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오늘은 좀 멋있네
84. 오늘은 좀 멋있네
본부 강당에 변경 재판소가 차려졌다.
문제의 어깨치기 - 멕 나이트 몸싸움 - 에 직접 뛰어든 1전대와 3전대 파일럿 13명, 지휘 감독 책임이 있는 1전대장 레겐스, 당시 출장을 가서 현장에 없었던 루산.
관련자 15명과 본부의 간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특이한 점은 15명 가운데 루산만 피고인석이 아닌 방청석에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파펜은 짜증이 잔뜩 묻어 있는 표정, 레보르크는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데 반해 시에나는 몸을 덜덜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19세 소녀에게 재판소는 판결이 어떻게 나느냐와 무관하게 두려울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만 떨어, 꼬마야! 네 대장이 지켜준다고 했잖아.”
“안다고요! 하지만,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걸 어떡해요? 대머리 아저씨와 달리 난 법 없이도 착하게 살아왔다고요. 이런 장소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쳇! 아직도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니 견딜 만한가 보네.”
시에나는 불안함에 몸을 돌려 루산을 쳐다보았다.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걱정 마.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알았어요!’
시에나도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후우우우~ 하아아아~”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단장이 들어와 재판장석에 앉았다.
감찰부장, 인사부장, 회계부장, 정비창장도 들어와 피고인석 맞은편에 앉았다.
감찰부장이 그동안 조사 결과를 보고한 뒤 피고인들의 죄목을 알리고 형벌을 구형했다.
1전대 파일럿들에 대해서는 특수 폭행죄, 군형법에 준한 아군 폭행죄, 특수 무기 부정 사용죄, 군용물 손괴죄 등의 죄목을 열거하고 벌금형을 구형했다.
1전대장에게는 지휘 감독 의무 위반죄와 함께 위 죄목들에 대한 방조죄가 추가되었다.
3전대원들에게는 과잉 방위로 인한 군용물 손괴죄의 책임을 물어 벌금형을 구형했다.
루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쯧, 어쩔 수 없나?’
멕 나이트 3대와 10대가 붙어 10대 쪽 8대를 부쉈으니 과잉 방위로 판단한 것을 부당하다고 비난하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벌금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자신의 수입으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 재판이 단지 형사 재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사와 변경 계약까지 한꺼번에 처분이 내려진다는 것이다.
감찰부장에 이어 정비창장이 수리 비용을 보고하고, 회계부장이 수리가 완료되기까지 멕 나이트를 사용하지 못한 데 대한 손해 액수를 산정해 보고했다.
“···모두 합치면 17만 3천 골드입니다.”
“흐어억!”
방청석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왔다.
감찰부장이 다시 나서서 총 손해 액수를 책임 비율로 나눠 부과했다.
“1전대가 시비를 걸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고, 멕 나이트를 무려 열 대나 동원했기 때문에 1전대의 책임이 훨씬 무겁습니다. 따라서 1전대의 책임을 90퍼센트, 3전대는 과잉 대응의 책임을 물어 10퍼센트의 비율로 손해 액수를 부담합니다. 1전대장은 이 사건 전에도 유사한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음에도 제어하지 않은 점을 들어 1전대 책임의 절반을 부담합니다.”
“······!”
1전대장 레겐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렸다.
“1전대장, 끝났네. 저 금액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
“쯧쯧쯧. 20년 넘게 변경 땅에서 오지게 구르고 빈털터리가 되겠구나!”
마지막으로 인사부장이 일어서서 말했다.
“1전대장은 계약 해지. 나머지 피고인들은 계약 기간과 무관하게 벌금과 손해 배상금을 모두 납부할 때까지 8구역을 이탈하지 못합니다.”
벌금과 손해 배상금을 모두 낼 때까지 노예 계약을 맺은 셈이었다.
부장들의 구형과 보고를 모두 들은 단장이 무거운 얼굴로 최종 판결을 내렸다.
