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밤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돌아오세요
74. 밤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돌아오세요
“좋은 건 배워야지.”
1전대장 레겐스는 3전대의 운용 방식을 따라했다.
멕 워커 아홉 대에 방패를 들려 괴수 저지에 참여하게 하고, 탐탐 정찰병을 투입해 괴수를 분산 또는 유인하고, 완성된 장벽 위에 감시병을 두어 괴수의 접근을 미리 알리도록 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멕 나이트 15대를 3교대로 투입할 수 있었다.
1번 조가 장벽 앞 근무를 서는 동안 2번 조는 장벽 뒤에서 느슨하게 대기하고 있다가 1번 조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는 경우에 한해 투입한다.
그때 3번 조는 완전히 휴식을 취한다.
이렇게 운용하자 3전대보다 훨씬 여유가 생겼다.
3전대는 루산, 모리츠, 파비안이 빠진 자리를 경험 부족한 파일럿이 맡는 바람에 3교대로 짤 여유가 없었다.
2교대, 그것도 휴식조 없이 근무조와 대기조 형태로 교대하여 여전히 푹 잘 수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1전대가 담당하는 구역은 3전대의 두 배.
일이 바쁠 때는 건드릴 틈이 없었다.
그러나 괴수들이 언제나 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가한 틈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1전대 파일럿들은 그동안 이 좋은 돈벌이를 못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화풀이 대상은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들을 쫓아내고 이 자리를 독차지해 온 3전대 신입 파일럿들이었다.
3전대 신입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이렇게 괴수가 뜸한 틈에 멕 나이트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괴롭힐 맛이 났다.
- 애애애애애애애!
소음 발생기로 잠 못 자게 만들기로 일단 간을 봤다.
깜빡 졸던 파펜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뭐야? 괴수야?]
[1전대 놈들이오.]
레보르크가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황을 파악한 파펜이 1전대 멕 나이트들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 이런 쓰벌 새끼들이, 다 뒈질래?
그러나 이런 반응은 1전대 파일럿들을 더 즐겁게 했다.
- 크크크!
- 하하하!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파펜이 1전대 쪽으로 쿵쿵 다가갔다.
- 어쭈, 덤빈다고?
놀리는 듯한 그 소리에 파펜이 탄 멕 나이트가 멈칫하더니 방향을 돌려 자리로 돌아왔다.
- 크크, 쟤 뭐냐?
- 밖에서 사고 치고 들어와 여기서도 사고 칠 수 없어 봐준다는 건가? 아이고, 무서워라!
- 쫄았네.
뒤에서 야유와 욕설이 들려왔지만, 파펜은 참았다.
[왜? 들이받지 않고?]
레보르크 역시 의외라고 생각했다.
루산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들이받을 줄 알았던 것이다.
[저것들도 우리를 간 보고 있는 거야. 제대로 어깨치기 할 생각이었으면 먼저 이쪽으로 왔겠지.]
[음.]
파펜은 변경 파일럿들의 생리를 잘 알았다.
신분 증명 없이 들어온 파일럿들은 중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아무래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어깨치기 하느니 한번 할 때 제대로 박살을 내 버려야지. 그러려면 연기 좀 해야 해.]
[어떻게 말이오?]
[나처럼. 쫄아서 못 덤비는 척하란 말이야.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아서 차마 싸움을 못 하겠다고 주춤주춤 물러서라고. 그러면 어느 순간 경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만만하게 여기게 되는 거지.]
[음······.]
레보르크는 파펜의 말이 옳다 여겼다.
험상궂게 생겨 곧바로 주먹다짐부터 할 줄 알았는데 머리를 쓰다니, 의외였다.
왠지 좀 더 믿음이 갔다.
[쓰벌! 사고 안 치고 죽은 듯이 지내려고 했는데 별 거지같은 전대장을 만나서 글러 먹었네.]
루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레보르크도 동감이었다.
[그자가 정말 뒷감당을 다 해 주겠소?]
[흥, 그걸 믿어? 여기 변경이야.]
[그럼······?]
[확실한 건, 그놈 말대로 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의 삶이 고단해진다는 거야. 하소연할 데도 없어. 직속상관에게 밉보이면 죽어나는 곳이 변경이란 말이지.]
[음!]
[1전대? 내가 속한 부대가 아니잖아. 놈들을 제대로 밟아 놓으면 다시는 안 건드릴 테고 거지같은 전대장도 뱉은 말이 있으니 귀찮게 안 하겠지. 그렇다면 당연히 저것들을 밟아 놔야지. 그게 이익이니까.]
[그래도 1전대에서 문제를 삼으면······.]
[이거, 답답한 형씨네.]
