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똥개가 싫으면 사냥개는 어때?
72. 똥개가 싫으면 사냥개는 어때?
바람의 언덕 장원은 자작나무숲 장원과 다른 느낌으로 호평을 받았다.
투숙객들이 각각 언덕 하나의 주인이 된 듯한 느낌을 주는 언덕 위의 독채 오두막, 시원한 바람과 확 트인 경치, 예약만 하면 배달까지 해 주는 식사 제공 방식과 오두막마다 설치된 바비큐.
놀이 시설과 활동 프로그램은 자작나무숲 장원과 다른 듯 비슷했으나 이 독채 오두막으로 인해 확실한 차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바람의 언덕 장원을 오픈한 뒤로 노바 귀부인들의 차 모임에서는 자작나무숲 장원과 바람의 언덕 장원을 비교하는 것이 유행했다.
자작나무숲 장원에서 5일을 보내고 곧바로 바람의 언덕 장원으로 짐을 옮겨 다시 5일을 보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사람이 늘 승자가 되었다.
그렇게 예약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참! 미스 아이젠에게 회화 지도를 받아 보셨나요?”
“그럼요! 바람의 언덕 장원을 다녀온 사람치고 미스 아이젠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요? 예약 잡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다른 화가 선생님께 들으니 프라토에서 유학한 실력파라고 하더군요.”
“평소 그림이나 예술에 전혀 관심도 없던 큰애가 정신을 못 차리지 뭐예요. 세상에, 이번 휴가 내내 물놀이도 안 하고 화실에만 있었다니까요. 뭐,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 정도니까 남자애들은 오죽 하겠어요. 엄마가 제일 예쁘다던 녀석이 그러니까 얼마나 서운하던지. 다 컸나 봐요. 호호호!”
“나밖에 모른다던 우리 집 영감님도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리다 이미 혼쭐이 났답니다. 호호호!”
귀부인들은 나이 불문 줄리아 이야기로 한참 동안 입방아를 찧었다.
줄리아의 부친이 제국군 장군인데 최근에 승진했다는 이야기, 어려서 약혼자와 파혼했다는 이야기, 한때 좀 놀았다는 소문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귀부인들에게 걸리면 비밀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아는 바를 첨가하여 줄리아에 대해 낱낱이 분석하다 시들해질 때쯤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화제의 주인공답게 줄리아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여름 휴가철이 끝나지 않았고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매일 수업을 네 강좌씩 진행해야 했고, 수업 외에도 그림을 꾸준히 그려야 했다.
어쩌다 보니 바람의 언덕 장원에서 약간 유명세를 얻어 오두막에 걸어둔 그림이 며칠에 하나씩 팔려 나갔기 때문이다.
“내 그림이··· 팔렸어!”
줄리아는 감격했다.
그림 단가가 아직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몇 골드씩 하는 그림이 한 번도 아니고 꾸준히 팔려 나가는 것은, 화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뒤로 처음 겪어 보는, 가슴 저릿한 경험이었다.
장원 별장 측에서는 그림 판매 대금을 전부 화가에게 지급해 주었다.
기본급이 약한 대신 그림 수익은 전액 작가에게 주기로 약속돼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의미 있는 수입을 올린 줄리아는 자신감을 얻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 내 그림이 세상에 통한다는 자신감.
그러나 늘 좋은 이야기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참 편해. 얼굴로 그림을 팔면 되니까.”
“지난번 숲속에서 어떤 남자 손님과 나오는 걸 봤는데 말이야. 세상에······.”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들.
머리칼이 쭈뼛 서는 악의적인 소문들.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은 파혼한 뒤로 한동안 계속 들어왔기 때문에 나름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잘 되지 않았다.
들으라는 듯이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가서 멋지게 한 방 날리고 싶었으나 이런 일로 따져 봐야 찔려서 그런다는 둥 감추고 싶어서 저런다는 둥 더 큰 이야기들이 나올 것을 알기 때문에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감이 무너졌다.
‘정말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내 그림을 산 거야?’
‘이대로 참고 있으면 내가 그림을 몸으로 판다는 소문이 돌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루산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여자 사장의 회사에서, 그에 대한 의문을 애써 억누른 채 자신의 홀로서기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이런 소문들이 돌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뒤에서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숙학교 다니는 남학생들 부모가 그림을 산다며? 어린애들 꼬시는 재주도 있나 봐.”
줄리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동안 쌓인 것들도 있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몸을 돌리는 순간,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게 확실한 이야기인가요?”
