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안녕, 안녕
79. 안녕, 안녕
“이게 뭡니까?”
감찰 국장의 말에 오스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제국군 총지휘 훈련에 집행된 예산이 남방군에서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제국군 총지휘 훈련은 대전쟁을 상정하고 필센 제국의 모든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단일 지휘 체계를 유지한 채로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는 대규모 훈련이다.
여기에는 남방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국군 편제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필센 제국의 군대라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총지휘 훈련을 통해서 효율적인 병력 운용 능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방군은 대전쟁 이후 2년마다 실시된 제국군 총지휘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방군 몫의 훈련 예산은 꼬박꼬박 책정되고 집행된 것으로 돼 있었다.
훈련 예산은 훈련 기간에 제공되는 특식비, 연료비, 의료비 그리고 통신 설비 구축비와 운영비 정도로 제국군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용은 미미했지만, 비율로 따졌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단일 항목 액수로는 상당히 컸다.
엄연히 제국군에서 남방군에 지원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제대로 집행이 되었는지 감찰할 권한이 제국군에 있는 것이다.
총지휘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 예산이 계속해서 집행되는 이유, 자체 훈련으로 대체한다고 했으면 이 예산이 용도에 맞게 사용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감찰관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의무였다.
그동안 이것을 문제 삼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국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기안 문서를 바라보다 오스카를 쳐다보았다.
“빈켈 경.”
“네, 국장님.”
“난 밋밋하게 오래가고 싶은데, 경은 화끈한 걸 좋아하나 봅니다.”
“······.”
“이런 사안을 일개 국장이 승인해 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다면 모를까 밑에서 치고 올라갔다가는 다 죽는 거야.”
옳고 그름을 떠나 오스카는 국장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처세가 아닌 명예에 기대어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름 아닌 감찰관이므로.
“위에서 명령을 내리려 해도 알아야 명령을 내리든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보고는 해 보시죠. 훈련에 참여하지도 않는데 예산이 나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니까요.”
“흐음······.”
국장이 오스카를 빤히 쳐다보다 불쑥 물었다.
“설마 한쪽 줄을 잡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요? 경이 오랫동안 전선에서 근무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충고하고 싶군요.”
오스카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대답했다.
“저는 어느 편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제국의 편이죠. 그리고 맡은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예산이 허투루 낭비되는 군대, 부정에 눈을 감는 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기안을 다시 한번 읽은 뒤에 위에 보고할지 여부를 판단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장님. 그리고 이거······.”
오스카는 다른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뭡니까?”
“작년에 남부 지방에 물난리가 났을 때 제국군 장병들이 모금한 수재 의연금이 남방군에 전달되었는데, 제대로 집행이 되지 않았다는 제보가 있어서요. 조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또 남방군인가요?”
국장이 눈살을 찌푸렸음에도 오스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남방군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우들의 성금을 누군가가 횡령했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남방군이 아니라 북방군, 동방군, 수도 군단, 근위대라도 조사 대상이죠. 전우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군대가 어떻게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겠습니까?”
상식론으로 밀어붙이는 오스카의 말에 국장은 굴복하고 말았다.
총지휘 훈련 예산과 같은 심각한 사안도 아니고 고작 수재 의연금 사건이라면 정치적으로 그리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색이 제국군의 비위 조사를 총괄하는 감찰 국장을 맡고 있으면서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말하는 것은 상관으로서의 위신 문제도 있었다.
국장이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의욕에 걸맞게 성과를 보여 주기 바랍니다. 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국장님.”
인사를 하고 나오는 오스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허락해 주면 좋지만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 같은 사안을 먼저 던진다.
당연히 거절하리라 예상했다.
그 다음 작고 가벼운 사안을 던진다.
심각하게 생각하면 충분히 심각하지만, 이것까지 거부하기는 부담스럽다.
그렇게 재가를 받아낸 것이다.
군무부 감찰관 오스카는 수사관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수재 의연금 횡령 사건 조사를 위해.
***
남은 기간 진행된 테스트에서 루산은 004를 탔다.
