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그래, 실컷 웃어라
73. 그래, 실컷 웃어라
1전대장 레겐스.
변경 경력 20년이 넘은 40대 중반의 파일럿은 눈앞에 서 있는 루산 보름스가 반가웠다.
<3전대 단독으로 방어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통상 임무로 전환하라.>
단장으로부터 직접 내려온 지시 때문에 1전대는 가프 마법 연구소 장벽 생산 시설을 지키는 일을 중단한 뒤에도 레이크 시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섣불리 이 지역을 벗어났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레겐스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3전대 단독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사라지라는 후임 전대장의 말을 듣고도 임무에 투입하게 해 달라고 밸 없이 매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편의 시설 하나 없는 레이크 시티에서 하는 일 없이 죽치고 있었던 것이다.
3전대는, 놀랍게도 단독으로 버티고 있었다.
레이크 시티 안전 보장을 위해 멕 나이트 6대를 동원하고 있기 때문에 고작 8대로 아직까지 사고 없이 장벽 공사 현장을 지켜 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껏 버틴 게 놀랍기는 하다만, 사람이 제대로 잠을 자지 않고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지.’
레겐스는 조만간 사고가 나리라고 생각했다.
사고가 나든 그 전에 찾아와 사정을 하든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1전대가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훨씬 위험하고 일의 강도가 세지만, 그만큼 수입 또한 높아서 1전대 파일럿 모두가 얼른 투입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미 한번 맛을 본 터라 그 달콤함을 잊기가 어려웠다.
만에 하나 3전대가 자신들만으로 장벽 생산 시설이 완공될 때까지 꾸역꾸역 버텨 낸다면 1전대는 그야말로 바보짓 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돈도 잃고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웃음은 물러나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 판단을 잘못 내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놀면서도 하루하루 초조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는데, 루산이 험상궂은 몰골로 찾아온 것이다.
내심 기뻤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거대한 원시의 나무 밑에서 벌레가 얼굴로 떨어지지 않도록 천막을 쳐 놓고 그 아래 누워 있던 레겐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루산은 천막 앞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말했다.
“레겐스, 1전대 투입해 주세요.”
“뭐? 뭐라고?”
레겐스가 귀에 손을 대고 안 들린다는 시늉을 했다.
루산은 눈썹을 꿈틀하면서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레겐스가 원하는 대로 크게 외쳤다.
“1전대 투입을 요청합니다!”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1전대 멕 나이트 파일럿, 멕 워커 파일럿, 정찰병들이 루산의 목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1전대 투입을 요청한대!”
“크크크! 진작 그럴 것이지.”
“하하하! 잘한 결정이야, 루산. 괜히 자존심 부리다 죽는 것보다는 낫지.”
“그럼, 그럼!”
그러나 레겐스가 생각할 때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물러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투입 요청을 한다고? 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게 1전대야? 우리를 너무 싸구려 취급하는데?”
1전대 요원들이 눈치 빠르게 레겐스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 장난하나?”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알아서 막든가.”
루산은 화가 났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1전대가 공사 현장에 투입되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이 자리까지 온 것도 아니었다.
레겐스 역시 필요성은 알고 있었고, 1전대 파일럿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떠나지 않고 레이크 시티에 남아 있는 것이다.
레겐스는 20년 동안 남을 밟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유능한 파일럿이 있으면 위험한 임무에 내보내거나 모함을 해서 치우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 왔다.
자기 말을 잘 듣는 파일럿은 분배 비율을 높여 주고 말을 안 들으면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 왔다.
이런 비열함뿐이라면 위에서도 가만 두지 않았을 테지만, 위에서 시키는 일은 또 잘했다.
어차피 오만 쓰레기들이 모여드는 변경에 이런 사람도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레겐스 같은 사람을 상대할 정교하고 세련된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조만간 레오파드 테스트 파일럿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바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하아!’
루산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정중하게 말했다.
“1전대 파일럿들이 변경에 익숙하지 않은 3전대 신입 파일럿들에게 선배로서 변경에 대해 알려 주는 교류 과정에 섣불리 개입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교육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몸의 대화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이 일로 마음이 상한 1전대 동료 파일럿들이 있다면 사과드립니다.”
