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
경마 신문 같은 오락성 강한 일부 신문을 제외하고, 적어도 신문을 구독해 볼 정도의 사람들은 개척민 모집 광고에 응할 만한 형편에 있지 않았다.
신문 구독자 대다수는 개척민 모집 광고를 눈여겨보지 않거나 보았더라도 응모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극히 일부가 그 광고를 접하고 - 자신이 직접 신문을 샀든, 남이 버린 신문을 주웠든 -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문을 보여 주며 열심히 전파했다.
그로 인해 개척민 모집 사무소에는 노바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무려 2만 건 이상의 편지가 도착했다.
500골드의 상금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바덴은,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신문이라는 매체의 위력을, 이번 일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획 팀 직원들에게 주문했다.
“직접 구독하지 않는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가 이토록 전파력이 강하다면 직접 구독하는 계층이 관심을 가질 만한 광고는 얼마나 효과가 크겠어요? 앞으로 신문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연구해 보세요.”
반드시 변경 사업에만 신문을 활용할 필요는 없었다.
현재 별장 사업은 상류층 사람들의 입소문과 직접적인 소개로 회원을 늘리고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장점이 분명 존재하지만, 여전히 자작나무숲 장원의 존재를 모르는 상류층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휴양 사업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덴은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별장 사업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은 뒤에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휴양 사업을 해 볼 계획을 벌써부터 마련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평범한 동네 빵집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평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업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지 출신 때문이 아니었다.
필센 제국은 사회 개혁 이후 전체적인 소득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귀족, 사업가들 뿐 아니라 다수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휴양, 놀이 산업도 분명 먹히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제3 장원 부지 마련을 위한 부동산 전담 팀은 가칭 바덴 월드, 바덴 랜드를 위한 부지도 살피고 있었다.
어쨌든 앞으로의 신문 활용 계획과 별개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온 편지를 읽고 대상자를 선발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 사과 광고를 내야 할 형편이었다.
<우승 상금 500골드의 주인공을 찾는 변경 제8구역 개척민 모집에 응해 주신 분들께 감사와 더불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해진 기한까지 도착한 응모 편지가 2만 건을 넘어 선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선발을 마치는 대로 신문을 통해 결과를 말씀드릴 것이고 개별적으로 초청장을 발송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선발되지 못한 분들은 다음 기회에 다시 도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사과 말씀 드립니다.>
이러한 사과 광고는 사과라는 표현을 썼지만, 변경 제8구역의 공신력을 높이고, 개척민 선발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것을 알리는 효과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변경 개척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떨어내기 위함이었다.
바덴이 제2의 장원 별장 개장 준비와 더불어 개척민 모집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지원자를 선발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소개장을 들고 법원 앞에 있는 자작나무숲 장원 안내 사무소를 찾아왔다.
“사장님, 클로제 부인의 소개로 화가 한 분이 오셨어요.”
“아! 그래요? 담당이 누구더라? 빈센트죠? 빈센트에게 바로 가라고 알려 주세요.”
바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보던 문서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말했다.
예전 같으면 화가 한 명, 한 명 직접 섭외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네. 그렇기는 한데 직접 만나 보셔도······.”
“왜요?”
그제야 바덴이 고개를 들었다.
바쁜 것을 빤히 알면서 만남을 권유할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찾아오신 화가가 여성이고······.”
딱 봐도 평민의 차림새가 아닌 데다 주위 사람들이 다 쳐다볼 만큼 미인이라 왠지 대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여성 화가라는 것만으로도 바덴은 만나 볼 생각을 가졌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클로제 부인이 소개했을 정도면 실력이 없지 않다는 것이고 거기에 여성이라면··· 남자 화가들의 지도를 불편하게 여기는 부인들에게 딱 좋겠어.’
희귀성과 유용성만으로도 잠깐 만나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알겠어요. 만나 뵙기로 하죠.”
잠시 후 직원의 안내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자줏빛 원피스에 검은 모자를 쓴 화사한 젊은 여인은 붉고 탐스러운 장미처럼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덴은 살짝 놀랐지만, 예쁘고 우아한 상류층 부인들과 귀족 영애들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그리고 어디 가서도 자신이 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저 귀족가의 딸이 취미 수준을 조금 넘어 그림 좀 그릴 줄 아나 보다 생각했다.
