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복잡한 관계로군요
81. 복잡한 관계로군요
루산이 장벽 공사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사냥이 막 끝나 멕 워커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멕 나이트는 감시 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루산은 작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장벽 위로 올라갔다.
개척병이 깜짝 놀라 경례를 했다.
“전대장님!”
“수고 많습니다.”
“아, 아닙니다!”
“확성기 좀 쓸 수 있을까요?”
“그럼요!”
루산은 개척병으로부터 확성기를 건네받았다.
- 아아! 3전대장 루산입니다!
확성기로 증폭된 루산의 목소리가 장벽 북쪽에서 작업하고 있는 파일럿들과 대원들에게 퍼져 나갔다.
멕 나이트, 멕 워커, 정찰병, 작업하던 지원 요원들이 고개를 일제히 돌렸다.
- 전대장님!
반가워하는 바이크.
[쳇! 왔네.]
[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레보르크에게 통신을 거는 파펜과 짧게 응답하는 레보크르.
- 아!
안도와 환영의 탄성을 토하는 파일럿들.
- 대장님!
루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동안 느꼈던 두려움과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 시에나.
루산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 내가 없는 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아무 걱정 말아요.
한 사람이 돌아온 것뿐이지만, 3전대원들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엄마 양이 시장에 간 틈에 늑대의 습격으로 난장판이 된 집에 남아 있던 아기 양들이 돌아온 엄마 양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특히 그동안 근무 외에도 짬이 날 때마다 조사를 받는다고 들들 볶여 온 시에나는 친엄마를 만난 것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잠시 후 루산이 어깨치기의 당사자 세 사람을 따로 불렀을 때에도 시에나는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달려왔다.
“왜 그래, 시에나?”
“흐끅! 그, 그게, 으니까, 흐끅!”
시에나가 어깨를 들썩이느라 말을 잇지 못하자 파펜이 대신 말했다.
“왜 그러겠소? 감찰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네가 한 짓을 말해 보라는 둥, 왜 그런 짓을 했냐는 둥, 누가 시켰냐는 둥,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평생 감옥에 갇히고 부서진 멕 수리비를 다 물어내야 한다는 둥 억압적인 분위기로 위협하니까 이 꼬맹이가 겁을 먹어서 그렇지.”
“정말이야?”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파펜을 향해 소리쳤다.
“꼬맹이 아니야, 대머리 아저씨!”
“쳇! 이런 일로 울면 꼬맹이지. 그리고 나 대머리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내가 깎은 거라니까!”
루산이 손을 들어 저지하고 시에나에게 말했다.
“이제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처리한다.”
시에나가 눈물과 콧물을 단 채로 루산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루산이 무척이나 커 보였다.
자신의 꿈을 이뤄 주었고 멕 나이트 조종 실력도 뛰어나서 평소에도 우러러보았지만, 이제 어떤 폭풍우도 막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쉼터 같았다.
그때 루산이 말했다.
“코 닦아라.”
“힝!”
시에나는 부끄러워 얼른 소매로 코를 훔치며 입술을 삐죽였다.
***
루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트리어가 찾아왔다.
루산은 트리어와 함께 개척병이 없는 장벽 위에 나란히 앉아 넓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난리냐?”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네가 함정을 판 거냐?”
“아니, 단장님이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 섭섭하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이런 이야기까지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 네 능력을 워낙 높게 봐서 하는 말이지.”
“내가 신이에요? 이곳에 없어도 내 계획대로 다 되도록 만들게?”
루산이 목청을 높이자 트리어가 실실 웃으며 물러났다.
“아, 알았다, 알았어! 성질은······.”
트리어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레오파드 획득 시험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전 재산을 신화 공업사에 투자했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깨졌어요.”
“응? 뭐가?”
트리어가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에 루산은 씩 웃었다.
“001 몸체 부품이 깨졌어요. 코부스 멕 바디라는 회사에서 만들었잖아요. 앞으로 신화 공업사 제품으로 교체해서 테스트 다시 한대요.”
“놀래라! 너 이 자식! 간 떨어질 뻔했잖아!”
트리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우리한테 잘된 거잖아!”
“흐흐흐, 놀라기는 아직 일러요.”
“뭐가?”
“내구성 테스트 다시 하기로 해서 주문량이 미정이기는 한데, 그런 제안을 했다나 봐요.”
“무슨 제안? 뜸 들이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 봐.”
“001, 003, 005, 스피디. 이 네 종류는 생산하는 대로 구입하겠다고요.”
“······!”
