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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64화 (64/450)

64. 이 정도면 가족이지

64. 이 정도면 가족이지

저녁 식사를 마친 루산은 거실에서 그동안 쌓인 신문들을 쓱 훑어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오는 클라크의 발소리를 듣고 무심코 고개를 돌려 소년 집사를 쳐다보았다.

‘엄청 컸잖아!’

그것은 참 기이한 느낌이었다.

벌써 함께 산 지 6년.

클라크가 계속 크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아라드 왕국에 다녀오느라 보지 못한 공백으로 인해 클라크의 변화가 새삼 도드라져 보인 것이다.

“이리 와 봐.”

“네, 기사님.”

클라크가 다가오자 루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고 그대로 수평 이동해 자신의 몸에 댔다.

어깨 높이까지 왔다.

“와! 금방 추월하겠는데?”

“헤헤, 그런가요?”

클라크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없어도 체력 훈련 계속하고 있지?”

“네, 기사님.”

“공부는?”

“작년에 노바에서 사 온 책들은 세 번째 읽고 있어요.”

“그래? 다음에 갈 때 상급 과정으로 더 사 오자. 신문 연구는?”

“꾸준히 하고 있는데요. 신문마다 확실히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특징?”

“필센 데일리는 쉬운 말로 쓰고, 노바 신문은 어려운 말을 많이 써요. 파르나 타임즈는 자잘한 소식들도 많이 싣고, 경마 신문은··· 잘 모르겠어요.”

전에 신문을 잔뜩 구해 오면서 경마 신문은 2년 뒤부터 연구해도 된다고 말했는데, 이미 연구를 하고 있는 눈치였다.

경주마에 대한 정보, 경마 분석 외에는 자극적인 가십 기사들과 야한 광고 그리고 블랑카의 연재소설이 실려 있는 신문이라 경마 신문을 언급할 때 클라크의 볼이 살짝 붉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못 본 체했다.

‘녀석, 다 컸네.’

나머지 신문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루산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확실한 것은, 클라크가 육체가 자라는 만큼 마음도 왕성하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루산은 클라크의 성장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급해졌다.

클라크가 자란다는 것은 자신이 점점 나이 든다는 뜻.

할 일은 많고 이루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에 조급증이 든 것이다.

가문의 재건과 복수가 아니더라도 클라크에게 부끄럽지 않고 클라크가 언제나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도 더 크게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칼리슈가 신형 기체 세 대를 이끌고 레인보우 시티로 들어왔다.

그는 루산을 보고 환한 표정으로 다가와 나직하게 속삭였다.

“전대장님, 활약은 들었습니다!”

모리츠와 파비안의 보고를 들은 것이다.

루산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통한다고 했잖아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원정군이 돌아오면 제국군에서 아마 접촉이 올 겁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아라드 왕국에서도 연락이 오겠죠.”

“이게 다 전대장님 덕분입니다. 스승님께서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하하하, 감사하단 말씀 꼭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심혈을 기울여 좋은 멕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두 사람은 서로를 기분 좋게 띄워 주다 본론으로 들어갔다.

칼리슈가 먼저 말했다.

“이번에 세 대를 가져왔는데요. 한 대는 레오파드 계열, 두 대는 레오파드 스피디 계열입니다.”

이것은 편의적 분류인데, 레오파드 계열은 전선 판매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출력과 무게는 모델에 따라 다르지만 신장 7미터는 꼭 지켰다.

키가 작아지면 몸체의 비율상 팔과 다리도 짧아져 근접 전투에서 불리함을 안게 되므로 전선 판매용은 어떻게든 7미터의 키를 유지한 것이다.

반면 레오파드 스피디 계열은 애초에 전선보다 변경 판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기체로, 저렴한 가격을 충족시키려다 보니 일단 신장을 6미터로 줄이고 엔진 출력과 무게를 낮췄다.

키 6미터 이하의 경량 멕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레오파드 계열도 변경에서 쓸 수 있고 레오파드 스피디 계열도 전선에서 사용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에 편의적인 분류이지만, 변경에서 구입하는 멕의 가격대를 생각하면 실질적인 분류에 가까웠다.

새로 가져온 레오파드 계열 기체의 가슴과 어깨에는 004가 박혀 있었다.

루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건 겉으로 볼 때 001, 002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맞아요. 키와 무게는 001과 똑같습니다. 다만 엔진 출력을 낮췄죠.”

“가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점화기로 세르펜스 생명 구슬을 사용한 엔진은 제작 단가가 너무 높고 전에 전대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르펜스를 잡기 어려워지면 양산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양산형으로는 아이언 워리어와 동급 출력을 내는 엔진을 장착하기로 한 거죠.”

