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거기가 어딘데요?
***
“저건 뭐지?”
“글쎄, 처음 보는 기체인데?”
항구에 있던 마리노 공화국 병사들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다가오는 네 대의 멕 나이트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아군이 호리아 평원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패했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다가오는 저 멕 나이트들이 적이라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스윽-
걸어오며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네 대의 멕 나이트들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둘러놓은 부둣가의 장벽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밀고 들어와 갑자기 마나 진동 대검을 활성화시키더니 부두에서 짐을 옮기던 멕 워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쓰릉!
금빛으로 일렁이는 대검이 지나가자 두껍지 않은 멕 워커의 몸체가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다.
가슴 윗부분이 잘려 나간 몸체 안에서 헬멧을 착용하고 있던 멕 워커 파일럿은, 갑자기 환해진 빛에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다 멕 조종이 안 되는 것을 알고 헬멧을 벗고는 뻥 뚫린 천장과 자신을 공격한 멕 나이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노 공화국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적이다!”
“적의 멕 나이트다!”
그러나 본격적인 재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바이크, 멕 워커 다 잡아!]
[예스, 커맨더!]
스피디가 양 떼 목장에 뛰어든 늑대처럼 멕 워커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시에나에게 당한 일을 분풀이하듯 처음부터 마나 진동 삼지창을 붕붕 휘둘러 창날로 멕 워커의 팔다리를 쓱쓱 잘라 버렸다.
[모리츠 경, 파비안 경은 창고와 정비창을 맡으세요!]
[알았습니다!]
[그러지요!]
후웅-
레오파드 모델 중에서 가장 무거운 001, 002가 부둣가에 있는 창고와 정비창을 몸으로 밀고 들어갔다.
멕 나이트의 돌진을 버틸 수 있는 건물은 없었다.
001, 002는 보급품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를 무너뜨리고 정비소에서 수리 중인 멕들을 마나 진동 대검으로 조각냈다.
마리노 공화국 병사들이 멕 나이트에 밟히지 않기 위해, 무너지는 건물에 깔리지 않기 위해 개미 떼처럼 달아났다.
땡땡땡땡땡-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호루루루루-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끄웅-
마리노 공화국 원정군 사령부에 대기하고 있던 멕 나이트 다섯 대가 묵직한 엔진음을 토하며 출동했다.
호리아 평원에서 승리하기 위해 멕 나이트를 모두 보냈기 때문에 여기 남아 있는 것은 다섯 대가 전부였다.
아라드 레인저 덕분에 루산은 그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충분히 해 볼 만했다.
[바이크, 멕 나이트가 떴다!]
정신없이 멕 워커를 때려잡던 바이크가 루산의 경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확인했습니다!]
[떨지 말고 계획대로 해!]
[예스, 커맨더!]
바이크가 여전히 멕 워커를 추격하면서 대답했다. 멕 워커 사냥에 정신이 팔린 척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작고 왜소한 멕 나이트가 아군 멕 워커를 사냥하는 모습에 분노한 마리노 측 멕 나이트 두 대가 그쪽으로 달려갔다.
쿵쿵쿵쿵!
나머지 세 대는 요란하게 창고와 정비창을 부수며 짓밟고 있는 001, 002로 향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세 대 중 한 대가 측면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003을 힐끗 쳐다봤으나 창고를 부수고 있는 001, 002를 먼저 제압하는 게 맞다고 보고 그대로 달렸다.
[모리츠 경, 파비안 경, 그쪽으로 세 대 달려갑니다!]
[확인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두 베테랑 파일럿들 역시 적의 접근을 모른 체하고 부둣가 창고를 계속해서 짓밟았다.
사령부를 지키던 마리나 공화국의 멕 나이트는 아우로라 대륙에서 많이 사용하는 <헤비 스틸>.
이름에서 느껴지듯 묵직함과 단단함이 특징이었다.
평지가 많은 아우로라 대륙의 특성상 회전이 많이 벌어지기 때문에 몸체와 장갑을 점점 두껍게 만들게 된 것이다.
아이언 워리어를 기준으로 무게는 1.4, 엔진 출력은 0.8에서 1.4까지 다양한 편이었다.
아우로라 대륙 곳곳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성능에 다소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헤비 스틸 세 대는, 오른쪽 한 대가 루산이 탑승한 003을 눈으로 견제하는 가운데, ‘쿵쿵’보다 ‘쾅쾅’에 더 가까운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001, 002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
루산이 마나 통신기로 외치자 001, 002가 창고를 짓밟다 말고 헤비 스틸들을 향해 달렸다.
- 흥!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헤비 스틸 파일럿.
헤비 스틸 세 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패를 들어 올린 채 돌진했다.
달리는 중에도 대열을 맞추는 것을 보니 훈련이 잘 돼 있었다.
001, 002도 방패를 가까이 붙이고 보조를 맞춰 마주 달렸다.
양쪽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003을 의식하던 헤비 스틸 역시 정면에 집중했다.
그것을 확인하자 003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달려가는 와중에 마나 진동 기능을 활성화시켜 아트라스 대검이 금빛으로 일렁였다.
