팍을 가차 없이 찔렀다.
[끄억!]
[으헉!]
조종실을 뚫고 들어오는 잔인한 빛의 대검을 목격할 새도 없이 마리노 공화국군 파일럿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며 멕 나이트 안에서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
아이젠 자작이 외부 확성기로 소리쳤다.
굳이 이긴 싸움에서 피를 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파일럿을 죽이는 것은 멕 나이트를 손상시키는 일이라 항복을 받고 온전한 멕을 획득하는 게 이익이었다.
그러나 금속 거인들이 벌이는 시끄러운 전쟁 소음으로 인해 그의 목소리는 전장에 얼른 전달되지 않았다.
그 사이 마리노 공화국 파일럿 몇 명이 추가로 숨을 거두었다.
결국 다섯 명이 항복하고 20명이 넘는 파일럿들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없었다.
거대한 멕 나이트 대검에 찔리고도 살아남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전장 정리는 아라드 왕국군에 맡기고 우리는 다음 목표로 이동한다! 서둘러!]
신속함으로 승리하기 위해 아이젠 자작은 부하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훈련 강도가 높은 수도 군단 파일럿들은 군말 없이 절도 있게 대답했다.
[네, 전단장님!]
아이언 워리어들이 얼른 열을 맞춰 꾸불꾸불한 산길을 긴 뱀처럼 빠르게 이동했다.
마리노 공화국군 보병들은 적의 멕 나이트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 얼른 산비탈로 붙어 있다가 뒤에 다가오는 아라드 왕국군 기동 부대와 보병대에 항복했다.
마리노 공화국 두 번째 기동 전단을 전멸시킨 아이젠 자작은 쉬지 않고 이동해 수도로 들어가는 세 번째 산길을 차지하고 있던 마리노 공화국 기동 전단의 배후를 공격했다.
산길에서 앞뒤로 갇힌 마리노 공화국 3전단은 거세게 저항했지만, 결국 많은 피해를 입은 뒤 항복했다.
수도 군단 제3 기동 전단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적이 입은 피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라드 왕국 왕성으로 가는 길목 다섯 개 중에 세 군데가 뚫리자 남은 두 곳의 마리노 공화국 기동 전단은 각개격파를 피하기 위해 후퇴했다.
***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아라드 왕국군 사령관 니트라 장군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타고 달려와 아이젠 자작의 손을 붙잡고 감격했다.
2년 여 만에 수도 포위망이 풀린 것이다.
멕 나이트 수천 대를 보유한 필센 제국이 고작 80여 대를 원군으로 보낸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고 욕을 했던가?
그러나 그 일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다.
작전을 세우는 족족 들어맞았고, 싸움을 하는 족족 승리했다.
그리고 네 대밖에 되지 않는 신형 멕 나이트.
산악 특임 기동 전대가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는 이미 레인저를 통해 보고를 들었다.
필센 제국은 정말로 대단했다.
“아이젠 장군, 정말 고생 많으셨소! 단기간에 강행군을 했으니 며칠 쉬었다가 다시 진격을······.”
“아닙니다, 장군.”
“······?”
“전투의 피로는 전투로 풀어야지 쉬면 몸이 퍼져서 안 됩니다.”
근처에서 듣고 있던 수도 군단 제3 기동 전단 파일럿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괜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반항은 눈곱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명령에 따르면 영광된 승리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니트라 장군도 감탄과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아이젠 자작이 말을 이어갔다.
“적은 호리아 평원을 장악하려 할 겁니다. 그곳을 내주면 아라드 왕국은 계속 마리노 공화국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저들이 먼저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물리쳐야 합니다.”
“음! 맞는 말씀이오.”
니트라 장군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호리아 평원은 산지로 이루어진 아라드 왕국에서 그나마 존재하는 넓은 평지로, 여러 지방과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마리노 공화국이 먼저 이 땅을 장악해 요새를 구축하면 이번에는 아라드 측이 반대로 고전을 하게 된다.
수도 군단 제3 기동 전단 병력을 필두로 아라드 왕국 측 멕 나이트가 이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어 전력에서 이탈한 기체들을 제외하고 아이언 워리어 55대, 노획한 적 멕 나이트 17대, 아라드 왕국의 멕 25대, 총 97대가 참가했다.
한편 마리노 공화국은 4전단과 5전단의 멕 나이트 100대, 예비대로 남아 있던 40대, 총 140여 대가 호리아 평원으로 집결했다.
그 시각 루산 일행은 레오파드를 타고 산을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멕 나이트들에 비해 다소 가볍다고 해도 쇳덩이라 아무 산이나 평지처럼 이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라드 레인저들이 레오파드가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안내해 주고 있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아무리 필센 제국이 멕 나이트 80여 대를 원군으로 투입했다 해도 이처럼 빠르게 승기를 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슬로 영감의 까마득한 후배들은 계곡과 완만한 비탈 위주로 다람쥐처럼 이동했다.
스피디를 타고 산양처럼 겅중겅중 뛰며 그들 뒤를 따라가던 바이크가 물었다.
[전대장님,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이 전쟁을 끝내러.]
루산이 자못 비장하게 대답했다.
바이크가 깜짝 놀랐다.
[우리끼리요?]
[왜? 어려울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 네 대로는 좀······.]
모리츠, 파비안, 그리고 루산이 미소를 지었다.
[후후! 걱정 마. 힘들 것 같으면 달아나면 되니까.]
[그, 그렇죠?]
[그럼! 이건 진심이야.]
남의 전쟁, 목숨을 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루산의 말에 바이크가 안심했다.
그들은 산을 타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길로 내려가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다 다시 산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며칠을 달리는 동안 호리아 평원에서는 양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작심하고 벌이는 회전이 아니라 탐색전 수준이었다.
마침내 레오파드 전대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다?]
코발트빛 바다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음! 가자! 특임 전대 임무를 마무리하러!]
레오파드 네 대가 레인저 대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산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