칼리슈의 설명에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올바른 선택이었다.

소수 한정판 기체를 생산할 것이 아니라면 가격 경쟁력과 양산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004는 아이언 워리어 대비 엔진 출력은 동급, 무게는 0.8 수준입니다. 그리고 현재 거의 완성된 005는 엔진 출력 동급, 무게는 003과 마찬가지로 아이언 워리어의 3분의 1 수준이죠.”

004는 001을, 005는 003을 다운그레이드한 모델이라는 얘기였다.

“이 스피디 계열 두 대는 기존의 스피디와 엔진 출력, 신장, 중량 면에서 동일하지만, 전에 말씀하신 대로 변경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살짝 변형을 가했습니다. 정교함을 제거하고 단순화하여 변경에서 막 써도 고장 나지 않도록 했죠. 예민한 파일럿이 탄다면 성능이 다소 떨어진다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주 좋은 방향입니다!”

루산은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 찬사를 보냈다.

수시로 정비를 받으러 들어가야 한다면 그만큼 활용도가 떨어지고 수입이 줄어들어 손해를 보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라면 모를까 변경에서 괴수를 상대할 때에는 고장 나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기체가 최고다.

사실 전장에서도 고장 없이 유지력이 높은 기체를 선호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이 부분은 스피디 계열뿐 아니라 레오파드 계열에도 적용이 되도록 계속 테스트해 나가야 할 내용이었다.

‘아이언 워리어의 장점이 바로 막 써도 되는 투박한 기체라는 점이지.’

다운그레이드 기체를 타게 되면 적응하는 데 다시 시간이 걸릴 테지만, 루산은 가프 마법 연구소의 제작 방향이 옳다고 보았다.

그때 칼리슈가 루산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나직이 말했다.

“생각보다 레오파드 판매가 훨씬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

루산이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아라드에서 마리노 공화국 패전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무슨 일이 있죠?”

“우리 마법 연구소에서 만드는 마나 연료, 윤활유, 각종 소모품 수출이 늘어났어요. 그래서 이 품목들의 가격이 급등하고 있죠.”

“······?”

“아우로라 대륙에서 이 품목들을 마구 사들이고 있다는 겁니다.”

“아!”

마나 연료와 윤활유는 공장, 마나 열차, 자동 마차에도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쟁 물품이었다.

“아라드 왕국 전쟁이 마리노 공화국의 패배로 끝나지 않고 확대될지 몰라요.”

칼리슈의 말에 루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의 땅이 존재하지 않는 아우로라 대륙은 먼 옛날에는 오카수스 대륙에 비할 수 없이 문명화된 땅이었다.

오카수스 대륙에 사는 사람들이 괴수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 겨우 연명하던 시절에 아우로라 대륙 사람들은 괴수 없는 땅에서 번영과 풍요를 누렸다.

그러다 마법의 발달로 괴수의 부산물이 자원이 된다는 것이 밝혀지고 멕 나이트가 개발되면서 오카수스 대륙의 위상이 급격히 올라갔다.

변경 자원을 직접 확보하려는 아우로라 대륙의 노력은 지난 수백 년 간 계속되어 양 대륙 사이에 전쟁이 빈번이 일어났다.

모두 아우로라 대륙의 군대가 오카수스 대륙에 상륙하여 점령하려는 방식이었다.

오카수스 대륙 사람들은 아우로라 군대를 막으면서 단결하고 점점 강해져 갔는데,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한 나라가 바로 필센 제국이었다.

오카수스 대륙을 대표하는 필센 제국과 아우로라 대륙의 연합군은 마침내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길고 처절한 전쟁 끝에 필센 제국이 아우로라 대륙 연합군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아우로라 대륙의 부르가스를 점령해 차지함으로써 이 대전쟁을 승리로 마감하게 되었다.

양 대륙 사이에 최초로 힘의 역전이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필센 제국뿐 아니라 오카수스 대륙의 모든 사람들은 이 대전쟁에서의 승리로 오랜 세월 침략을 받아온 설움을 떨칠 수 있었고, 가슴 설레는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와 정세에 밝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 승리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광활한 오카수스 대륙의 대부분은 원시의 땅이고 인간이 차지한 영역은 그저 바닷가에 인접한 일부분에 불과했다.

반면, 아우로라 대륙은 모두 인간의 땅이었다.

인구, 생산력, 그동안 쌓아올린 문화,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필센 제국에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강력한 하나의 국가이며 급격한 산업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 그리고 아우로라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한목소리를 내며 똘똘 뭉치는 일은 인간 세상의 특성상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필센 제국의 위정자들은 대전쟁을 피하기 위해 애써 왔다.