004를 아이언 워리어를 대체할 수 있는 범용 기체로 홍보하고자 하는 가프 마법 연구소 측의 열망이 반영된 배정이었다.
001과 002의 다운그레이드 모델인 004.
아이언 워리어와 동급 엔진을 탑재하고, 무게는 아이언 워리어의 0.8 수준으로 조금 가벼운 기체.
가벼운 만큼 빨랐지만, 수도 군단과 근위대 멕 나이트를 농락할 수준으로 빠르지는 않았다.
루산은 최선을 다해 수도 군단과 근위대의 멕 나이트를 쓰러뜨려 나갔으나 결국 포위되어 분노의 어깨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내구성 테스트를 빙자하여 004를 둘러싸고 방패로 수없이 두드려 팬 것이다.
“대회전에서 굳이 아이언 워리어 대신 저 기체를 쓸 이유가 있을까 싶군요. 중량 20퍼센트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보십시오, 장군. 혼자서 멕 나이트 4대를 쓰러뜨리고 3대나 반파 판정을 받지 않았습니까? 중량이 적게 나가는 기체의 장점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훈련용 대검이 아닌 마나 진동 대검을 사용했다면 훨씬 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을 겁니다.”
가라로슈가 004를 띄우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그건 저 테스트 파일럿의 기량이 아닌가요? 보통이 아니던데?”
“우리 테스트 파일럿이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은 맞지만, 제국군에는 뛰어난 실력자들이 없습니까? 누구라도 우리 기체를 타고 저 정도의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음!”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대회전에서는 무거운 방패를 채택하면 중량이 부족하여 밀리는 일이 없을 겁니다.”
“방패가 너무 무거우면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수도 있어요.”
“다 장단점이 있는 것이지요. 저 레오파드 004는 충분히 아이언 워리어를 상대하고도 남습니다.”
그때 획득관이 말했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004는 가격과 유지비의 문제가 클 것 같군요. 아이언 워리어와 비슷한 성능을 낸다면 결국 가격과 유지비로 어필해야죠.”
파일럿의 목숨이 달려 있는 멕 나이트.
지금까지 익숙한 기체를 버려야 한다면 그만큼 더 큰 장점이 있어야 한다.
003, 005, 스피디는 확실한 특징과 강점을 선보여서 관심을 끌었지만, 004는 루산의 맹활약에도 성능과 용도 면에서 나쁘지 않다는 정도의 평가를 받고 획득 테스트를 마쳤다.
레오파드의 유지비는 아이언 워리어 계열보다 결코 싸지 않았다.
그동안 생산된 기체 수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진 아이언 워리어는 엔진 출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연비를 개선해 유지비를 줄여 나갔다.
생산량이 많은 만큼 부품 수급도 용이했다.
반면 레오파드는 연비 면에서 아이언 워리어보다 훨씬 나빴다.
더 많이 투자하고 더 많이 연구하면 개선되겠지만, 단기간에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다면 판매가를 낮춰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가라로슈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싸구려 이미지는 쉽게 개선되지 않아.”
더구나 마나 연료와 윤활유를 비축하고 있다는 대전쟁의 전조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가프 마법 연구소로서는 굳이 가격을 확 깎으면서까지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가격 부분은 앞으로 계속 논의해 봅시다.”
가라로슈는 획득관들이 바라는, 가격 대폭 인하 약속 대신 그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획득관들은 참관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국군이 바라는 사항, 이후 테스트 일정, 획득 대상 기종과 물량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루산은 획득 시험을 참관한 장군들로부터 면담 요청을 받았지만, 온갖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면 복잡해질 것 같아서였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점, 아이젠 자작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 군대에서 끌고 갈 가능성도 있고, 변경 군단 소속이면서 특정 마법 연구소의 신규 멕 나이트를 테스트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 변경 8군단에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테스트 일정이 끝났으면 개인 용무를 보고 따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사님. 덕분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라로슈가 정중하게 말했다.
004는 애매해도 나머지는 거의 확정, 그것도 상당한 물량이 가능할 것 같다는 언질을 받은 것이다.
애초에 루산이 약속했던 100대 판매는 가뿐히 넘길 것 같았다.