레보르크는 울컥했으나 변경에 대해서는 파펜이 더 잘 아는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우리 전대장은 여우 같은 놈이야. 1전대장은 여기 있는데 우리 전대장은 여기에 없어. 출장을 갔단 말이야. 여기서 1전대랑 우리랑 붙어서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을 지겠어? 누구 잘못이야?]
[······!]
[시비는 저쪽에서 먼저 걸었어. 그건 가프 마법 연구소 사람들도 알고 있지. 우리 전대장이 머저리 같은 신입들 보호하려고 1전대 놈들을 쫓아냈다가, 출장 때문에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불러왔어. 그것도 모두가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또다시 1전대가 우리한테 시비를 걸어. 우리는 받아쳐. 대판 싸움이 나고 1전대 멕이 부서져. 그래서 이 구역 방어에 문제가 생겨? 누구 책임이야?]
[1전대장!]
[당연하지! 어떻게든 장벽 공사를 무사히 마무리 지으려고 자존심 굽히고 1전대 다시 불러오고 또 바쁘게 출장을 가느라 이곳에 없는 우리 전대장한테 책임을 묻겠어? 1전대장 새끼는 좆 된 거야.]
[아!]
레보르크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루산의 심계와 그 심계를 완전히 파악한, 험악한 겉모습 안에 영리한 두뇌를 감추고 있는 파펜에 놀란 것이다.
레보르크의 감탄에 파펜이 신이 나서 떠벌렸다.
[애초에 1전대장 놈이 앞뒤 못 가린 거지. 우리 여우하고 제 놈하고 비교가 돼? 신형 멕 나이트 수십 대를 유치해서 전에 없던 기동 전대를 떡 하니 창설하고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을 끌어온 젊고 능력 있는 놈하고 골목대장 놀이나 하고 있는 늙은 놈하고 싸우면 위에서 누구 손을 들어 주겠어?]
[능력 있고 젊은 놈.]
[크크, 그렇지!]
레보르크가 자신의 표현을 따라하자 파펜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젊은 여우의 사냥개가 되어야 하는 것이오?]
[말은 좆같지만, 빙고! 사냥을 잘하면 귀찮게 안 하겠다고 했으니까.]
[음!]
[그래도 못 살게 굴면 그때는······.]
파펜은 굳이 다음 이야기까지 꺼내지는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아 후회하는 중이었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쓰벌······.’
그때 1전대 파일럿들이 심심해서 다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 쫄았냐? 야! 자냐?
- 크크크, 피곤한가 보지. 자는 척하게 내버려 둬.
파펜이 레보르크에게 말했다.
[형씨, 가서 한번 해 봐.]
[뭘 말이오?]
[연기. 겁먹은 것을 숨기려고 허세 부리는 척해 보라고. 내가 늘 함께 근무하는 건 아니잖아. 지켜보고 있을 때 미리 연습해 봐.]
그 말이 옳다 여긴 레보르크가 1전대 멕들을 향해 쿵쿵 달려갔다.
1전대 멕 나이트들이 살짝 긴장하며 에워싸는 대형을 취했다.
레보르크의 멕은 1전대 멕 가까이까지 달려가다 급정거했다.
관성으로 미끄러지는 멕 나이트의 발에 긁혀 흙과 돌이 말려 올라가 1전대 멕들을 덮쳤다.
촤아아-!
- 한 번은 봐 준다. 까불지 마라.
레보르크는 어색한 목소리로 위협의 말을 던지고 파펜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듯 달려왔다.
[핫하하! 재밌는 형씨네.]
파펜이 오랜만에 통쾌하게 웃었다.
반면 1전대 멕들은 자신들이 놀림을 받은 것 같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 너 죽었어!
- 저 새끼 밟아!
그러나 그때 다시 호수에서 괴수들이 올라왔다.
멕 나이트와 거대 괴수 사이의 험악한 싸움은 인간들 사이의 기 싸움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
***
레오파드 003, 003의 다운그레이드 모델 005, 스피디2는 생김새부터 확연히 달라 군 관계자들의 시선을 강하게 끌었다.
“저렇게 빼빼한 기체들이 설마 전투용은 아니죠? 충돌하면 날아가겠는데?”
“몇 대 맞으면 뼈대가 부러질 것 같군요. 허허허!”
장군들이 농담처럼 레오파드를 폄하하자 가프 마법 연구소 멕 나이트 총 책임자 가라로슈는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굳이 화를 낼 필요는 없었기에 웃으며 말했다.
“그야 안 맞고 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게 말이 됩니까?”
“지켜보시지요.”
“뭐, 그럽시다.”
전직 기동 부대 멕 나이트 파일럿 출신의 장군들, 현역 에이스 파일럿들, 군 소속 마법사와 정비 장인들이 레오파드 모델들의 제원표를 들고 지켜보는 가운데 획득 시험이 시작되었다.
