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뿌리나 다름없어요
63. 뿌리나 다름없어요
“···반달 호수 지역에 개척 기지를 건설하기 전에 같이 답사할 때 레인보우 시티는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입구라서 누구나 지나다닐 수밖에 없다고 해서 영감이 직접 찍은 자리고, 중앙 지역은 가장 좋은 땅이라고 내가 찍은 곳이거든요. 호른 영감은 그걸 알고 있단 말이죠. 레인보우 시티 주변 지역 개척도 다 안 됐는데 중앙에 새로운 개척 기지를 건설한다? 그것도 내가 없는 틈에? 이건 너무 속셈이 빤한 것 아니냐고요.”
루산은 복귀하기 전에 본부 개척 기지로 가서 트리어를 만나 화나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트리어는 일단 루산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은 뒤 잠시 생각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게 공개적으로 따질 수 있는 사안이냐?”
“······.”
“호른 영감이 새로운 개척 기지를 건설했어. 네가 없는 사이에. 그게 뭐? 네가 그 자리로 들어가기로 둘 사이에 약속이 돼 있던 것도 아니고, 8군단 차원에서 계획이 잡혀 있던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전진 기지 대장이 새로운 개척 기지를 세우는 데 네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더 열이 받는다는 거예요. 속셈이 빤한데 따질 수가 없으니까.”
트리어가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예요?”
“공개적으로 따질 수 없는 사안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이야.”
“쯧.”
루산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트리어가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네 위치를 봐. 넌 약간 위험한 상태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넌 출신이 좋아.”
“좋기는 뭐가 좋아요. 집안이 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들어봐.”
루산은 투덜거림을 멈추고 트리어의 이야기를 들었다.
“집안이 망했다 해도 너만 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 8구역에 있어? 황족인 통치자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이지. 게다가 제국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고 말이야. 8구역뿐 아니라 변경 어디에도 제국 기사 아카데미 출신은 없을걸?”
그게 무슨 자랑이냐고 루산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마저 듣기로 했다.
“그런 잘나신 분이 이런 변경 땅으로 와서 버텨 낼까 싶었는데, 버텨 냈을 뿐 아니라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해서 최연소 전대장에 신사업부 부장에, 전진 기지 대장 권한까지 쥐게 된 거라고. 그런 권한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냐? 제국 변경 모든 구역에서 네가 유일할 거야.”
“흐음······.”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변경에서 밥 벌어 먹는 사람치고 너를 질투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나니까 말해 주는 거야.”
트리어의 말을 듣다 보니 루산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사람은 질투의 동물이거든. 어차피 통치자님, 단장님이야 이 땅에서 가장 높은 데 계시니까 신경 안 쓰시겠지만, 나머지 간부들은 너한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아. 아! 기동 전단장님도 빼고. 너 똘똘하다고 좋아하시더라. 어쨌든 다른 간부들은 대놓고 방해는 안 하더라도 먼저 나서서 돕는 일은 없을 거야. 호른 영감의 행동이 얄밉더라도 애초에 공개적으로 문제 삼기 어려운 일이고, 이런 분위기에서 문제를 삼아 봐야 너만 더 욕을 먹게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루산은 트리어의 말을 이해하고 화난 마음을 가라앉혔다.
트리어는 이래서 루산이 좋았다.
이해력이 좋고 조언이 통한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후임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풀 죽을 필요는 없어.”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넌 질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우상이기도 하거든. 변경 파일럿들 중에 너처럼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원래 잘 나가는 사람은 질투를 받게 마련이야. 신경 쓰지 말고 뚫고 나가. 젊은 파일럿들은 좋아할 테니까. 그리고 생각해 봐.”
“뭘 자꾸 생각하래요?”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루산이 장난으로 툴툴대며 받아쳤다.
트리어가 피식 웃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널 고용하고 급료를 주는 사람은 통치자님, 단장님이지 간부들이 아니거든.”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질투한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미움을 살 행동을 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겠지만, 잘나서 받는 질투는 근절할 수 없는 것이다.
맡은 사업을 성공해 낸다면 통치자, 단장의 신임을 받아 점점 더 높이 올라가게 된다.
‘역시 트리어한테 오기를 잘했어.’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은 루산은 트리어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레오파드는 성공할 거예요.”
그러면서 아라드 왕국 전쟁에 대해 살짝 알려 주었다.