판결 내용은 부장들의 말과 거의 일치했다.
다만 책임 비율 부분에서 잠깐 멈칫하다 판결문을 그대로 읽지 않고 변형했다.
“1전대의 책임 비율을 95퍼센트, 3전대의 책임 비율을 5퍼센트로 한다.”
단장이 3전대의 책임 비율을 더 낮춘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레겐스는 보유한 모든 재산으로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벌금과 손해 배상금을 납부하고 8구역을 즉시 떠난다.”
추방 명령.
이것이 온정 어린 조치인지 가혹한 조치인지에 대해 방청석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보유한 재산이 손해 배상 책임액보다 많다면, 책임을 다하고도 20년 넘게 살아온 땅에서 추방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혹한 조치인 셈이다.
반면 보유한 재산이 그리 많지 않다면 그것만 내고 떠나면 나머지 손해는 군단 본부가 부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보면 온정 어린 조치인 것이다.
루산은 단장이 나름 자비를 베푼 것으로 보았다.
벌금을 제외하고도 손해 배상금을 무려 8만 골드 이상 납부해야 하는데, 그만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변경 파일럿들이 많이 번다지만, 실력 있고 성실한 트리어조차 신화 공업사에 투자할 3만 골드를 마련하는 데 본가, 처가의 재산을 싹싹 긁어야 했다.
물론 자신은 예외였다.
우르사를 소유하고 있고 테스트 기체 사용료를 따로 물지 않으며 연료비와 각종 소모품 값이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엄청난 사냥 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군단 멕을 타는 파일럿보다 10배 이상의 성과 보상금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기본급 수입과 변경 투어 관광 수입으로도 다른 파일럿들의 성과 보상금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1년에 몇만 골드씩 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단장의 판결이 끝나고 나서 방청석이 웅성거리고 1전대 피고인들이 죽을상을 하고 있을 때 파펜, 레보르크, 시에나도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3전대의 책임이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고는 하나 그 액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1전대는 전대장이 절반을 부담하고 나머지 액수를 10명이서 나누는 것이지만, 3전대는 3명이서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서 2,800골드 이상을 납부해야 하는 것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니까! 다 책임을 진다더니······.”
파펜이 인상을 구기고 투덜거렸다.
그때 방청석에서 루산이 일어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단장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재판 중에 방청객이 개입하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단장이 루산을 쏘아보며 말했다.
“불복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3전대장?”
“아닙니다.”
“그럼 뭐지?”
“사건 당시 제가 현장에 없었다 해도 저 역시 지휘 책임과 감독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부하들의 벌금과 손해 배상금을 제가 납부하겠습니다.”
방청객들과 피고인들뿐 아니라 무장 경비병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와!”
“3전대장의 재력이 그 정도야?”
“멋진데?”
특히 시에나가 얼굴이 환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장님!’
땅땅땅!
단장이 재판봉을 두드려 소란을 가라앉혔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하려고 나섰나? 대신 납부하든 말든 그야 3전대장이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지. 할 이야기는 그게 전부인가?”
“아닙니다.”
“아니면 뭔가?”
단장이 짜증을 냈지만, 루산은 주눅 들지 않았다.
“과잉 방위로 판단을 하신 재판부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은 우리 3전대 파일럿 세 명의 실력이 1전대 파일럿 열 명의 실력보다 월등히 뛰어나 상대의 멕 나이트를 부수지 않고도 제압이 가능했다고 판단하신 건데, 그 정도 실력으로 보았다면 이번 기회에 실력에 합당한 대우를 해 줘야 한다고 봅니다. 시에나, 파펜, 레보르크의 기본급 인상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재판부 결정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하들을 지키고 더 나은 대우를 받게 해 주겠다는 상관으로서의 의지를 확고히 보이는 것이었다.
오오오오!
방청석에서 탄성이 나왔다.
시에나의 눈에서는 동경의 눈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단장이 다시 재판봉을 두드렸다.
땅땅땅!
