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변경이 힘든 이유는
68. 변경이 힘든 이유는
붐붐-
2전대의 붐붐 수레가 괴수 혈액과 체액을 담은 대형 용기들을 싣고 레이크 시티로 다가왔다.
가프 마법 연구소의 장벽 생산 시설은 아직 완공되려면 멀었지만, 루산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만든 채혈 장치, 저장소, 생산 설비 한 세트는 시험용으로 가동 중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납품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는 것이다.
[이동 거리, 수송에 동원되는 인력과 장비를 생각하면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을 유치한 일은 8구역 역사상 가장 큰 공로야! 큰 상을 줘야 해!]
2전대 부산물 수송 팀을 호위해 오던 트리어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건의 좀 해 줘요. 루산 보름스한테 더 큰 상을 주라고요.]
[내가 무슨 힘이 있냐? 나야 그저 급료 받는 일개 전대장에 불과한데.]
[누가 들으면 급료만 받는 줄 알겠네. 그동안 반달 호수 지역 괴수들을 2전대가 싹쓸이해 와서 성과 보상금 수입이 엄청나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긴데. 수입으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그 정도 건의는 할 수 있지 않아요? 앓는 소리는 재미없어요.]
[호숫가 거대 괴수하고 반달 호수 지역 안팎에서 대형 괴수 다 잡고 다니는 녀석한테 들을 말은 아니지. 파일럿들이 나 볼 때마다 하소연하더라. 루산 보름스처럼 많이 잡아 떼돈 좀 벌게 해 달라고 말이야. 작작 좀 잡아라.]
루산과 트리어는 만나면 늘 이렇게 티격태격했다.
그들이 우정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멕 워커들이 붐붐 수레에 실린 대형 용기를 들어 조심스럽게 저장소에 부었다.
가프 마법 연구소 직원이 양과 품질을 확인하고 기록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트리어가 멕 나이트를 탄 채로 장벽 건설 현장 북쪽으로 걸어갔다.
루산의 멕 나이트가 그 뒤를 따라갔다.
지금은 조금 한산하여 한 팀을 제외한 대부분의 멕 나이트들이 쉬고 있었다.
장벽 근처에는 멕 나이트 세 대가 막 사냥을 끝낸 대형 괴수 주위에 모여 있었다.
곧이어 지원 팀의 멕 워커들이 채혈 장치를 잡고, 원통에 말려 있던 굵은 호스를 쭉 당겨, 쓰러져 있는 괴수의 몸통에 푹푹 꽂았다.
우웅-
잠시 후 채혈 장치가 가동되고 괴수의 몸에서 혈액과 체액을 쭉쭉 뽑아 커다란 통에 저장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트리어가 다시 한번 탄성을 토했다.
[크흐! 진짜 이건 상 줘야 돼.]
[그러니까 건의 좀 하라니까요.]
루산이 다시 진담처럼 농담을 했다.
[크크, 지금 단장님 머리 빠개지실걸? 이놈을 계속 데리고 있으려면 대체 뭘 줘야 할까, 하고 말이야.]
[설마요? 이미 레이크 시티 관련해서 직책 발표도 끝났잖아요.]
며칠 전, 레이크 시티 건설을 맡게 된 루산의 정식 직함이 결정되었다.
<레이크 시티 개척단장>
루산에게 전진 기지 대장의 권한을 부여하게 되었지만, 전진 기지는 아니고 본부 개척단처럼 임시적 성격을 부각시키려는 명칭이었다.
‘본부 높은 사람들의 고심이 묻어난 직함이군.’
루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변경 개발은 전진 기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이 네 개의 전진 기지가 군단 본부의 뒷받침을 받아 개척해 온 것이다.
그러던 것이 아라드 왕국 전쟁으로 발생한 피란민을 수용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급하게 본부 개척단이 발족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직이라 피란민 유입이 멈추면 새로운 개척촌 건설은 다시 전진 기지들이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루산이 아라드 왕국을 지원하려는 제국군의 길 안내를 맡는 대가로 개척민 공개 모집과 개척 도시 건설 권한을 받아냈고, 거기에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 유치에 성공했다.
루산에게 전진 기지 대장직을 맡기면 수십 년 동안 구축되어 온 체계가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레이크 시티에 한해 임시로 권한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루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레이크 시티에서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필요하면 레이크 시티를 더욱 확장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이크 시티 개척단장을 맡았다고 하여 다른 지역 개척단장을 맡지 못한다는 법은 없었다.