요즘 8구역에서 가장 잘 나가는 3전대장 루산이 정말로 사과를 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매암매암매암매암 쓰르르-
벌레 소리가 유일하게 정적을 깼다.
승리감에 도취된 1전대 파일럿들이 기분 좋게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뭔 말을 저리 어렵게 해?”
“배웠다고 티 내는 거야 뭐야? 갑자기 짜증이 확 나네.”
레겐스는 루산의 사과가 약간 부족한 감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루산이 레겐스에게 사과했다!
루산도 레겐스 앞에서는 깨갱한다!
이것으로 자신의 위상이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이 정도 사과를 넘어 더한 것을 요구하고 루산이 거기에 반발하여 충돌이 발생한다면, 위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변경에서 20년 넘게 살아남은 그의 처세 감각이 이 정도로 넘어가라고 충고하고 있었다.
레겐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루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뭐, 이번 일로 깨달은 게 있는 것 같으니 넘어 가기로 하지. 가자! 일하러.”
1전대 파일럿들이 환호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루산은 어색한 미소로 그들이 일터로 복귀하는 것을 환영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늑대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실컷 웃어라.’
***
장벽을 3등분하여 서쪽과 중앙 구간을 1전대가 담당하고 동쪽 구간을 3전대가 담당하기로 했다.
3전대의 임무 강도가 3분의 1로 줄어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루산, 모리츠, 파비안이 노바에서 열리는 레오파드 획득 시험으로 인해 열흘 이상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이크 시티 담당을 네 대로 줄이고, 두 대를 이쪽으로 투입해. 그러면 일곱 대지? 멕 나이트 일곱 대, 멕 워커 여덟 대. 별로 차이도 안 나잖아.”
루산이 그렇게 배치를 변경해 주었지만, 별로 안심이 되지 않았다.
3전대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고 안정적인 세 명이 빠지게 되면 나머지는 모두 신입 파일럿들이었다.
3전대 파일럿들은 부담감이 어마어마했다.
“쫄지 마! 하던 대로 하면 되잖아!”
바이크가 기세 좋게 외쳐 보아도 3전대 파일럿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평소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은 바이크의 구호 따위, 전혀 힘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루산은 바이크와 시에나, 레보르크와 파펜을 따로 불렀다.
“바이크가 우르사를 타고 시에나는 002를 타도록 해. 레보르크와 파펜은 아이언 워리어를 탄다.”
“예스, 커맨더!”
“네, 대장님!”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바이크, 시에나와 달리 레보르크와 파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루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노바 획득 시험에 동원되는 레오파드는 001, 003, 004, 005 그리고 스피디2, 이렇게 5대였다.
3전대에 부족한 기체는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보유하고 있는 윤활유, 부품 시험용 기체를 빌려 주기로 했다.
“1전대가 기세등등하게 어깨치기를 걸어올 거야. 내가 없으니 더 그렇겠지.”
바이크와 시에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다들 내 말 잘 들어.”
바이크와 시에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루산을 쳐다보았다.
반면 이미 이야기를 들은 레보르크와 파펜은 뚱한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임무가 첫 번째야. 공사 현장에 사고가 나면 안 돼. 이걸 지키는 한에서 어깨치기를 걸어오면 받아친다.”
“······!”
“······!”
바이크와 시에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명 사고만 내지 마. 절대로 마나 진동 대검으로 공격해서는 안 돼. 나머지는 맘대로 해. 멕을 부수든 깨든 부러뜨리든. 내가 다 감당할 테니까.”
루산의 과격한 지시에 바이크와 시에나는 너무나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1전대 놈들이 다시는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어.”
“네!”
그동안 당한 게 많은 바이크가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대답했다.
“레보르크와 파펜, 시에나가 1전대와의 경계 지점을 맡아. 바이크는 나머지 파일럿들이 휩쓸리지 않게 막아. 그리고 절대 뛰어들지 마. 알았어?”
의욕에 불타올랐던 바이크는 자존심이 크게 상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네.”