“사, 사장님!”
화들짝 놀란 고용 화가와 직원들.
“미스 아이젠의 그림이 팔리는 이유가 기숙학교 남학생을 꾀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지금?”
“그, 그, 그게······.”
“사실 관계가 확실하다면 당장 미스 아이젠을 해고하고 그림을 산 고객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사안이에요. 우리 회사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니까요. 말해 보세요.”
바덴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추궁하자 직원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만약 아무 증거도 없이 모함하는 것이라면 당신들이 우리 회사에 크나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 회사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미스 아이젠과 고객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니까요. 당장 증거 또는 믿을 수 있는 정황을 제시하지 않으면 해고할 뿐 아니라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할 겁니다.”
직원들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 잘못했습니다, 사장님!”
“다시는 안 그럴게요, 사장님!”
지켜보던 다른 직원들도 두려움에 얼어붙은 채 바덴을 쳐다보았다.
바덴이 직원들을 죽 훑어보며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급료를 주는 이유는 이런 한심한 이야기로 함께 일하는 사람을 괴롭히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어려운 고객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언제나 입이 무거워야 합니다. 고객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동료와 업무에 대한 이야기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동료에 대해 험담하는 광경을 고객님이 봤다고 생각해 봐요. 다시 오고 싶겠어요?”
“······.”
“나는 여러분에게 기본급 외에 성과 보상금을 주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현명하게 풀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배인.”
“네, 사장님!”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관리 책임을 물을 겁니다.”
“절대! 절대!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안절부절못하던 지배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바덴이 줄리아 앞으로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합니다, 미스 아이젠.”
그런 뒤 가까이 다가가 줄리아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이 사과한다면 이번에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확고한 기준을 세우지 못한 제 탓이 크니까요.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참을 수 없다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해고할 테니까요. 다만······.”
“······?”
“미스 아이젠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에요. 따질 때는 감히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할 정도로 따지고 용서할 때는 대범하게 용서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화살이 당신에게 향할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그래요.”
바덴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 별의별 소리를 다 듣는답니다. 대귀족 아무개가 사업 자금을 대고 있다느니, 우리 제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업가의 애인이라느니······. 어쩌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리지 않는 곳에서 하면 무시하고, 나에게 들리게 하면 미소를 지으면서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고 걸어가서 말해야죠. 직접 보셨어요? 하고 말이에요.”
줄리아는 바덴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질 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미스 아이젠. 당신이 우리 회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이런 저열한 일들에 좌절하지 마시고 앞으로 보란 듯이 일가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바덴은 줄리아에게 재차 사과하고 떠났다.
줄리아는 쭈뼛쭈뼛 다가와 사과하는 다른 화가와 직원들의 사과를 듣는 체 만 체 받고 용서해 주었다.
이런 사람들은 이제 관심 밖이었다.
어른스럽고 당당하게 대처하는 바덴이 너무나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바덴과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잘난 바덴에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열하지만 몹시 궁금했다.
‘당신은 여자이면서 이렇게나 큰 사업체를 대체 어떻게 운영하는 건가요? 자금은 누가 대는 건가요? 소문이 진짜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그리고···, 그리고 루산과는 무슨 관계죠?’
그러나 다짜고짜 가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바덴은 지배인의 배웅을 받으며 자동 마차를 타고 떠났다.
그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줄리아는 결심했다.
‘그림 팔아서 나도 자동 마차를 몰고 말 거야!’
그러려면 그림을 많이 팔아야 했다.
아직은 단가가 그리 높은 화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는 바덴 덕에 저열한 소문들을 무시하고 그림 그리는 데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
“아니, 이거 얼굴이 너무 상한 거 아니야?”
켐니츠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델타 기지에서 사냥한 괴수의 혈액과 체액을 운반하는 수송 팀을 호위해 이곳에 들른 김에 루산을 보고 가려고 왔다가 깜작 놀란 것이다.
루산은 얼마나 오랫동안 옷을 안 갈아입었는지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수염과 머리는 자른 지 오래돼 사람 아닌 인간형 괴수가 돼 가고 있었다.
“지난번 웨이브 때보다 훨씬 심한데?”
“흐흐, 시간이 없는데 어쩌겠어요?”
루산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1전대하고 타협해.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적당히 티격태격하다 넘어가는 거지 뭐. 3전대 신입들이 일에 익숙해지면 건드리라고 해도 귀찮아서 안 건드려. 알잖아?”