단장은 루산의 이러한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세운 공과 부하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해서 넘어가기로 했다.
“그것은 인사부장과 상의할 일이다. 재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함부로 개입한 데 대해 재판 방해죄를 물어 벌금 5골드를 부과한다.”
땅땅땅!
“자리에 앉도록!”
“죄송합니다, 단장님.”
루산은 사과하고 곧바로 앉았다.
“이상으로 재판을 마친다!”
단장이 일어나서 나가고 부장들이 그를 따라 퇴정했다.
1전대장과 1전대 파일럿들은 특별한 감시를 받으며 끌려 나간 반면, 3전대 파일럿들은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대장님!”
시에나가 기쁘게 소리치며 달려가 루산을 안으려 하자 루산이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밀고 제지하다가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히잉!”
그 광경을 본 레보르크가 미소를 지었다.
파펜이 입술을 삐죽이며 뇌까렸다.
“쓰벌, 재수 없게 오늘은 좀 멋있네.”
***
“수재 의연금 부정 의혹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감찰 국장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내밀며 하는 말을 들은 남방군 인사 총무 담당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눈만 깜박였다.
남방군의 부정 의혹을 조사한다?
제국 군무부 감찰관이?
수재 의연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군부부 감찰관이 남방군을 조사한 적이 없었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수재 의연금 유용과 관련된 것이라니, 어쨌든 직접 결정할 수 없다고 판단해 상부에 보고했다.
남방군 인사 총무 실장 또한 자신이 결정하기 어려워 남방군 부사령관에게 보고했다.
“미친 거 아닌가? 누가 누굴 조사해?”
일단 펄쩍 뛰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했다.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
남방군 역시 필센 제국 소속이었다.
공식적으로 제국군 편제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
형식적으로나마 제국군 편제에 따른다고 남방군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았던가?
제국군의 조사를 거부하는 모양새를 보였다가는 온갖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수재 의연금이 제국군 여러 부대에서 모은 돈이므로 이에 대한 유용이 있다면 군무부 감찰국에서 감찰 권한을 갖는 것도 문제 삼기 어려웠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오베론 공작의 반응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제 대놓고 내 부정을 캐 보겠다는 것인가!”
화를 내는 공작에게 부사령관이 차분하게 조언했다.
“굳이 정치적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중대한 사안도 아니고, 아예 뒷말이 없도록 전폭적으로 협조해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폭적인 협조?”
“네.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을 당당히 보이는 것이죠. 조사해서 뭔가 나온다 하더라도 기껏 실무진 몇 명이 몇 푼 챙긴 것일 텐데, 그런 걸로 감히 사령관님이나 남방군 전체를 공격하려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겁니다.”
“음!”
오베론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로 어떤 제보를 받고 충직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왔는지 모르지만, 고작 이런 일로 크게 엮으려 했다가는 저쪽이 더 다칩니다. 대범하게 제국군에 협조한다는 걸 보인다면 오히려 저쪽을 왜소하게 만드는 셈이 됩니다.”
부사령관이 덧붙였다.
“우리 감찰관도 붙여 적극적으로 조사하는 게 좋겠습니다. 부정이 있다면 뿌리 뽑아서 좋은 것이고, 그러면서 저쪽 의도를 파악해 볼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네. 그렇게 해.”
오베론 공작은 조사에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뒤 잊어버렸다.
그리 큰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군무부 감찰관 오스카는 남방군의 감찰실 조사관들과 인사 총부 부서 직원들의 협조 속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문서에 기록된 수재 의연금 수령자와 지불 액수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대상자를 일일이 면담하고 확인하느라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다.
“아휴~ 뭘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남방군 관계자들이 오스카의 꼼꼼함에 혀를 내둘렀다.
오스카와 조사관들을 따라다니다 지쳐 떨어진 것이다.
“전우들이 모아 준 소중한 돈입니다.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지요.”
오스카의 말에 차마 반박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꽉 막힌 군인이라고 욕을 했다.