인접한 아라드 왕국을 구원하기 위해 굳이 번거롭게 멕 나이트의 표식을 지우고 원시의 땅을 통과해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승리했다고 우월감에 취해 있는 백성들과 달리 아우로라 대륙의 진정한 힘을 알고 있는 제국 상층부는 어떻게든 대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칼리슈가 그러한 대전쟁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음······.”

조국이 전화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심각한 전망 앞에서 루산 역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변경의 기사는 걱정과 함께 남다른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이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라드 전쟁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였고, 앞으로 확전 가능성이 높다면 레오파드 판매량이 어마어마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가용 자금을 다 끌어들여서 신화 공업사와 관련 부품 회사에 투자해야겠어.’

칼리슈와 헤어지자마자 트리어에게 가서 레오파드 부품 생산 업체 목록을 서둘러 입수해 투자할 업체를 선별하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장 양산 모델 먼저 집중적으로 테스트해야겠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일들과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마침내 썩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루산이 은밀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칼리슈 님,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양질의 괴수 부산물이 많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죠. 가격이 무척 많이 뛴 상태니까요.”

“아직 비밀인데······.”

루산이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너에게만 꺼낸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다.

“뭔데요? 뭔데 그러십니까?”

“사실은 제가 전진 기지 대장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개척 기지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죠.”

파일럿이 전진 기지 대장이 되는 경우는 없었기에 칼리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어디에 건설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방금 칼리슈 님 말씀을 듣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생각이 떠오르셨습니까?”

“호숫가에 짓는 거죠.”

호수에는 소형, 중형, 대형이라는 3단계 분류를 벗어난 거대 괴수들이 산다.

그리고 호숫가는 수많은 괴수들이 먹이 활동을 하고 보금자리로 삼는 지역이었다.

한마디로 무척 위험한 장소라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칼리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루산은 태연했다.

“아시다시피 사냥하고, 추출하고, 이동하는 과정에 낭비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호숫가에 짓는 개척 기지에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나 연료, 윤활유 생산 시설을 갖추는 겁니다. 수중 거대 괴수 한 마리는 육상 대형 괴수 수십 마리의 가치를 충분히 하고도 남죠. 허실 없이 순도 높은 양질의 연료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칼리슈는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 기사 양반의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든 거야?’

생각의 스케일이 달랐다.

“언젠가는 호수 괴수도 다 잡아서 없어질지 모르지만, 그러면 서쪽 원시의 땅으로 들어가 사냥하면 됩니다. 어쨌든 현재 코부스에 있는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보다 거리가 가깝지 않습니까? 거리가 가깝다는 건 비용과 허실이 줄고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뜻이죠.”

“흐음······.”

칼리슈가 진지하게 고민하다 말했다.

“하지만, 현재 코부스는 변경 8구역뿐 아니라 7구역의 부산물도 들어오기 때문에 이쪽으로 옮기는 건 좀······.”

루산이 검지를 들어 옆으로 흔들며 말했다.

“옮기는 게 아니죠. 증설하는 겁니다.”

“증설?”

“그렇죠. 증설이 필요한 시점 아닙니까? 게다가 이 반달 호수 지역은 앞으로 규모가 더 커질 겁니다. 이건 두고 보시면 알 텐데······.”

루산은 8구역의 개척민 확충 계획을 살짝 이야기해 주었다.

새로운 변경 개척 방식에 칼리슈가 감탄했다.

“사람이 늘면 8군단 병력도 늘어나게 될 테고, 병력이 늘면 괴수 부산물 생산량도 늘어나게 되죠. 아마 갈수록 설비를 증설해야 할 겁니다.”

칼리슈는 루산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구미가 당겼다.

무조건 이익이 아닌가!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요. 가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루산 또한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법 연구소의 생산 시설을 유치하는 것은 군단 본부와 상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렇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제품의 가격이 오르고, 증설이 필요한 시기에, 괴수 부산물 생산지와 가까우면 생산성도 높아진다.

가프 마법 연구소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반달 호수 지역과 8군단의 성장 가능성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만 봐도 8구역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신형 멕 나이트 테스트도 협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 설비 증설 정도는 훨씬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정도 협력 관계면 우리와 가프 마법 연구소는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싶네요.”

“그, 그렇죠.”

루산의 넉살에 칼리슈는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전쟁의 가능성을 들은 루산은 가프 마법 연구소의 생산 시설을 유치하여 자신이 건설할 개척 기지의 안전을 높이고 그 자본을 활용할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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