“반갑습니다. 바덴 고슬라라고 합니다. 클로제 부인의 소개로 오셨다고요.”
바덴은 줄리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평소 워낙 많은 사람을 상대하기도 했고, 그때는 루산에 대한 충격으로 주저앉을 것 같아 얼른 그 자리를 떴기 때문에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줄리아가 그때와 달리, 착 달라붙는 모피 코트를 입고 남자에게 달려가 안기는, 야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을 풍기지도 않았다.
지금도 눈에 띄기는 했지만, 세련된 예술가라는 인상을 주는 정도였다.
원래 여자들이 꾸미면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아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으로 줄리아를 알아보기 어려웠고, 워낙 바쁘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때 일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반면 줄리아는 바덴을 보자마자 감정이 요동치며 무언가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그림 공부로 길러진 남다른 눈썰미로 바덴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생각과 그 일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는 기억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줄리아 역시 그 당시 7년 만에 마주친 루산에게 줄곧 눈길이 가 있어 그 자리에서 잠깐 봤던 여자가 바덴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줄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밝게 인사했다.
“네, 반갑습니다. 줄리아 아이젠이에요. 여성이라는 말씀은 들었는데, 큰 사업을 하시는 분이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분일 줄은 몰랐어요.”
“별말씀을요. 아름다운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호호호.”
비슷한 또래의 두 여인은 그렇게 서로를 칭찬하며 화기애애하게 첫 인사를 나누었다.
바덴은 자작나무숲 장원과 바람의 언덕 장원에서 화가들이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줄리아는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차분하고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바덴을 보며 줄리아는 상대가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길게 늘어뜨리거나 말을 하다 막히는 사람을 만나면 속이 터지고 답답할 텐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교육을 잘 받은, 무척 이지적인 여인인 것이다.
“빈센트 씨 아시나요?”
“네, 알아요. 유학 가기 전 같이 작업하기도 했어요.”
“그렇다니 잘 됐네요. 현재 우리 회사에서 미술 분야를 책임지고 있으시거든요. 더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그분께 물어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인사를 나누고 줄리아는 자작나무숲 안내 사무소를 나왔다.
처음 대면할 때에는 뭔가 불쾌한 느낌이 살짝 들었으나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기분이 개운해졌다.
여전히 뭔지 모를 불편함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지만, 독립하여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기로 결심해서 느껴지는 불안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줄리아는 바람의 언덕 장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가르치는 화가로 취직했다.
***
아라드 왕국에서 원시의 땅을 지나 변경 8구역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빨랐다.
가는 길에 지도를 만들어 두었고, 대형 괴수라는 것이 잠깐 사이에 금방 다시 채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원시의 땅에 대해 전혀 몰라 짐이나 다름없는,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합쳐 100대가 넘는 기동 전단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간간이 만나는 괴수를 처치하고 생명 구슬을 모으며 홀가분하게 이동했다.
“전대장님, 저거 우리가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아이젠 자작이 원시의 땅에 두고 간 멕 나이트 옆에서 야영을 할 때 바이크가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시의 땅을 통과하다 괴수들의 습격을 받아 손상된 아이언 워리어 일곱 대.
그 사이에 이 땅에 사는 작은 짐승과 벌레들의 보금자리로 변해 버렸지만, 대파된 게 아니어서 부품만 바꾸고 수리하면 탈 수 있었다.
루산도 먼저 말을 안 했을 뿐 사실 같은 마음이었다.
그때 파비안이 껄껄대며 말했다.
“역시 우리 바이크 군은 통이 커.”
“세상에! 제국군 멕 나이트 일곱 대를 꿀꺽하겠다니, 헤비 스틸 두 대를 가지고 놀 만한 대단한 담력이야.”
모리츠가 웃으며 파비안의 말을 받았다.
자신을 놀리는 것을 알고 바이크가 항의했다.
“왜, 왜요? 어차피 원시의 땅 깊숙이 버리고 간 거잖아요.”
“멕 나이트가 한두 푼도 아닌데, 전쟁이 끝나고 당연히 회수해 가겠지. 회수하러 왔는데 없어 봐. 누가 가져갔다고 생각하겠어?”