자신의 실력을 깨달을 만큼은 성장한 것이다.
루산은 바이크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스스로 감당할 문제였다.
“마나 진동 무기는 절대 쓰지 말고, 인명 피해만 내지 마. 변경에서 우습게 보이면 고달파진다. 공사 기간도 많이 남았는데, 고달프게 지낼 수는 없지. 철저히 밟아 놓으란 말이야.”
루산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건 전쟁이었다.
작게는 1전대와의 기 싸움이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을 견제하는 변경 8군단의 오래된 멤버들과의 싸움이었다.
어지간하면 갈등 없이 지내고 싶었으나 변경이라는 곳이 워낙 거칠고 험해서 말로 설득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데, 말이 통하는 상대에게는 말로 하더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까지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승산은?
당연히 이긴다고 보았다.
이것은 레보르크와 파펜을 믿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었다.
두 사람도 상당한 실력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정도나 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1전대 파일럿들도 변경에서 오래 묵은 파일럿들이었다.
전선 출신도 있고 범죄자 출신도 있었다.
루산이 믿는 것은 시에나!
멕 워커를 타고도 멕 나이트를 쓰러뜨리는 시에나의 놀라운 감각과 정교한 움직임을 보고 이 싸움을 계획한 것이다.
거기에 엔진 출력이 높은 고급 기체 002를 탄다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리라 보았다.
다만 시에나는 변경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가 어리고 마음이 약하며, 멕 나이트를 타고 다른 사람이 탑승한 멕 나이트와 싸워 본 적이 없었다.
레보르크와 파펜이 과격하고 잔인한 동작으로 시에나의 전투 본능을 충분히 끌어올려 주리라!
‘거기에 레보르크와 파펜의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면 좋은 일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
루산은 003을 타고 떠났다.
나머지 테스트 기체는 이미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자신들이 사용하던 멕 나이트를 빌려주러 오는 길에 먼저 가지고 가서 라돔 역에서 대기 중이었다.
루산은 어깨에 클라크를 태웠다.
모리츠, 파비안뿐 아니라 칼리슈를 비롯한 가프 마법 연구소 마법사들과 정비 요원들이 잔뜩 동행하는 길이라 굳이 같이 갈 이유가 없었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함께 다닐 생각이었다.
클라크가 변경 땅에 사는 제법 똑똑하고 착한 소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큰물을 경험하고 크게 성장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 무서워?
“아뇨! 아니, 사실은 쪼끔 무섭긴 해요.”
클라크가 오른손으로 003의 견갑 가시를 꽉 붙잡고 왼팔로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 당연한 거야. 하지만, 서브 파일럿을 어깨에 태우고 움직이는 것이 필센 제국군 이동의 기본이지. 관측병 역할도 하는 셈이야.
“아!
- 개척촌 아이들이 보면 부러워할걸?
“하하하···, 그럴까요?”
- 그럼!
클라크는 문득 동생들한테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감히 기사님께 고향 마을에 들렀다 가자는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클라크를 어깨에 태운 루산은 레이크 시티에서 라돔 시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어지간한 파일럿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의 놀라운 체력이었지만, 루산은 오로지 열차에서 빨리 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라돔 역에서 특별 수송 열차에 레오파드 003을 실은 뒤 루산은 곧바로 잠을 잤다.
화장실에 갈 때와 너무 배가 고파 깰 때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3일 내내 잠만 잤다.
‘사람이 이렇게 잠을 많이 잘 수도 있구나!’
클라크는 인체의 비밀 일부분을 깨달은 것 같았다.
사흘 뒤 레오파드를 실은 열차는 노바 시 서쪽 관문에서 철저한 검문을 거치고 나서 통과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레오파드 시험 기체들은 수도 군단 멕 나이트와 근위대 멕 나이트의 삼엄한 호위 - 감시와 보호의 중간 수준의 동행 - 를 받으며 노바 외곽 멕 나이트 기동 시험장에 도착했다.
“아함!”
그동안 부족한 잠을 열차에서 계속 자서 몸이 조금은 개운해진 루산은 003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이네.’
과거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다닐 때 여러 차례 와 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