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나는 똥개가 아니다
71. 나는 똥개가 아니다
“노바에서 기동 테스트를 한다는 거죠?”
“네.”
칼리슈가 간절한 표정으로 루산을 쳐다보았다.
루산은 멋대로 자란 턱수염을 긁었다.
‘안 갈 수도 없고······.’
이미 전장에서 실증했기 때문에 기체 자체의 성능과 제원을 확인하는 자리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멋진 움직임으로 구매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면 100대 팔릴 것을 200대, 200대 팔릴 것을 300대 팔 수도 있는 것이다.
모리츠와 파비안이 견실한 베테랑 파일럿이기는 해도 에이스라고 말하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그래서 칼리슈가 자신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압도적인 움직임으로 제국군 관계자들을 매료시키기를 바라는 것이다.
레오파드가 구매자를 확 끌어 많이 팔리게 되면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 한다.
‘문제는, 내가 이곳을 비우면 엉망이 된다는 건데······.’
켐니츠처럼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가기는 가야 하는데, 방법 좀 생각해 봐야겠어요. 아시다시피 이곳도 중요하니까요.”
칼리슈의 표정이 환해졌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최대한 돕겠습니다.”
“네, 상의해 보죠.”
***
루산은 도통 짬이 나지 않았지만, 줄리아와의 결혼 의사를 묻는 아이젠 자작의 편지에는 답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당장 결혼하겠다고 말했겠지만, 7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열차 역에서 낯선 남자의 품으로 달려가던 줄리아의 모습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인가 요원들이 수다를 떨 때 결혼하고 싶은 여자인지 확인하는 방법이라며 말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혼이 별건가? 일 끝나고 집에 간다고 상상해 봐.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 문을 열고 들어 가. 오늘 하루 고생했다며 얼른 식사하라고 상냥한 얼굴로 미소 짓고 반겨 주는 아내가 있어. 얼굴을 봐. 누구야? 그 여자야? 그럼 결혼하는 거지.”
그때는 피식 웃고 말았지만, 루산은 자못 진지하게 상상해 보았다.
우스꽝스럽게도 상상 속 여인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 놓고 검토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걱정 말고 진행하세요. 혹시 실패하더라도 내가 메꿔 줄 테니까. 이번 시즌에만 100만 골드 흑자니까요.”
그 얼굴은 바덴이었다.
루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 시즌 100만 골드 흑자라니! 1년 만에 빚 다 갚겠네. 하하!’
이것은 배우자 선택을 위한 상상이 아니라 자신의 바람이 지나치게 투영된 것이라고 애써 의미를 깎아내렸다.
어쨌든 줄리아의 얼굴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루산은 사냥하는 동안 틈틈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더는 미루지 못하고 답장을 썼다.
<이 문제는 제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바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여인이 변경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의식주는 문제가 아니지만, 풍토가 아예 달라 교류하고 누릴 만한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 비겁해 보여서 구겨 버렸다.
<지난 7년의 공백을 무시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편지로 결혼 의사를 확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만간 노바에 갈 일이 있습니다.
줄리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 역시 비겁함이 살짝 묻어나기는 하지만, 전에 쓴 것보다는 담백하다고 생각해서 루산은 이대로 편지를 보냈다.
***
현재 3전대 파일럿은 루산을 포함하여 모두 14명이었다.
그중 모리츠와 파비안은 실력 면에서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동안 변경 괴수를 상대한 경험도 제법 쌓여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변경 군단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다는 것.
그들은 루산이나 다른 변경 파일럿들과 달리 장벽 생산 시설 방어를 위해 이곳에서 24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허허!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렇게 기약 없이 날밤 새우는 근무는 버티지를 못해요.”
성과 보상금도 받지 않으면서 3전대가 처한 어려움을 이해하여 12시간씩 일하고 교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루산은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크는 실력에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훈련을 충실히 수행해 왔고, 아라드 전쟁 원정 경험에서 느낀 바가 커서 이제는 한 사람 몫은 어느 정도 한다고 봐 줄 수가 있었다.
사실 머리가 좋지 않고 기본기가 워낙 부실해 여전히 실수가 잦았으나 바이크를 그 정도로 높게 평가할 정도로 현재 3전대의 파일럿 자원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바이크는 루산처럼 뛰어난 파일럿이 되는 것이 목표라 의욕과 열정만은 최고였다.