“오! 잘하면 제2의 아이언 워리어가 되겠는데?”
“뚜껑은 열어 봐야 아는 거죠. 그래도 느낌이 좋아요.”
“전쟁터에서 증명했으면 게임 끝이지. 최소한 아라드 왕국에는 판매 확정이네.”
“그렇기는 한데, 가난한 나라라 과연 얼마나 구입할 수 있을지······.”
“나라가 가난하다고 자원이 없는 건 아니야. 막말로 아무것도 없다면 변경을 내주는 방법도 있지 않겠어?”
변경을 민간에 내주는 나라도 있었다.
민간 업체가 변경의 위험을 떠안는 대신 괴수 부산물을 독점하고 국가에 일정 비율을 세금처럼 바치는 것이다.
멕 나이트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들이 이 방식을 택하고는 했다.
아라드 왕국은 나라가 망할 뻔한 위기를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전력을 확충하려 할 것이다.
변경을 탐내는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한 것인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변경을 내줘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지극히 모순적이었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루산은 가난한 나라의 아이러니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리고 말했다.
“신화 공업사에 추가 투자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사장한테 아라드 전쟁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지만.”
“그야 당연하지.”
“몸체 부품 말고도 가프 마법 연구소에 레오파드 관련 부품 납품하는 업체 알아봐서 투자하면 노후가 따뜻할 겁니다.”
트리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그런데 돈이 있어야지. 지난번에 신화 공업사에 탈탈 털어 넣었잖아.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루산은 군단 멕이 아니라 자체 멕 우르사와 테스트 기체를 탔고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연료와 각종 소모품을 공짜로 제공받기 때문에 사냥하면 할수록 다른 파일럿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수입이 떨어졌다.
이번에 아라드 왕국에 다녀오는 길에 획득한 대형 괴수 생명 구슬만 해도, 모리츠와 파비안에게는 나눠 줄 필요가 없고 바이크의 분배 비율은 미미하기 때문에, 막대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트리어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에겐 괴수가 돈이니 닥치는 대로 사냥해서 투자하면 되죠.”
“그건 그래. 여하튼 내가 알아볼게.”
루산은 트리어와 헤어져 레인보우 시티로 향했다.
003을 타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공개적으로 따질 만한 일이 아니야. 어차피 주인 없는 변경 땅, 내가 먼저 찜하지 않았냐고 따져 봐야 내 꼴만 우스워질 뿐이지. 그리고 이미 개척 시작했는데 어쩌겠어?’
그 땅을 놓고 다퉈 봐야 오히려 평판만 나빠질 뿐이다.
일을 잘해서 잘나간다는 말을 들어야지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여기저기 갈등을 일으키고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
‘호른 영감하고 척을 질 필요도 없고.’
이번 건만 놓고 봐도 실행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이런 능구렁이 영감하고 굳이 다툴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당하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루산은 레인보우 시티에 도착하자마자 테스트 파일럿들과 바이크에게 며칠 휴가를 주고, 곧바로 탐탐을 타고 본부로 달려가 복귀 보고를 하고 돌아왔다.
이동하는 시간 내내 호른 영감을 어떻게 상대할지, 차분하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바덴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지원 팀에 생명 구슬 처분을 요청하고, 레인보우 시티에 들어와 있는 가프 마법 연구소 레오파드 팀에 그동안 느낀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알려 주었다.
휴일에 신전에 가서 예배도 드렸다.
그런 뒤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을 깨끗하게 다듬고 옷장에서 그나마 가장 말끔한 옷을 챙겨 입고 델타 기지 대장 호른 영감을 만나러 갔다.
***
“오랜만입니다, 전대장님. 어디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일은 무사히 마치셨나요?”
호른 영감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루산도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대장님의 염려 덕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제국군이 원시의 땅을 지나 아라드 왕국을 구원하러 간 것은 비밀이었지만, 루산은 호른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합쳐 100대가 넘는 대규모 부대가 레인보우 시티를 지나 이동했는데, 변경 30년이 넘은 능구렁이 영감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무슨 일로 갔는지 묻지 않는 것이다.
“허허, 다행입니다.”
호른이 손수 시원한 차를 타서 대접했다.
루산은 입술을 살짝 적신 후 찻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신사업부 사업의 일환으로 개척민을 공개 모집하고 그 개척민들로 개척 기지를 꾸려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혹시 아십니까?”