“다행입니다. 워낙 기체가 좋아서 잘될 줄 알았습니다.”
루산은 가프 마법 연구소 마법사들과 직원들, 모리츠와 파비안과 인사하고 먼저 멕 나이트 기동 시험장을 나왔다.
***
루산은 속이 울렁거렸다.
레오파드 판매량을 높여 보고자 그동안 정말 이를 악물고 테스트에 임했다.
수도 군단, 근위대 파일럿들을 상대하는 것은 변경에서 괴수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매순간 긴장했고, 매순간 집중했고, 매순간 최선을 다해 판단하고 움직였다.
비록 마나 진동 대검이 아닌 통제관의 판정에 불과할지라도 테스트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파일럿들을 해치웠던가!
루산은 정말 통쾌했다.
그때 느꼈던 짜릿함은 변경에서 거대 괴수를 잡아 머리통만 한 생명 구슬을 꺼낼 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운명의 장난만 아니었더라면 자신도 그들 사이에 낄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러지 못했고, 그로 인해 생긴 열등감과 부러움이 멕 나이트 한 대씩 쓰러뜨릴 때마다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갔다.
수도 군단과 근위대 멕 나이트를 쓰러뜨리는 것은 자존심을 세우고, 자신감을 얻고,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에 더해 레오파드 판매량도 높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대가로 수도 군단, 근위대 멕 나이트들에 둘러싸여 분노의 어깨치기를 한참 동안 당해 오랜만에 메스꺼움을 느꼈지만, 이 정도면 무척 싸게 먹힌 것이다.
“흐흐흐!”
루산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우욱!”
그러나 메스꺼움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이 메스꺼움은 멕 나이트를 타고 당한 어깨치기 때문이 아니라 줄리아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압박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줄리아의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머리로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어릴 때 배운 동요를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듯이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발걸음이 저절로 줄리아의 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과연 잘하는 일일까?’
얼른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궁금하기는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때 그 남자는 누구인지, 누구이기에 그렇게 달려가 격정적으로 껴안고 키스를 한 것인지, 그런데 왜 결혼을 안 하고 있는지···, 떠오르는 질문들 중에 상당수가 자신의 저열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궁금증 외에 딱히 다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줄리아와 알고 지낸 6년은 길고 아름다웠으나 변경에서 보낸 7년은 그보다 더 길고 절실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이렇게 말하기는 조금 이상하지만, 만나면 반갑고 든든하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새 여자가 나타나 마음에 스며들고 있어 옛 여인을 만나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물론 그 새 여자에게 다시는 실수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거리를 두겠다고 생각했지만, 줄리아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덴이었다.
줄리아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면 결혼할 것인가?
줄리아가 기꺼이 변경으로 오겠다면 결혼할 것인가?
“후유······.”
루산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공연히 있지도 않은 돌부리를 발로 걷어차며 그 자리를 서성거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가로등 불빛이 점점 들어왔다.
낮에는 더웠지만, 저녁이 되니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때 루산은 큰길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을 느꼈다.
본 것도 아니고 들은 것도 아니고 느꼈다.
젊은 여자가 커다란 그림틀과 화구통을 낑낑대며 들고 왔다.
그러자 어둠에 물들어 가는 거리가 환하게 밝아졌다.
누군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순간 루산은 지금까지 여기서 서성이며 했던 고민들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것은 야한 옷을 입고 낯선 남자에게 달려가 안기던 낯선 줄리아가 아니라 자신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밝고 싱그러운 줄리아였던 것이다.
줄리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배경으로 어둠 속에 잠기고 낑낑대는 줄리아만이 오롯이 살아 움직이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줄리아도 마침내 루산을 발견했다.
커다래진 눈, 벌어진 입술, 그리고 힘이 빠진 손.
손에서 화구통과 그림틀이 빠지려 하자 줄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어 꼭 붙잡았다.
그리고 먼저 말했다.
“안녕···, 루산.”
루산도 엉겁결에 따라 했다.
“안녕! 줄리아!”
루산은 아카데미 1학년 학생이나 할 법한, 참 바보 같은 인사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