전진 기지 대장들이나 본부의 간부들이 고깝게 보든 말든 8구역에 이익이 된다면 통치자와 단장은 언제든 그쪽 방향을 택하리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루산은 혼자서,
<제3 기동 전대장>
<신사업부 부장>
<레이크 시티 개척단장>
세 개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변경 8구역이 생긴 뒤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능구렁이 호른 영감도 루산의 요청을 모두 수용했다.
개척 건설 담당 바우엔, 개척 행정 담당 아트민을 레이크 시티로 보내 주었고, 오슬로 영감과 개척병 200명 그리고 그 가족들을 레이크 시티로 이전시켜 주었다.
개척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금 수입원이기 때문에 개척병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보내 줬다는 것은 그 나름의 성의를 크게 보인 것이었다.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냐?]
[네?]
[네가 해낸 일에 대한 보상으로 레이크 시티 개척단장 직함이 충분하겠냐고? 전진 기지 징세권은 길어 봐야 10년 안팎인데,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 유치하고 멕 나이트 원가 분할 납부로 구입하게 만든 공로로 충분하겠어?]
[글쎄요.]
[글쎄요는 무슨 글쎄요야? 이 일로 8구역이 얻은 이익이 대체 얼마나 될까? 계산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니 단장님이 머리가 아플 수밖에.]
루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게 순전히 내 공로는 아니죠.]
[응?]
[어디까지나 8군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가프 마법 연구소 비밀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고, 가프 마법 연구소 신형 멕 나이트 테스트나 생산 시설 유치도 8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나 한 사람을 보고 해 줬겠어요? 난 그저 아이디어를 낸 것뿐이죠.]
[하하, 그러니까 높으신 분들이 너를 예뻐하는 거야.]
[듣기 좋은 얘기네요.]
[진짜라니까! 어쨌든 네 말도 맞지만, 그 아이디어를 아무나 낼 수 있는 건 아니거든.]
트리어는 괴수의 몸에서 혈액과 체액을 빨아들여 커다란 저장소로 곧장 옮기는 설비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말을 이어나갔다.
[여하튼 잘 해라, 3전대장 겸 신사업부 부장 겸 레이크 시티 개척단장님아. 통치자님이나 단장님께서 나중에라도 뭘 주시겠다고 하면 사양하지 말고 다 받아도 돼. 넌 그 정도 일을 했으니까.]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너무 띄워 주시네.]
[부러워서 그런다, 이 자식아! 너무 잘나서!]
트리어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축하를 하고 2전대 수송 팀을 호위해 돌아갔다.
루산은 그런 트리어가 고마워서 소리쳤다.
[그렇게 부러우면 2전대 파일럿 절반하고 새로 온 3전대 신입들하고 바꿉시다!]
[크크크, 너 같으면 바꾸겠냐? 간다! 잘해 봐!]
루산은 미소를 지으며 멀어지는 트리어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가 탄 멕 나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미소 또한 지워졌다.
파일럿을 바꾸자는 제안은 들어 줄 리 없기에 당연히 농담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었다.
신은 공평하시어 복과 함께 시련도 던져 주셨다.
[하아!]
루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
도시는 누군가의 아이디어 하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금과 자원, 기술자, 감독관, 인력. 이 모든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
게다가 레이크 시티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개척민 모집 광고로 건설하는 첫 번째 개척 기지>
장차 변경 8구역의 번영을 위해 신사업부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사업이며 젊은 통치자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개척민 모집.
1년 동안 최고의 수입을 거둔 1위에게 500골드라는 거금을 상금으로 준다는 경쟁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려면 신문에 연재를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바덴이 이미 전국 발행 신문인 필센 데일리와 협약을 체결했다.
한 달에 네 번, 변경 섹션을 할애해 주기로 약속을 받은 것이다.
상금 500골드를 건 개척 경쟁 소식을 기사로 만들기 위해 처음에 변경 수기 공모전 수상자 가운데 2명을 뽑기로 한 취재 기자를 4명으로 늘려 선발했다.
각 참가자의 사연과 경쟁 진행 과정을 좀 더 밀도 있게 취재하고 흥미진진하게 구성하기 위해서였다.
이 개척 경쟁 소식 외에도 8구역 변경 투어 소식, 사업 유치와 사업 개시 소식, 괴수 사냥 이야기, 변경 수기 등 다채로운 변경 이야기를 실을 예정이었다.
<개척지 건설>
다른 개척지 건설과 마찬가지로 레이크 시티 역시 전투 요원들이 개척 예정지에서 괴수를 소탕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동안 개척 건설 요원들이 다른 개척촌의 주민들을 인부로 동원해 주택, 제재소, 벽돌 공장, 석회석 공장을 짓고 농지와 목장을 넓혀 나가게 된다.