시에나는 3전대 파일럿들 중에 가장 어리지만, 가장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기본급 30골드.
출신의 특수성으로 신분과 경력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는 파일럿으로는 이례적으로 높은 기본급이었다.
루산이 실력을 보증하고 이 정도는 보장해 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액수였다.
바이크보다 훨씬 높은 기본급. 바이크보다 훨씬 뛰어난 기본기.
그리고 꿈을 이뤄 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루산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아쉬움이 있다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소녀적 감수성이 폭발하는 시기에는 변경 군단 파일럿의 기본 임무라 할 수 있는 괴수 사냥을 힘들어한다는 것이었다.
괴수를 찌르고 때리고, 괴수의 피를 뒤집어쓰고, 괴수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는 모습과 괴수를 해체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을 힘들어 했다.
“크크, 그걸 못 하겠다면 변경에서 파일럿은 때려치워야지.”
바이크가 유일하게 꼬투리를 잡고 놀릴 수 있는 시에나의 약점이었다.
이것은 변경 파일럿으로서는 결코 사소한 약점이 아니지만, 루산은 이해했다.
그 역시 처음에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사실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 매일 생명체를 잡아 죽이고 그 피를 뒤집어쓰는 일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일이 보수가 세고, 기사들이 기피하는 것이다.
여하튼 루산은 가능하면 시에나에게 저지 임무나 유인 임무를 맡기고, 자신이 손상 없이 괴수를 잡는 역할을 맡았다.
시에나는 누구보다 그 임무를 잘 해냈다.
그리고 시에나 본인이 자신의 약점을 떨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바이크의 놀림 때문이 아니라 변경의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서 자신의 임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바이크와 함께 <괴수 부산물 수거 기능사 시험>, <괴수 해부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루산의 가르침을 흡수하여 손상 없이 괴수를 죽이는 법을 빠르게 습득하고 있었다.
바이크에게는 그 모든 것이 눈엣가시 같았다.
“저것만 아니면 3전대 넘버 투는 내가 되는 건데······.”
지기 싫어서 바이크 또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루산의 눈에 띄기 위해 이를 악물고 괴수 사냥에 나섰다.
시에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데 혼자 라이벌로 생각하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루산에게 시에나는 실력적으로나 체력적으로 3전대에서 유일하게 믿음직한 파일럿이지만, 여자이고 아직 나이가 어려 변경의 거친 전투 요원들을 통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했다.
나머지 신입 파일럿 9명의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이름 없는 지방 기사 아카데미 출신의 풋내기 2명>
바이크와 마찬가지로 전선의 파일럿으로 지원했으나 뽑히지 못한 데 열등감이 조금 있었고, 사회가 자신들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불만과 자의식 과잉에 사로잡혔다가 변경에 와서 자신의 실력을 깨닫고 위축돼 있었다.
<멕 워커 파일럿 출신 3명>
변경 멕 나이트 파일럿들 중에는 멕 워커 파일럿 출신이 꽤 있었다.
멕을 움직이는 기본 방식은 나이트나 워커나 똑같았고, 변경에서 상대하는 괴수는 전선에서 상대하는 적 파일럿과 달리 실력이 뛰어난 게 아니었다.
“아니, 마나 진동 대검으로 찔러 죽이는 거, 그거 뭐가 어렵다고? 궂은일은 내가 훨씬 더 많이 하는구먼. 그러고도 돈은 나보다 훨씬 더 받는다는 게 말이 돼?”
변경에서 일하는 멕 워커 파일럿들 상당수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
괴수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이 상당한 상태에서 일과가 끝난 뒤에 꾸준히 무기 훈련을 하여 손상 없이 사냥하는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델타 기지에서 중급 괴수 도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에센이 그러한 경우였다.
그러나 대다수는 곧 깨닫게 된다.
죽은 괴수의 사체를 처리하는 것과 살아 있는 괴수를 죽이는 것의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마나 진동 대검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정확히 찌르지 않으면 대형 괴수의 두껍고 단단한 피부를 제대로 뚫지 못하며, 성난 대형 괴수의 공격은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마처럼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수련해 온 기사 출신들과 자신들의 격차는 결코 메울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루산은 이들이 지방 아카데미 출신 풋내기들보다 나았다.