트리어가 입을 떡 벌렸다.
“공식적인 제안은 아니고 비공식적인 이야기인데, 여하튼 레오파드 성능을 좋게 봤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가프 마법 연구소의 멕 나이트 생산 능력을 아직까지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고······.”
당연한 이야기였다.
사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도 한 달에 세 대 생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것도 신규 멕 나이트 생산 업체로서는 결코 적은 수량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제국군에서 대전쟁 발발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이죠.”
“음!”
“확실한 것은 시간이 더 지나 봐야 아는 것이지만, 가프 마법 연구소 측에서는 이 기회를 최대한 살리려 할 거예요. 생산량을 늘리겠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죠.”
“그렇다는 건 생산 시설을 증축하려 할 것이라는 이야기?”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추가 투자를 서두르라는 뜻이 포함된 고갯짓이었다.
“그런데 생산 시설 건설에는 시간이 걸릴 텐데, 전쟁이 생각보다 빨리 발생하면 소용없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죠.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대 생산 시설 공사가 끝나도 상관이 없죠. 그때는 멕 나이트 수요가 더 늘어날 테니까. 전쟁이 끝난다 해도 그동안 부서진 멕 나이트를 채워야 할 테고.”
“음.”
“전쟁이 발생하지 않아도 이처럼 긴장 국면이 길어지면 레오파드는 충분히 많이 팔릴 거예요. 정말로 만드는 족족 구입할 수도 있죠. 그러니 레오파드 관련 업체에 최대한 투자하세요.”
트리어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미 신화 공업사에 투자할 때 끌어올 수 있는 돈은 모두 끌어왔다.
그동안 변경에서 모은 재산, 처가와 본가의 재산까지, 더 끌어올 곳이 없었다.
그의 속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루산이 말했다.
“장벽 생산 시설 공사 현장은 일이 고된 게 흠이지 수입은 압도적으로 높을 거예요. 전대장 분배 비율이면 여기서 몇 달 지내는 동안 1년 수입보다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기는 하겠더라. 잠이 부족해지는 게 문제지.”
“그렇다고 멕 나이트를 더 동원하면 나눠 먹을 사람이 늘어나니까 이 정도가 딱 좋지 않겠어요?”
“그 말도 맞지. 그러고 보니 레겐스가 떨려 나간 게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네.”
변경 8군단 기동 전단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전대장이 될 뿐 아니라 장벽 생산 시설에 투입돼 다른 곳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트리어는 이처럼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음으로써 호감을 사는 스타일이었다.
루산이 웃으며 말했다.
“이러다 차기 전단장으로 직행하시겠어요. 잘 부탁합니다.”
트리어가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손을 저으며 말했다.
“에이, 너무 갔다. 뭘 또 그렇게까지······. 근데 그게 가능하더라도 멕 나이트 파일럿을 최대한 길게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사냥 성과 보상금은 멕 나이트 파일럿이 훨씬 높았다.
“전단장이라고 멕 나이트 조종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전선에서도 간간이 전단장들이 현역으로 뛰는데 변경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요?”
“오! 그것 참 좋은 말이로군.”
“그럼요. 얼른얼른 높이 올라가셔서 부족한 이 막내 전대장을 잘 이끌어 주셔야죠.”
“크크크, 갈수록 뻔뻔해진다?”
“흐흐흐, 다 누구한테 배운 거랍니다.”
트리어와 루산은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뜻에서 감찰부 애들한테 우리 파일럿들 적당히 괴롭히고 돌아가라고 좀 해 주세요. 그렇잖아도 사람은 없고 일은 많아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쉬는 시간에 괴롭히면 되겠어요? 누가 봐도 빤한 일을 왜 들들 볶아요?”
루산은 아무래도 사건의 당사자들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어서 직접 이야기하면 뒷말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트리어에게 부탁한 것이다.
“알았다.”
트리어는 흔쾌히 대답하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멀리서 괴수 몇 마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빤한 사건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지.”
트리어가 루산을 내려다보며 찡긋하더니 자신의 멕 나이트를 타고 돌아갔다.
“그렇죠. 빤한 사건인데.”
루산은 멀어지는 트리어의 멕을 보면서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바덴은 당장 코부스로 가서 투자하라는 루산의 지시를 듣자마자 슈텐달 남작에게 달려가 동행을 제안했다.
“확실한 건입니다, 남작님. 저와 함께 가셔서 분위기를 보고 곧바로 투자를 하시죠.”
“좋소. 미스 고슬라.”