레이크 시티의 개척 건설 담당 바우엔이 개척 요원 20명을 통솔하여 레인보우 시티에서 데려온 인부 300여 명, 멕 워커 열 대를 이끌고 도시 건설을 진행했다.
개척 행정 요원 아트민은 새로 들어온 개척민들을 면담하고 특성과 선호를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갔다.
오슬로 영감이 이끄는 개척병들은 정찰병과 멕 나이트를 보조하여 레이크 시티의 안전을 지켰다.
루산은 레이크 시티 안전 확보에 멕 나이트 여섯 대를 순환 근무로 배치했다.
<철도 건설>
변경 8구역 라돔 시에서 끝나는 철도를 반달 호수 지역까지 연장하는 일은 변경 투어를 시작할 때부터 논의되어 왔으나 사실 쉽지 않았다.
철도 공사는 침목 몇 개 깔고 철로 놓는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비가 아무리 많이 내려도 침수되지 않고 땅이 무너지지 않도록 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과연 변경 8구역까지 철도를 놓아서 수익성이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대형 괴수가 열차를 들이받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반달 호수 지역의 안전이 철도를 건설할 만큼 확보되었는지도 문제가 되었다.
철도 건설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또 다른 문제는 전진 기지 간의 형평성이었다.
철도 노선은 라돔 시에서 델타 기지를 거쳐 반달 호수 지역 레인보우 시티를 지나 본부 개척 기지를 통과한 뒤 레이크 시티에 도착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8구역에는 이 지역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파, 베타, 감마 기지는 팽개치고 델타 기지만 너무 챙기는 것 아닙니까?”
세 전진 기지 대장들의 볼멘소리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역에 철도가 지나는 것도 아니고, 반달 호수 지역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형편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장의 이 한마디에 세 전진 기지 대장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가 생산물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철도를 요구하고 있소.”
결국 세 전진 기지 대장들의 침묵 속에서 변경 8구역은 빚을 내 철도 공사를 시작했다.
루산뿐 아니라 통치자와 단장도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 유치가 8구역의 급격한 성장을 가져올 것으로 보고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철도 건설 과정에 필요하기도 하고 철도가 아니더라도 원활한 이동을 위해 필요하기도 해서 철도 옆에 포장도로 공사도 병행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 장벽 모양 생산 시설 건설>
가프 마법 연구소는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코부스 지방과 인근 지역의 멕 워커를 모두 고용해 레이크 시티 북부에 건설하는 장벽 모양 생산 시설 공사에 투입했다.
코부스의 공장들은 가프 마법 연구소가 의뢰한 생산 설비 제작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가프 마법 연구소가 신경 쓸 일이지 8군단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8군단이 해야 할 일은 가프 마법 연구소가 생산 시설을 건설하는 동안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1 기동 전대의 멕 나이트 15대를 모두 투입했다.
그동안 1전대는 알파, 감마, 베타 기지 - 이 기지들은 델타 기지보다 북쪽에 있었다 - 주위의 원시의 땅을 탐색하고 대규모 괴수 무리를 소탕하거나 후방에 출몰하는 괴수를 박멸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반달 호수 지역에 투입된 것이다.
이 역시 8군단 본부가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 유치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1전대 멕 나이트 15대로도 호숫가 긴 장벽 공사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장은 루산에게 약속한 대로 중고 아이언 워리어 세 대를 구입해 주고 부족한 파일럿을 우선적으로 충원해 주었다.
3전대 멕 나이트가 우르사, 레오파드 시제기 10대, 중고 아이언 워리어 3대, 모두 14대나 된 것이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레오파드 시제기를 만드는 족족 계속 넘겨주기로 했지만, 일단 처음 계획한 10대는 모두 받은 상태였다.
어쨌든 변경 땅에서 좁은 지역에 멕 나이트가 무려 29대나 동원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루산은 지난 변경 생활 7년 동안 겪어 보지 못한 괴로움과 답답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장님, 시에납니다!]
시에나는 루산을 전대장이라는 호칭 대신 늘 대장님이라고 불렀다.
[무슨 일이야?]
[바이크가, 바이크가······.]
[또?]
[···네.]
[후유······.]
루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간다.]
[네!]
‘하아! 변경이 힘든 이유는 괴수 때문이 아니야.’
괴수는 멕 나이트만 있으면 두렵지 않았다.
적어도 루산에게는 그랬다.
후쿵- 후쿵- 후쿵- 후쿵-
004의 발걸음이 루산의 마음처럼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