“그, 그야······.”
이 무거운 것을 괴수들이 가져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군 출신인 모리츠와 파비안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군용 멕이라 함부로 버리지도 않을 것이며 함부로 가져가면 큰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루산은 그들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을 마무리 짓고 이것들을 회수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더 걸릴 것이다.
그 기간이면 다른 괴수들이 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들어와 이 땅이 어느 정도 다시 괴수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일곱 대를 회수해 돌아가려면 적어도 멕 나이트 28대는 동원해야 한다.
멕 나이트 80여 대를 투입하고도 일곱 대나 잃었는데, 일곱 대를 회수하기 위해 최소 28대를 투입했다가는 얼마나 더 잃게 될까?
원시의 땅과 괴수에 대해 잘 아는 변경 파일럿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게 바로 나지.’
지도를 가지고 있고, 원시의 땅과 괴수에 대해 잘 아는 자신이 협조를 안 해 주면 회수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모리츠와 파비안은 제국군의 요청에 당연히 응하리라 생각하겠지만, 루산은 공짜로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적절한 대가를 제시하지 않을 경우 응하지 않고 버티다 시간이 흐른 뒤 조용히 챙기면 누가 알겠는가?
물론 상대가 아이젠 자작이라는 것을 걸리기는 했지만, 사적 관계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최소한 8군단으로부터라도 대가를 받을 생각이었다.
‘아라드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웠는데, 상은 안 받더라도 의무 없는 일을 할 필요는 없지. 바이크, 앞으로 그런 말은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해라.’
나중에 바이크에게 따로 가르칠 생각이었다.
루산은 명예와 충성심을 중시하는 모리츠와 파비안을 좋아했지만, 그들과 모든 것을 공유할 생각은 없었다.
루산 일행은 아라드 왕국으로 갈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복귀했다.
서쪽 골짜기를 통해 반달 호수 지역으로 들어오는 레오파드들은 대형 괴수의 생명 구슬을 가득 채운 그물망 주머니를 짊어지고 있었다.
루산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아라드 전쟁에서 큰 기여를 했고, 레오파드 홍보도 충분히 했고, 대형 괴수 생명 구슬도 잔뜩 챙겼고, 어쩌면 아이언 워리어 7대를 쓱 챙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반달 호수 지역에 개척민 모집 광고로 선발한 사람들을 투입해 자신의 도시를 세워 나가면 된다.
당장은 돈이 많이 들겠지만, 향후 10여 년은 세금 징수권을 갖게 되는 어마어마한 이권.
세금 징수권을 변경 본부에 반납한 뒤에도 자신이 세운 도시에서 계속해서 수입을 올릴 방법도 몇 가지 구상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기분 좋게 가고 있는데, 앞에 전에 없었던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뭐지?]
루산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반달 호수 지역의 중간, 과거 루산이 이 지역에서 가장 좋은 땅으로 점찍어 둔 드넓은 평야 지대.
그곳에 건물들이 몇 채 세워져 있고, 멕 나이트와 멕 워커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 델타 기지의 멕 아니에요?]
바이크가 루산의 속마음도 모르고 반갑게 말했다.
[그런 것 같군.]
루산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서쪽에서 접근하는 레오파드들을 보고 멕 한 대가 다가왔다.
눈에 익은 켐니츠의 멕이었다.
[어? 루산! 임무 마치고 복귀하는 거야?]
[네. 켐니츠, 그런데 여기···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우리 영감이 갑자기 확장 명령을 내리지 뭐야. 반달 호수 지역 괴수 소탕이 상당히 이루어 진 것 같다며 새로운 전진 기지를 여기다 세우라고 하잖아. 한 달 정도 됐나?]
루산이 없는 동안 호른 영감이 델타 기지의 새로운 전진 기지를 펼친 것이다.
그것도 가장 좋은 땅, 루산이 점찍어 두었던 땅에.
‘하아! 이 능구렁이 영감, 내가 전진 기지 대장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수 친 거야?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레인보우 시티는 아직도 개발 여력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 지역에서 가장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다.
루산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상대할 호른 영감의 얼굴이 떠올라 기분이 확 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