003은 측면에서 출발하여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옆에서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오른쪽 헤비 스틸이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거의 눈앞이었다.
처음 보는 빠른 기체가 마리노 공화국군의 후방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빠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헤비 스틸 파일럿은 당황했다.
[이런!]
워낙 기체가 무거워 급격히 방향을 전환하기 어려웠다. 잘못하면 균형을 잃고 쓰러지거나 관절에 과부하가 걸려 다리가 꺾일 수도 있었다.
003은 측면에서, 001, 002는 정면에서 거의 동시에 헤비 스틸과 만났다.
쉬익-
003이 아트라스 대검을 휘두르자 오른쪽 헤비 스틸 파일럿이 방패를 오른쪽으로 들어 막았다.
금빛 대검이 방패를 거의 잘랐지만, 방패가 워낙 두꺼워 몸체까지 파고드는 것을 저지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방패를 옆으로 돌린 헤비 스틸의 가슴에 001의 대검이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끼이이-
쇳소리와 함께 조종석을 그대로 찌른 001은 헤비 스틸과 부딪친 충격으로 뒤로 튕겨졌지만, 헤비 스틸 파일럿의 처지와 비교할 바 아니었다.
팍!
단말마의 신음도 뱉을 틈이 없이 거대한 대검이 몸을 가르고 지나간 헤비 스틸 파일럿은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작음 소음과 함께 그대로 절명했다.
쾅!
003과 001이 협동하여 적의 멕 한 대를 순식간에 처치하는 동안 002는 방패로 상체를 가리고 홀로 헤비 스틸 두 대의 돌진을 받아내 멀리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바닥을 긁으며 미끄러지면서도 파비안은 감탄했다.
[멋진 연계야!]
츠르르르륵!
불꽃을 일으키며 미끄러졌지만, 그는 베테랑답게 얼른 일어나 방어 자세를 갖추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동료를 잃은 헤비 스틸.
3 대 3에서 2 대 3이 되었다.
헤비 스틸은 단단했지만, 엔진 출력은 레오파드가 더 위였다.
두 명의 베테랑 파일럿들이 헤비 스틸의 묵직한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루산은 아트라스 대검의 길이를 충분히 이용한 강력한 베기 공격으로 헤비 스틸의 두툼한 다리를 잘라 적 멕을 무력화시켰다.
그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바이크가 적을 유인해 달려왔다.
[도와줘요!]
빠른 발을 이용해 아슬아슬 공격을 피해 상대를 약 오르게 만들어 끌고 온 것이다.
바이크는 처음에는 여유가 있었으나 점점 힘이 빠져 지금은 살기 위해 악착같이 다리를 놀리는 중이었다.
[허허! 기특하구먼!]
바이크 덕분에 5 대 3이 아닌 3 대 3 구도를 만들어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파비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죠!]
[그럽시다!]
003을 필두로 001, 002가 스피디 뒤를 쫓아오는 헤비 스틸들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갔다.
스피디가 얼른 그들을 스쳐 지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외부 확성기로 외쳤다.
- 다 작전이었다, 이 멍청이들아!
힘센 형들을 불러온 동네 꼬마 같았다.
헤비 스틸 파일럿들은 저 날쌔고 얄미운 멕의 파일럿을 잡아 죽이고 싶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쓰릉!
텅!
쓰릉!
세 대의 레오파드에 의해 어느새 팔다리가 잘려 나간 것이다.
원정군 사령부에 있는 마리노 공화국 멕 나이트를 모두 처치한 레오파드들은 다시 멕 워커를 부수기 시작했다.
헤비 스틸이 나타난 순간 멕 워커 파일럿들이 밖으로 나와 달아났기 때문에 그야말로 가만히 서 있는 멕들을 상대로 무기 훈련을 하는 셈이었다.
멕 워커를 부순 뒤에는 다시 창고와 정비창을 짓밟고 다녔다.
[전대장님, 마나 연료봉 몇 개 챙길까요?]
[좋을 대로 해.]
아라드 레인저들이 짊어지고 와 대기하기로 했지만, 여유가 있으니 몇 개 가져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스피디가 그물망 주머니에 마나 연료봉을 넣고 배낭처럼 등에 짊어졌다.
그러는 사이, 루산은 마지막 작업을 결행하기로 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수송선의 선원들이 설마, 설마 하다가 배로 다가오는 멕 나이트를 보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진에 시동을 걸어라!”
“이미 늦었습니다!”
003은 상륙용 다리로 배에 올라 금빛이 일렁이는 아트라스 대검으로 배를 쩍쩍 베기 시작했다.
수병들이 바다로 몸을 던졌다.
[허허! 20년 넘게 멕 나이트를 탔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군!]
[우리도 무용담에 남길 만한 일을 해 보자고!]
모리츠와 파비안도 커다란 수송선에 올라 배를 잘랐다.
두꺼운 멕 나이트 철갑도 자르는 마나 진동 대검이라 수송선의 철판 정도는 종잇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오파드로 이루어진 산악 특임 기동 전단은 마리노 공화국 원정군 사령부가 있는 항구의 보급창과 정비창, 보급품을 나를 수 있는 멕 워커,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선까지 모두 파괴하고 유유히 돌아갔다.