루산이 1전대의 어깨치기에 개입해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8군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델타 기지의 멕 절반을 여기 투입하는 건 어때요? 사냥 수입 면에서는 여기가 거기보다 훨씬 나을 텐데 ······.”
“쯧.”
켐니츠가 혀를 차며 말했다.
“뭐, 절반까지는 아니어도 잘하면 한두 대 정도 돌릴 수 있긴 한데, 모양새가 우습잖아. 놀고 있는 1전대 놔두고 옹색스럽게 델타 기지에서 한두 대 빌려오는 모양새가 말이야.”
“그건 그렇죠.”
“나도 입장이 난처하고.”
“맞아요. 생각이 짧았어요.”
“그래도 정 필요하면 말해. 1전대 놈들하고 친하게 지낼 일도 없으니까.”
루산은 그 말이 고마웠지만, 이미 켐니츠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제안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필요하면 말해. 그럼 갈게.”
“고마워요. 잘 가요.”
켐니츠가 돌아간 뒤, 루산은 방법을 고민했다.
레보르크와 파펜은 심심하면 의미 없이 불렀다가 돌려보내기를 반복해 슬슬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령권을 갖고 있는 상관을 함부로 들이받지 못한다.
변경 땅의 법은 바깥세상보다 엄격했고, 신분 증명을 제출하지 않은 그들은 여기서 사고를 치면 갈 곳이 없었다.
변경은 숨을 곳이 없었다.
이 땅을 벗어날 방법도 없었다.
라돔 시에서 검문을 하면 모두 걸린다.
라돔 시를 거치지 않고 필센 제국 땅으로 들어가려면 변경의 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살행위였다.
물론 화가 나서 이것저것 재지 않고 들이받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살기 위해 변경 땅까지 숨어든 것이기 때문에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상급자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거친 신입들을 길들이는 것이다.
[파펜, 레보르크! 이리 와 봐요.]
[쓰벌! 왜 또 불러!]
[지금 나한테 욕한 겁니까?]
[혼잣말한 거야, 혼잣말!]
[왜 부르는 겁니까, 커맨더? 이유 없이 자꾸 부르면 정말 참지 않겠습니다.]
상스러운 말을 막 하는 파펜과 달리 레보르크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노를 토했다.
그러나 루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고, 무서워라. 할 말이 있으니까 부르지 왜 부르겠어요. 빨리 와요. 다섯 셀 때까지 안 오면 분배 비율 깎는다! 5, 4, 3······.]
[제기랄!]
[후유!]
숨소리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루산은 이번에도 003의 조종실에서 나와 멕 손바닥 위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마치 공을 던져 놓고 강아지가 공을 물고 오기를 기다리는 주인처럼 편하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004, 005가 달려와 루산 앞에 거칠게 멈춰 섰다.
흙먼지가 루산을 덮쳤다.
그들 나름의 반항인 셈이다.
루산은 귀찮아서 이 정도는 봐주기로 했다.
그가 손을 까딱하여 두 파일럿을 부르자 그들 역시 조종실 문을 열고 멕 나이트 손바닥 위로 나왔다.
“정말 이럴 거야?”
파펜이 눈을 부라렸다.
레보르크는 따로 말은 하지 않았으나 루산을 노려보는 눈빛의 열기는 파펜보다 뜨거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산은 나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똥개가 되기 싫으면 사냥개가 돼야죠.”
“뭐라고!”
“말 다 했소?”
두 사람이 화를 내도 루산은 여유롭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화가 나는 와중에도 루산의 여유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차마 해코지할 생각을 못 했다.
“신기한 게 뭔지 알아요?”
“대체 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돌리지 말고 말해 보시오.”
루산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사냥개가 사냥을 잘하잖아? 그러면 주인이 별로 간섭을 안 해요.”
“······!”
“······!”
“날 봐요. 맘대로 하라고 본부에서 내버려 두잖아.”
마침내 두 사람은 루산의 의도를 대강 눈치 챘다.
그러나 정확히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뛰어난 사냥개라는 걸 증명해 봐요. 그럼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뭘, 어떻게?”
루산은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두 사람에게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1전대장을 만나러 갔다.
루산이 탄 003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파펜과 레보르크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난 며칠 사이에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서로 친해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금방 고개를 홱 돌렸다.
“쓰벌!”
“후유!”
욕설과 한숨의 원인은 무책임하게 남쪽으로 겅중겅중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