호른이 루산의 말을 경청하다가 대답했다.
“음, 언뜻 들은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말씀 나누기가 편하겠군요.”
“어떤······?”
“제가 델타 기지에서 변경 생활을 시작해 벌써 7년 차가 됐습니다.”
“벌써 그렇게나 됐습니까?”
“네.”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델타 기지는 저에게 제2의 고향이면서 뿌리와 같은 곳이죠.”
이번에는 호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은 처음부터 델타 기지에서 변경 생활을 시작했고, 제3 전대장이 된 뒤에도 집은 델타 기지 관할의 레인보우 시티에 있었다.
“그런데 멕 나이트 타고 괴수 잡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저에게 개척 기지 건설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기시더라고요. 레인보우 시티를 잠깐 맡기는 했지만, 제가 뭘 알겠습니까? 다 델타 기지의 개척 요원들과 전투 요원들이 한 것이죠.”
“그렇게 겸손하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 쓰는 게 곧 능력이지요. 허허허!”
호른의 말에도 루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없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 뿌리와 다름없는 이곳 델타 기지에 부탁을 좀 하려고요.”
호른 영감이 살짝 긴장했다.
“무슨······?”
“바우엔, 아트민을 제가 썼으면 합니다. 대장님은 우리 8구역 요원들을 모두 잘 아시겠지만, 저는 아는 사람이 델타 기지 사람들뿐이라서요.”
“허허!”
호른은 그저 웃었다.
개척 건설 담당 바우엔, 개척 행정 담당 아트민은 제법 능력이 있는 요원들이었다.
반달 호수 지역 중앙을 새로 개척하고 있는 마당에 이 둘을 빼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오슬로 영감하고 개척병 일부도 제게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루산은 최대한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상당히 무리한 부탁이었다.
개척병은 현재 레인보우 시티의 개척지 안전을 책임지는 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있어서 멕 나이트와 정찰병을 새로운 개척 기지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허허!”
호른 영감은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으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루산은 개의치 않고 여유롭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는 길에 보니까 중앙에 새로운 개척 기지를 건설하고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전대장님을 비롯한 전투 요원들 덕분에 이 지역 괴수가 많이 줄어서요. 비옥한 땅을 서둘러 이용해야 소득이 더 늘고 결국 변경 발전에 이바지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일껏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 개척을 해 놨는데, 들어올 사람이 없으면 어쩌시려고요?”
“······?”
“아라드 전쟁은 거의 끝났습니다.”
“······!”
이렇게나 빨리 전쟁이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호른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피란민 유입은 이제 없다는 뜻이죠.”
“흐음!”
“자연적 증가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는 것을 대장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호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무적인 일은, 신사업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개척민 모집 광고에 무려 2만 3천 명이 지원을 했다는 겁니다. 첫 번째 모집인데 말이에요. 가족 단위까지 생각하면 몇 배는 되는 인원이겠죠?”
“아!”
호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꾸미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루산은 호른이 충분히 놀라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개척지 관광 코스도 신사업부에서 짭니다. 당연히 제 뿌리인 델타 기지에 조금이라도 더 투자 유치가 될 수 있게 관광 코스를 짤 것이고 이왕이면 델타 기지에 개척민이 들어가도록 배정할 생각입니다.”
호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개척 기지 건설은 해 오던 분께 맡겨야 하는 건데, 아시다시피 괴수 사냥으로 이미 8구역 최고 수입을 올리고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 괜히 이 일을 맡겨서 머리가 아프네요. 높으신 분들 결정이니 어떻게 물릴 수도 없고······. 그래도 결국 8구역이 발전해야 우리 모두 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 그럼요! 최대한 도와야죠. 허허허!”
호른은 바우엔, 아트민, 오슬로 영감과 개척병을 기꺼이 넘겨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루산 또한 이 자리에서 당장 확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호른에게는 루산이 말한 내용이 진실인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되겠지.’
원래 늘 보던 사람은 그리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법.
루산은 능구렁이 호른이 자신이 한 이야기의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변경 8구역에서 루산 보름스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사냥 수입.
신사업부의 놀라운 결과물들.
가프 마법 연구소의 신형 멕 나이트 테스트 기체들로 이루어진 기동 전대 구성.
단기간에 이 정도 이익을 변경 8구역에 가져다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겠지.’
루산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델타 기지가 제2의 고향이라는 말, 뿌리나 다름없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