전리품은 헤비 스틸이 사용하던 두꺼운 방패, 대검, 그리고 스피디가 등에 짊어진 마나 연료봉 몇십 개뿐이었지만, 레오파드의 존재를 세상에 강렬하게 각인시켰기 때문에 남는 장사였다.
[전대장님, 이제 우리도 호리아 평원으로 가나요?]
바이크가 물었다.
[아니.]
[그럼요?]
[할 만큼 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루산은 변경 8구역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도 뭔가 끝은 봐야 하지 않겠어요?]
[이 정도 했으면 사실상 끝난 거지. 보급 없이 싸울 수 있는 군대는 없으니까.]
[그러니까요. 우리 공이 이렇게나 큰데 마무리하고 돌아가면 상도 받고··· 그러지 않겠어요?]
바이크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루산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제국군이 아니잖아. 우리 존재는 드러나지 않을 거야. 상은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네?]
모리츠, 파비안이 미소를 지었다.
루산은 길을 안내하는 아라드 레인저 대원들에게 두 통의 편지를 작성해 보고할 것을 부탁했다.
<임무, 완수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어 먼저 복귀하려 합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것은 아이젠 자작에게 보내는 편지.
<장군님, 레오파드는 아라드 왕국을 수호해 줄 것입니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개발해 온 기체인데, 우방인 아라드 왕국의 고초를 못 본 체 할 수 없어 알려드립니다.>
이것은 니트라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아이젠 자작에게는 굳이 레오파드의 필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 가치를 알아봤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라드 왕국 수도로 돌아간 루산 일행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찰병들과 함께 변경으로 이동했다.
먼 옛날의 성처럼 두껍고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변경 개척촌을 지나자 야생 탐탐들이 깜짝 놀라 달아나다 이내 멈춰 서서 가슴을 두드리며 루산 일행을 배웅해 주었다.
탐탐-
탐탐-
한편 루산의 편지를 받은 아이젠 자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직, 답변을 듣지 못했는데?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인가? 흐음······.’
아쉬움과 궁금증이 남았지만, 언제까지 그 생각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성급히 공격하지 말고 단단하게 방어하며 놈들을 많이 움직이게 만들어라! 연료가 없어 곧 가동을 멈출 것이다!]
***
딸랑딸랑~
살롱의 문이 열리고 젊은 여인이 화사한 빛을 뿜어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 어머! 이게 누구야? 줄리아 아니야?”
마담이 습관처럼 밝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환영의 인사를 건네다 깜짝 놀랐다.
“잘 지내셨어요, 클로제 부인?”
“나야 항상 잘 지내지. 자기는? 프라토로 유학 간 거 아니었어?”
“중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죠. 3년 유학 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결혼할까 생각도 하다가···, 뭐 그랬어요.”
결혼이라는 말에 궁금증이 일었지만,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여서 마담은 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다 귀에 들어오게 돼 있었다.
“프라토 3년 유학이면 많이 아깝네. 4년은 하지 않아? 다시 돌아갈 거야?”
“그럴까 생각도 했는데, 나이도 차고 언제까지 집안에 손을 벌리고 살 수도 없어서 고민이 많아요. 근처에 작은 화실을 마련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볼까 싶기도 하고······.”
마담은 줄리아가 온 이유를 금방 알아챘다.
유학을 마치고 자기 이름으로 그림을 그릴 생각이니 살롱에 자기 그림을 걸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줄리아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혼돈과 좌절, 열망과 욕망의 강렬한 에너지는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으므로.
인물화 또한 동년배들 중에는 월등하다는 평을 듣고는 했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다소 늦었지만, 집중력이 뛰어나 실력이 금방 늘었다.
다만 현실은 알려 줘야 했다.
“여자 화가는 귀하지만, 여자 화가가 그린 그림이 팔리는 경우는 그보다 더 희귀한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미스 아이젠의 실력이야 의심하지 않지만······.”
“알아요. 그래도 세상 탓만 하며 손 놓고 살 수는 없잖아요. 걸어 주시기만 한다면야 나머지는 제 노력과 운에 맡겨야죠.”
줄리아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이었다.
알아서 무언가를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게 만들었다.
“아! 그건 어떨까?”
“어떤······?”
“몇 년 전부터 무명 화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곳이 있거든. 작업 활동을 하게 해 주고, 그림을 걸어 주고, 귀족 자제들이나 사모님들에게 그림 수업을 할 기회를 줘서 인지도도 높여 주지. 코부르크, 호프, 키싱이 거기서 떴잖아. 이제 우리 살롱에 그림 안 걸어. 거기에 걸어 두면 더 잘 팔리니까. 가격도 많이 올랐지, 아마?”
마담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살롱에도 걸고 거기서도 일하면 더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최근에 화가들 많이 쓰더라. 새로 뭘 개장한다던데?”
당연히 줄리아도 관심이 생겼다.
“거기가 어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