그 녀석들은 주제도 모르고 날뛰다 사고를 치지만, 이들은 변경에 대한 지식이 있고 명령에 복종하여 큰 사고를 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었다.
<전선 출신의 은퇴 파일럿 2명>
실력적으로는 의심할 바 없으나 이번에 3전대로 배정된 은퇴 파일럿은 나이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모리츠, 파비안이 40대 중후반인데, 이들은 50대 중반을 넘겼다.
기술이 아무리 좋고 몸에 완전히 익었다지만, 체력이 없으면 동화기를 움직여 멕 나이트를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에고, 에고!”
앓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하아······.”
루산의 입에서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전선 출신답게 책임감과 명예심이 있었기 때문에 필요할 때는 한 방씩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외에는 가만히 멈춰 있는 경우가 많아 힘들어서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만들었다.
<신분과 경력 증명을 제출하지 않은 파일럿 2명>
루산이 1년 차부터 기본급 90골드를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제국 기사 아카데미 졸업장을 비롯한 각종 신분 증명 서류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분과 경력을 증명하면 대우가 달라진다.
그럼에도 신분과 경력 증명을 제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이면 열 모두 범죄자, 도망자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이름도 가짜였다.
변경 특별법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위험한 변경 지방의 개척과 안전 확보를 위해 범죄자도 신분을 숨기고 들어와 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이 안에서 죄를 저지르면 바깥 형법보다 훨씬 엄하게 처벌하지만, 말하자면 범죄자들의 도피처가 되는 셈이다.
이들 중에는 물론 사랑의 도피와 같은 극적인 사연 때문에 정체를 숨기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흉악 범죄를 저질렀거나 멕 나이트 파일럿의 수입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돈 사고를 치고 숨어든 경우였다.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지원했다는 것은, 전선 혹은 다른 변경 파일럿 출신이라는 뜻.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솜씨를 제대로 발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녔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루산의 눈에는 9명의 신입 파일럿들 중에 이들의 실력이 가장 나아 보였다.
‘실력을 감추려 해도 수십 년 동안 수련해 몸에 밴 습관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니까.’
루산 또한 사람인지라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 이들이 무슨 사고를 치고 왔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변경에서 남의 사연을 묻지 않는 것은 건강과 안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자신의 문제만 해도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관심이 차지하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실력은 발휘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3전대와 자신을 위해.
[레보르크, 파펜. 나 좀 봅시다.]
[예스, 커맨더.]
[왜 부르시오?]
레보르크와 파펜이 탑승한 004, 005가 루산의 003으로 다가왔다.
잠깐 괴수들의 활동이 뜸해 루산은 조종실 문을 열고 멕 나이트 손바닥 위로 나왔다.
덥수룩한 수염과 까치집을 지은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레보르크와 파펜도 루산처럼 멕 손바닥 위로 나왔다.
레보르크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있고 절도가 있는 것이 기사 출신 같았다.
파펜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민머리 사나이로 처음 만나는 사람은 절로 눈을 피할 만큼 흉악하게 생겼다.
얼굴과 몸에 흉터가 가득했던 것이다.
“잠잘 시간도 없이 굴리면서 잠깐 쉬려는데 왜 부르는 거야?”
파펜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변경 7년 차인 루산은 이 정도 인상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런 자들도 많이 상대해 왔던 것이다.
“가서 쉬어요.”
“엉?”
“가서 쉬라고요, 파펜. 잠깐 쉬려 했다면서요?”
“이익! 지금 똥개 훈련시키나?”
파펜은 인상을 팍 쓰고는 멕 조종실로 들어가 쿵쿵 성난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레보르크 역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일단 루산의 말을 들어 보려는 듯 가만히 기다렸다.
“레보르크, 당신도 돌아가세요.”
“할 말이 있었던 게 아닙니까, 커맨더?”
“당연히 할 말이 있으니까 불렀죠.”
“그런데 왜······? 나는 똥개가 아닙니다.”
레보르크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거야 더 두고 보면 알 일이고.”
레보르크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루산은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레보르크가 루산을 무섭게 노려보다 몸을 홱 돌려 조종실로 들어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멕 나이트 손바닥 위에서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는 데도 전혀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함!”
루산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잠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조금이라도 더 쉬려면, 휴식이 아니더라도 다른 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저들을 더 부려 먹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