먼저, 주력과 회피 능력 테스트.
기존의 기체보다 가벼운 레오파드의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부탁해 강화한 시험이었다.
특별히 동원된 수도 군단의 멕 나이트 여러 기종이 평지, 언덕, 늪지, 산지에서 레오파드와 경쟁하여 달렸다.
지형과 코스에 따라 003과 스피디2가 1위와 2위를 번갈아 차지하는 가운데 엔진 출력이 003에 비해 다소 낮은 005가 3위를 차지했다.
다른 기체들과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음!”
지켜보던 관계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쓸모가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회피 능력 테스트는 범위를 정해 놓은 일정 지역에서 적 기체에 잡히지 않고 달아나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
파일럿의 능력이 뛰어나면 오랫동안 잡히지 않고 달아날 수 있지만, 이 테스트는 파일럿의 능력이 아니라 관절 강도, 운동 범위, 순간 출력을 보려는 시험이었다.
급격하게 방향을 틀고, 멈췄다 갑자기 다시 속도를 높이고,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속임 동작을 하다가 뛰쳐나가도 기체가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미 변경과 아라드 왕국에서 이 부분은 충분히 시험을 거쳤고 보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레오파드는 자신을 잡으러 오는 멕 나이트들을 피해 날렵한 표범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녔다.
“시험을 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의미 있는 기체임에는 틀림이 없군요.”
“그곳에서 어떻게 공을 세울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저렇게 과격한 기동이 가능한 걸 보니 보기보다 훨씬 튼튼하군요.”
장군들과 에이스 파일럿들은 속도가 빠르고 제한적이나마 산악 기동이 가능한 기체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아라드 왕국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군들은 이미 이 기체를 활용하여 어떤 작전을 펼칠지 머릿속으로 그려 보기도 했다.
003, 005, 스피디2에 이어 001과 004에 대한 주력, 회피 능력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이 기체들은 무게가 앞서 테스트한 기체들보다 훨씬 무거워 아이언 워리어의 0.8 수준이었다.
당연히 속도와 회피 능력도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수도 군단의 멕 나이트들보다는 이 부분이 우수했다.
그럼에도 003, 005, 스피디2의 특징이 너무나 선명하게 부각되어 001과 004는 애매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전투 능력, 집단전 능력 테스트에서 만회해야겠군.’
가라로슈는 004와 005 모두를 살리고 싶었다.
001은 003과 마찬가지로 어차피 특수 고급 기체이기 때문에 예외로 하더라도 양산형인 004가 아이언 워리어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기체임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투 능력에서 시선을 확 끌어야 한다.
획득 시험은 한두 가지 테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했던 시험도 반복해서 실시하고 각종 전투 상황을 상정해 내구성, 방어력, 생존 능력, 공격력, 유지력 등을 확인한다.
중요한 시험이 많이 남은 것이다.
가라로슈는 첫날 테스트가 끝나고 관계자들의 반응에 고무되기도 하고 살짝 실망하기도 했지만, 남은 기간 동안 충분히 더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각오를 다졌다.
그때 하루 종일 여러 기체를 타고 테스트를 수행한 루산이 옷을 갈아입고 찾아왔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면도를 해서 얼굴은 멀쑥했으나 이발은 못해서 머리카락이 너풀거렸다.
“외출을 해도 되겠습니까? 가족이 노바에 있어서요.”
루산은 가족 핑계를 댔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내일 테스트를 위해서라도 좀 쉬시는 게······.”
“하하하, 열차 타고 오는 동안 충분히 쉬었습니다.”
“뭐, 그러시다면야······. 술은 드시지 마시고, 자정을 넘기지 않고 돌아오시면 좋겠군요. 안 그러면 기사님이 남은 테스트 일정에 무사히 참여하실 수 있을지 우리가 걱정하게 될 테니까요.”
중요한 테스트를 많이 남겨 둔 상황이라 가라로슈의 염려는 정당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걱정 끼치는 일 없도록 자정 전에 말짱하게 돌아오죠.”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던 루산은 테스트가 끝나자마자 외출했다.
기동 시험장의 군용 마차가 가라로슈의 특별 부탁으로 루산과 클라크를 노바 시내까지 데려다주었다.
가로등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노바 시내에는 많은 마차와 자동 마차들이 도로 위를 누비고 있었다.
클라크가 바쁜 퇴근길의 풍경을 잠깐 바라보다 물었다.
“기사님, 어디 가시는 건가요?”
“글쎄.”
루산은 어디로 먼저 가는 게 좋을지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해 볼을 긁적이다 지나가는 마차를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