그렇게 해서 슈텐달 남작은 경호원과 딸을 데리고 바덴과 합류했다.
딸을 데려간 것은 여러 날이 소용되는 여행에 바덴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한 조치이면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덴도 여자 비서 한 명, 남자 직원 한 명을 대동하고 슈텐달 남작 일행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그들은 사흘 동안 열차를 타고 코부스 역에서 내렸다.
루산에게서 받은 - 루산이 트리어로부터 받은 – 목록에 적혀 있는 레오파드 부품 생산 업체들을 방문해 업체의 능력과 역량을 살펴보고 투자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슈텐달 남작이 동행한 것은 일의 빠른 진행에 무척 큰 도움이 되었다.
큰 회사를 경영하는 귀족이고 세련된 차림새의 중후한 사업가라서 관련 업체들이 저자세로 자료를 제공하고 현장을 살펴보고 싶다는 말에도 적극적으로 응했던 것이다.
‘허허, 나를 이렇게 써먹으려고 불렀군그래.’
슈텐달 남작은 바덴의 수완과 치밀함에 감탄했다.
전에 피닉스 제철과 슈텐달 공단 사업 설명회를 개최할 때 이미 능력을 짐작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새삼 그 재주가 아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바덴 혼자 왔다면 이 업체 사람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자가 받는 사회적 인식과 대우를 알고 의심과 해명에 쏟는 낭비를 줄이기 위해 자신과 동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은 자신에게도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장차 이익 볼 것이 확실한 회사들에 투자할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여자인 것이 아깝군.’
어쨌든 바덴은 업체들이 제공한 자료들을 빠르게 검토하며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판단하고, 투자 계약에 따른 여로 조건들을 조율해 나갔다.
그 모습에 슈텐달 남작과 그 일행들은 그 치밀함과 능숙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투자 대상 업체 대표들은 바덴을 슈텐달 남작의 비서쯤으로 생각하다가 최종 투자 계약을 체결할 때 별도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덴 고슬라예요. 노바에서 사업을 하고 있죠.”
“아! 그러시군요! 그것도 모르고······.”
“괜찮습니다. 사장님은 결과로 말해 주시면 됩니다. 앞으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이 직원을 통해 연락을 주세요.”
여러 날에 걸쳐 코부스 지역 레오파드 관련 업체들을 모두 훑은 바덴은, 동행한 남자 직원을 코부스 지역에 투자한 업체들을 총괄하도록 남겨 두고 슈텐달 남작 일행과 함께 변경 8구역의 중심 도시 라돔 시로 출발했다.
출발 전에 루산에게 들은, 코부스 역에서 파는 빵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 빵이 맛있다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왜 그리 많이 사는 건가요, 미스 고슬라?”
“이 빵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해서요.”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슈텐달 남작은 경호원을 시켜 빵 봉지를 들어주게 했다.
“고맙습니다.”
바덴과 슈텐달 남작 일행은 마나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출발하고 일행은 빵을 먹었다.
따뜻하고 고소했다.
슈텐달 남작은 다람쥐처럼 빵을 먹는 바덴을 보다 넌지시 물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미스 고슬라?”
“그럼요.”
“실례지만, 그 사람과는 어떤 관계인지요?”
“콜록콜록!”
바덴이 사레들려 기침을 했다.
입을 가렸지만, 빵가루가 튀어 나왔다.
비서가 얼른 우유를 건네자 바덴은 꿀꺽꿀꺽 마셨다.
그런 뒤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조신하게 입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빵이 목에 걸려서······.”
“괜찮으세요?”
슈텐달의 딸은 자신에게 바덴의 입속에 있던 빵가루가 튀었지만, 불쾌해하지 않고 그녀를 먼저 걱정했다.
“네. 죄송합니다.”
바덴은 다시 우유를 조금, 아주 천천히 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두뇌는 적당한 대답을 찾기 위해 매우 빠르게 돌아갔다.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이성과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켜 얼른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서 우유를 천천히, 계속 마셨다.
그러다 마침내 빤하면서도 적당한 대답에 도달했다.
“업무에 따라 투자자와 경영자, 사업 파트너, 의뢰인과 대리인을 오가는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대답을 하고 곧바로 후회했다.
이 가운데 하나만 대답한다고 슈텐달 남작이 무어라 할 것도 아닌데, 혼자 괜히 진지하게 생각해서 정확한 답을 도출하려 했던 것이다.
“허허, 복잡한 관계로군요.”
슈텐달 남작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바덴의 가슴에 날카롭게 꽂혔다.
열차가 라돔 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